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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담화'라는 단어가 있다. 국어 사전에는 "뒤에서 서로 말을 주고받는 행위 또는 그러한 말을 이르는 말."로 풀이해 놓았다. 뜻풀이 자체만 보면 중립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말은 일상의 말살이에서 대개 부정적인 어감을 갖는다. 다른 이와 함께 그 자리에 없는 어떤 사람을 좋지 않은 말로 은밀하게 이야기하는 맥락에서 주로 쓰이기 때문이다. '까다'와 같은 비속어적인 서술어와 함께 '뒷담화를 깐다'처럼 쓰이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뒷담화는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그 대상과 온전하게 관계를 맺는 일과는 거리가 멀다. 두 사람의 관계 맺기에서는 상호 실존(實存, exist)에 대한 자각이 중요하다. 그런데 실존은, 그 어원상 주체의 존재(의미)가 '밖에(ex-) 있음(-ist)'을 의미한다. 나는 나 안에서는(자체로는) 의미 있는 존재가 아니다. 홀로가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나 자신이, 그리고 그 타인의 존재가 진정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뒷담화에서는 그러한 실존이 사라진다.

뒷담화는 그 말의 의도가 사감에 휩싸여 있을 때 나온다. 거기에는 말하는 사람 자신의 노골적인 욕망이 밑바탕에 끈적하게 깔려 있는 경우가 많다. 그 벌거벗은 욕망에 복무하는 일방적인 매도와 비난이 난무한다. 대상이 된 이들의 논리는 철저하게 무시된다. 그(뒷담화의 대상)는 부재하고, 프레임은 바로 뒷담화를 하는 내가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뒷담화는 그래서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노회한 정치꾼이나 시정 부랑배가 애용하는 말하기다.

뒷담화는 언뜻 보면 이성적인 비판의 날을 앞세우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결국은 일방적인 비난이나 네거티브로 귀결된다. 뒷담화의 근거로 내세우는 근거들은 지극히 자의적이다. 한 마디로 뒷담화에는 합리적인 비판이나 성찰이 들어설 여지가 거의 없다. 만약 그렇다면 '앞담화'를 못할 이유가 없다. 그러므로 뒷담화는 나름대로 스스로를 '고상한(고상하다고 여기는?)' 교육자로 여기는 교사의 입에서는 나와서는 안 되는 말법인 셈이다.

그런데 교실에서, 그리고 수업 시간에 문제가 생겼을 때 많은 교사가 애먼 아이들을 미워하고 탓한다. 이때 교사는 절대 선(絶對善)과 지극(至極)의 경지에 오른 무오류의 화신이 된다. 그가 내리는 현실 진단은 냉철할 정도로 합리적이며, 아이에 대한 인간학적 분석은 철두철미하다. 그의 말은 단순한 사실의 차원을 넘어 진실과 진리의 경지에 이른다.

한 아이와 교사가 있다. 먼저 아이가 교사에게 무슨 말인가를 건넨다. 교사가 그것에 대꾸한다. 그런데 아이가 교사의 말에 토를 단다. 교사는 인내심을 갖고 조곤조곤 다시 말한다. 불행하게도(?), 그 아이가 또다시 토를 단다. 교사는 화를 낸다.(혹은 어떤 다른 교사는 이야기를 또다시 되풀이한다.) 어떻게 해서 상황이 종료되어 아이는 교실로 돌아간다. 잠시 후 교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동료 교사들에게 말한다.

"요새 애들이 저렇다니까요."

그러니 뒷담화를 하는 교사들의 입에서 '옛날 타령'이 나오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럽다. 겉으로 보기에 교사의 옛날 타령은 회고적인 태도로 과거를 그리워하는 아련함으로 포장된다. 하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아이들을 '까기' 위한 것일 때가 많다. 늘상 아이들과 마주치는 교사의 특성상, 그저 말 그대로의 옛날 이야기조차 아이들에 대한 뒷담화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은 이유다. 이런 경우를 아주 전형적으로 '오버'라고 해야 하지 않나. 왜 자신들의 회고담을 아이들을 향한 뒷담화의 실마리로 삼는가.

