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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아내는 후쿠오카(福岡) 하카다(博多)역에서 출발해 나가사키(長崎)로 향하고 있었다. 나가사키는 일본에서 서양 문물이 가장 먼저 상륙했던 역사적인 항구도시다. 후쿠오카 근교의 한적한 농촌마을을 지나던 기차는 1시간여가 지나자 시원한 규슈 앞바다를 차창 밖으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비가 내리는 상황이 부담이지만 비가 흩뿌리는 규슈 서단의 바닷가 항구는 어두우면서도 아름다웠다.

기차 차창 밖으로 아름다운 규슈 앞바다가 보인다.
▲ 나가사키 가는 길 기차 차창 밖으로 아름다운 규슈 앞바다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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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가사키항에 도착하자마자 역의 인포메이션 센터를 찾았다. 다양한 나가사키의 여행지를 연결해 줄 노면전차의 자유이용권을 가장 먼저 산 후에 역 앞의 노면전차 타는 곳의 위치를 물었다. 나는 나가사키 역에서 구라바엔(グラバ-園·Glover garden)을 가기 위해서는 어디서 노면전차를 갈아타고 어느 역에서 내려야 하는지 확인했다. 관광지마다 예쁜 미니어처 그림이 그려진 나가사키 지도를 얻어 나가사키 시내로 나왔다.

갈 곳 많은 나가사키에서도 내가 아내와 함께 가장 먼저 향하기로 한 곳은 구라바엔이었다.'구라바'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영국인 무역상 '토머스 블레이크 글로버(Thomas Blake Glover)'의 일본식 발음에 따른 이름이다. 영어의 원음을 자음만 놔두고 모음은 모두 바꿔버리는 일본식 영어의 황당한 발음이 이제는 놀랍지도 않다.

나가사키의 다양한 관광지는 모두 노면전차를 타고 돌아볼 수 있다.
▲ 노면전차 나가사키의 다양한 관광지는 모두 노면전차를 타고 돌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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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아내는 나가사키에키마에(長崎駅前)역에서 노면전차 1호선을 탄 후 츠키마치(築町)역에서 5호선으로 환승했다. 우리는 역 안내소 안내원의 설명대로 오오우라 텐슈도우 시타(大浦天主堂下)역에서 내리지 않고 노면전차의 종점인 이시바시(石橋)역에서 내렸다. 오오우라 텐슈도우 시타 역에서 내리면 구라바엔 관람을 아래에서부터 올라가면서 해야 하지만 이시바시 역에서 내려 출발하면 구라바엔의 정상에서부터 내려오면서부터 편안하게 관람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라바엔으로 올라가는 경사형 엘리베이터,'글로버 스카이 로드(Glover Sky Road)'를 찾아가는 길에는 주택가의 한적함이 있고 작은 가게들을 둘러보는 재미가 있다. 길가에는 크지 않지만 친절하게 스카이 로드로 가는 방향을 안내하는 안내판이 곳곳에 있다. 동네 한 복판에 동네 뒷산을 오르는 엘리베이터가 있는 것도 신기하지만 무인 엘리베이터가 산의 경사를 비스듬하게 올라가는 모습도 독특하다.

산 위까지 주택들이 들어찬 모습이 마치 우리나라의 부산을 보는 것 같다.
▲ 나가사키 산 위까지 주택들이 들어찬 모습이 마치 우리나라의 부산을 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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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라바엔이 자리한 나가사키 서쪽 언덕 위에 오르자 나가사키 만과 앞바다, 그리고 나가사키 시내를 둘러싸고 있는 작은 산들이 한 눈에 들