교무 회의와 같은 전체 교직원 모임에서도 '요새 애들은'으로 시작되는 뒷담화가 아주 공공연하다. 학교 관리자의 입에서 청소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올 때 특히 더 그렇다. 아이들이 학교에 왜 나오는가. 청소를 하려고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아이들은 교과 활동을 경험하고 관계를 맺으면서 무언가를 배우고 깨닫기 위해 학교에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청소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이렇게 말한다.

"요즈음 학생들이 청소를 하지 않습니다. 교육적인 차원에서 꼭 임장(臨場) 지도해 주세요."

물론 학교에서 아이들이 직접 청소를 하는 게 전혀 무용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여러 사람이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공간을 친구들과 함께 손수 깨끗이 닦고 정리하는 일은 공동체 의식을 기르고 협력하는 일의 소중함으로 깨닫는 귀한 시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나라 중등학교의 청소 문화는 다른 나라에는 없는 미덕 교육의 사례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정도에서 그쳐야 한다. 아이들이 매일 같이 그런 공동체 의식을 기를 필요는 없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청소를 한다고 해서 서로 협력하는 일의 의의를 깨달을 수 있을까. 미덕도 그 정도가 되면 악덕이 된다.

그렇지 않아도 아이들은 충분히 바쁘고 힘들게 학교 생활을 해 나가고 있다. 난 교실 청소에 '올인'하는 교사들이 자기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열성을 다해 청소 교육을 시키는지 묻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렇게 청소와 정리와 청결이 중요하다면 왜 스스로 교무실 청소를 하지 않는가. 교무실 책상 위는 또 왜 그렇게 지저분한가. 요컨대 '청소'를 화제로 한 교사들의 담화는 교육적인 토론이 아니라 뒷담화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교사들의 뒷담화 중 압권은 아이들의 태도나 성적, 공부 등에 관한 것이다. 태도의 문제부터 살펴보자. 태도에 관한 교사의 뒷담화는 학생을 향한 태도 교정 작업(?)이 실패했을 경우에 나타난다. 그런데 태도가 어디 그리 쉽게 바뀌나? 태도는 내면의 의식과 관련되는 것인지라 결코 쉽게 변하지 않는다. 호튼(Myles Horton, 1905~1991; 미국의 시민권 운동과 지역사회 학교운동을 이끈 교육 활동가)과 같은 세계적인 교육학자조차 사람의 태도를 바꾸느니 시스템을 바꾸겠다고 하지 않았는가.[파울로 프레이리 ․ 마일스 호튼 지음, 프락시스 옮김(2007), 우리가 걸어가면 길이 됩니다, 아침이슬. 참조]

물론 이런 주장에 대한 찬반 논란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의 태도보다 시스템을 바꾸는 게 더 낫다는 호튼 식의 견해는, 보통 사람들의 일상을 고려할 때 상당히 많은 진실을 담고 있는 것도 분명해 보인다.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은 어떤 특별한 계기가 생기지 않는 한 체제(시스템)의 명령과 질서에 복종한다. 우선 살아가는 게 중요하기 때문에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태도를 바꾸어 체제를 바꾸는 일에 힘쓰라느니, 이를 위해 체제의 명령에 저항하고 그들이 고수하고자 하는 질서를 무시하라느니 하고 말하는 것은 그들에게 자신의 평범한 일상을 포기하라는 것과 다르지 않다. 자신의 일상적인 생존권을 담보로 거대하고 강력한 시스템이나 권력에 부딪치라는 것이다. 이는 말이 쉽지 결코 그 누구도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문제들이다. 이것은 의식의 대대적인 혁신을 위한 철저한 자기 파괴의 고통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시스템을 바꾸는 일은 얼마든지 여러 사람이 함께 힘을 합쳐 펼쳐 나갈 수 있다. 함께 하는 이들과 꾸준한 시간만 확보된다면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시스템과 체제를 바꾸면 사람들의 태도 또한 그에 맞춰 자연스럽게 바뀌어간다. 교사를 포함하여 교육에 관심을 갖고 있거나 사회 혁신 운동을 하려는 이들이 곰곰이 곱씹어 볼 만한 대목이다.

그런데 교사들은 그 무모한 일, 아이들의 태도와 의식을 바꾸는 일을 급하게 하려고 한다. 아이들에게 별다른 품도 들이려 하지 않는다. 이들은 몇 번의 말이나 행동만으로 아이들의 태도를 바꿀 수 있다는 자신감(?)에 도취되어 있다. 교사의 이러한 모습은, 그가 아이들의 잘못된 태도를 바꾸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만큼이나 위험하다. 교사가 그런 태도를 취하는 순간 그가 아이들을 강압적인 통제의 대상으로 간주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과도한 자신감과 자신만의 소신(철학)으로 똘똘 뭉친 폭력 교사나 아이들을 일방적으로 훈계하는 교사들을 상기해 보라.

어쨌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교사들의 바람이나 노력과는 무관하게 쉽게 변하지 않는다. 변한 듯하다가도 원래 자리로 돌아갈 때도 많다. 그럴수록 교사는 낙심하고 분노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 아이를 포기한 교사의 입에서 적나라한 뒷담화가 터져 나온다.

"돼먹지 못한 녀석이 제멋대로야. 잘난 척 하는 걸 보라지."

이는 교사가 자신의 교육적 목적을 포기하는 선언에 다름 아니다. 교사는 아이가 자신의 인간성을 발현하고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이끄는 이가 아닌가. 문제는 많은 아이가 교사의 그런 배려(?)를 튕겨낸다는 점에 있다. 때로는 정중하게, 때로는 아주 노골적으로. 그렇다고 교사가 포기해서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런데 교사는 단 몇 번의 시도만으로 쉽게 포기하고 뒷담화를 하는 것이다. '요새 애들은' 식으로 말이다.

성적에 관한 교사들의 뒷담화는 교사인 나를 가장 낯 뜨겁게 한다. 나는 성적(만)을 학교 교육의 목표로 삼는 데에는 결단코 반대한다. 그래서 학교에서도 동료 교사들과 함께 성적에 관해 대화를 나누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솔직히 나는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말하는 그 성적에 어떤 교육적 의의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많은 교사가 성적 이야기를 하면서 아이들을 탓하고 '까는' 것에는 꼭 한 마디 하고 싶다.

아이들의 성적은 그 자신의 공부 방법이나 태도 등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학교 요인의 영향력도 상당하다. 학생들을 대하는 학교의 태도나 공부 프로그램의 여하에 따라 성적이 요동을 치는 일이 많다.(MB 정권 아래서 일제고사를 둘러싸고 학교 안에서 벌어졌던 이런저런 행태들을 상기하자.) 부모의 경제력이나 지역의 사회 문화적 배경 조건 등도 아이의 성적이나 공부 태도 등과 큰 상관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교사 요인을 무시할 수 없다. 드라마 대신 책을 보는 부모 아래서 아이들은 책을 자연스럽게 접한다. 마찬가지로 교과에 대한 열정과 애정을 가진 교사 아래서 아이들이 그 교과에 관심을 갖고 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도 당연한 현상이다. 교사가 끊임없이 연구하고, 자기 혁신을 위해 연수와 탐구 활동 등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 점에서 교사가 진정으로 가르치는 전문가가 되려면 부족한 무언가를 스스로 배울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진정한 전문가는 스스로가 완전한 전문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 나아가 나와 다른(또는 나보다 나은) 전문가의 전문적인 역량과 지식을 활용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닐까.

그러니 교사는 늘 깨어 있고 열린 자세로 세상과 타인을 향할 수 있어야 한다. 공부하고 배우며 자신의 의식의 지평을 넓히는 데 힘써야 한다. 요컨대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우리 사회 전문직의 대명사인 의사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학회나 세미나를 다니고, 대학원 공부를 하거나 강의를 하는 것도 그 자신의 전문성을 꾸준히 업그레이드 하기 위함이 아니겠는다.

하지만 많은 교사가 그렇지 못하다. 지금 우리나라의 교무실에서 자기 성찰과 사색을 하는 이가 과연 얼마나 될까. 두루 널리 책을 펼쳐서 자신의 좁은 지식을 넓히고, 사람들을 만나 함께 살아가는 일의 소중함을 실천하는 교사는 또 얼마나 될까. 스스로를 연찬(硏鑽)하면서 진정한 교육을 위해 헌신하는 교사들이 당신과 우리들 주변에 과연 있는가.

별로 많지 않다. 많은 교사가 수업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교사가 책 한 권 보지 않는다. 그의 머릿속에 담긴 교과 학문 세계는 그가 대학을 졸업하고 학교에 임용된 그 시점에 머물러 있을 때가 많다. 이들에게 성찰과 사색, 자기 연찬과 같은 말은 고어 사전에나 담겨 있는 사어(死語)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아이들 앞에서 스스로 인생과 학문과 사회의 최고 멘토처럼 군림한다. 게으름과 뻔뻔함의 극치가 따로 없다.

나는 우리 교사 집단을 '철밥통'이라며 도매금으로 매도하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영 맘에 들지 않는다. 공무원이나 교수 등을 향한 비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생각한다. 교사나 공무원이나 교수 집단이 마음에 들어서가 결코 아니다. 내가 교사여서는 더더욱 아니다.

다만, 교사든 공무원이든 교수든 한 사회 공동체가 안정적으로 지탱되어 나가기 위해서는 그 안에 그런 '철밥통' 집단이 많아야 한다는 관점에서 그렇게 보는 것이다. 그러니 그 집단이 교사나 공무원이나 교수가 아니어도 상관 없다. 그렇게 해서 나는 이 사회 모든 직종과 직업이 철밥통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를 전제로, 나는 그런 '철밥통' 집단에 속해 있는 이들의 책무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사회적인 헌신성 역시 중요하다. '철밥통'이 아닌 집단을 향한 염치도 있어야 한다. 물론 대한민국이 '정상적인' 사회가 된다면 궁극적으로 이 모든 책무, 헌신, 염치 들을 굳이 내세워 강조할 필요는 없다. 그때가 되면 이 모두를 자연스러운 직업 윤리처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면 되겠기에 말이다.

하지만 지금 한국 사회는 그런 것들이 없더라도 있는 체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곳이 돼버렸다. 과도한 현실 불안에 따른 사람들 사이의 불신과 반목 때문이다. 그런데도 많은 교사가 천하 태평이다. 책무와 헌신과 염치는 먼 화성인의 얘기다. 그런 것들을 따지는 경우가 없진 않다. 하지만 잘 살펴보면 거기에는 결국 성과급과 교원 평가에 따른 강제성이 자리잡고 있다. 그런 이들이 대놓고 아이들을 뒤에서 험담한다.

"도대체 요새 아이들은 공부를 안 한단 말야."

요새 아이들이 왜 공부를 하지 않는가. 온 세계에서 학습 노동을 가장 많이 하는 이들이 대한민국 학생들이다. 공부는 성적이 좋은 아이나 그렇지 못한 아이나 다 마찬가지로 많이 한다. 내 경험으로 미루어 보건대, 그 어떤 '저질 성적'의 아이들이라도 공부와 성적에 대한 고민은 '고질 성적'(?) 아이들의 그것에 비해 결코 작지 않다. 성적이 기대대로 나오지 않을 때가 많은 만큼 그 고민은 오히려 더 넓고 깊고 크다.

교사들이 공부 안 한다고 도매금으로 뒷담화하는 아이들은 공부를 싫어하는 게 아니다. 안 하는 것도 아니다. 그 아이들도 집에서는 애지중지 귀애받는 자식이다. 그래서 많은 가난한 집 부모가 한 푼이라도 더 벌어서 학원을 다니게 하고 과외를 시킨다. 그렇게 하는데도 잘 되지 않는다. 우선 공부 요령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면 교사들이라도 친절하게 이끌어주어야 하는데 그렇지도 않다. 교사들에게서는 예의 뒷담화만 나오기 때문이다.

"공부를 안 하고, 그래서 성적도 형편 없는 너희들은 이제 됐다."

그렇게 시선을 거둔다. 관심을 꺼버린다. 이들이 도대체 공부를 안 하고 못 한다고 말했으면 더 시선을 주고 관심을 쏟아야 하는 게 순리 아닌가. 그런데도 많은 교사가 그 상식을 당연하다는 듯이 배반한다. 그 대신 그들의 시선과 관심은 온통 '고질 성적' 아이들, 일명 '선수들'에게 쏟아진다. 그 아이의 성적이 자신의 공적인 양 하면서 말이다. 참으로 부끄럽고 가증스러운 일이다.

뒷담화가 교사의 말법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뒷담화는 교사가 학생들과 맺는 관계가 불신에 기초함을 나타내는 증표다. 그것은 진정한 교육적 관계가 불가능함을 뜻한다. 교사의 말법이 뒷담화를 즐겨 따르면, 어른들보다 감각의 촉수가 예민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그 교사를 본받아 뒷담화를 하게 된다. 나중에는 교사는 물론이고 자신의 친한 벗이나 가족들에 대해서까지도 뒷담화를 한다. 그렇게 뒷담화는 교실과 학교와 사회에 상호 불신의 바이러스를 총체적으로 퍼뜨려 나간다.

군대식 일렬 횡대로 서서 교사의 훈계를 받고 있는 아이들. 강압적인 상황에서는 교사와 학생 사이에 차분한 감정 교류가 일어나지 않는다. 진짜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교사가 아이들을 대상으로 뒷담화를 하고, 아이들이 교사를 뒤따라 뒷담화를 하는 악순환이 일어난다.
 군대식 일렬 횡대로 서서 교사의 훈계를 받고 있는 아이들. 강압적인 상황에서는 교사와 학생 사이에 차분한 감정 교류가 일어나지 않는다. 진짜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교사가 아이들을 대상으로 뒷담화를 하고, 아이들이 교사를 뒤따라 뒷담화를 하는 악순환이 일어난다.
ⓒ 정은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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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교사는 뒷담화가 아니라 앞담화를 해야 한다. 어른이든 아이든 사람은 살다가다 보면 모두 실수를 하고 잘못을 범하기도 한다.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지간에 말이다. 우리는 모두 다른 이가 흉을 보거나 책 잡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럴 때 그 앞에서 그 실수와 잘못을 말해주고 따뜻한 조언과 위로의 말을 해 주어야 한다. 그래야 앞으로 똑같은 실수를 하거나 잘못을 저지를 가능성이 줄어든다.

교사가 아이를 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아이가 무언가를 실수했거나 잘못했다고 생각한다면 반드시 말해 주어야 한다. 물론 바로 그 자리에서 다른 아이들이나 교사들을 앞에 두고 아이를 타박하거나 나무라는 식이어서는 안 된다. 대신 쉬는 시간이나 점심 시간 등을 이용해 복도나 교무실에서 조용하고 차분하게 그 실수나 잘못을 말해주면 대다수 아이들이 수긍한다. 아이들이 엇나갈 때는 교사가 아이에게 감정을 실어 여러 사람 앞에서 책망할 때인 경우가 많다. 이는 교권 붕괴의 사례로 지적되는 많은 사건에서 금방 드러난다.

실제 예외가 많고, 논란도 있을 수 있겠지만, 학교에서 교사는 아이들에게 강력한 권력자다. 그런 권력자에게 뒷담화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것은 교사 스스로 자신의 권위를 깎아내리는 일이다. 아이들 앞에서 당당하고, 잘잘못을 냉정하게 이야기할 줄 아는 이라야 진정한 권위를 지닌 권력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교사는 역설적이지만 감정 노동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다만 교사의 감정 노동은, 감정의 피동적인 억압이 아니라 능동적인 유예라는 점, 그리고 그 목적이 아이와의 교감과 인간적인 소통을 위한 것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교사와 아이 사이의 그런 교감과 소통 끝에 진정한 인간적 유대와 신뢰감이 생겨나는 경우가 아주 많기 때문이다.

감정 노동이 결코 교사의 감정을 숨기거나 은폐하는 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는 피동적인 억압이다. 그렇게 되면 교사는 언젠가 아주 격렬하고 파국적인 감정 폭발의 순간에 다다르게 된다. 교사가 교실에서 아이에게 감정을 폭발시키면 그 순간 그는 검투사가 된다. 다만 이 검투사가 로마의 원형 경기장에 있던 검투사와 다른 점은 응원하는 관객이 한 명도 없다는 점이다. 아이들은 이 검투사 대신 또다른 검투사인 자신들의 친구를 응원한다. 이 상황에서 교사는 결단코 그 사태를 주도하지 못한다.

대신 교사 내면의 분노와 화를 당당하게 표출하되, 그 감정의 커다란 고비를 넘겨서 하자. 이는 절대 회피가 아니다. 능동적인 유예다. 그 순간은 강압적인 힘이 아니라 진정한 권위를 내세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 그렇게 격렬한 감정의 파고를 지난 후에 아이에게 교사도 화를 내고 분노하는 존재임을 말해 보라. 강철의 심장을 갖고 있지 않는 한, 대다수의 아이들은 조용히 눈물을 흘리며 교사에게 다가온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교사, #학생, #뒷담화, #앞담화, #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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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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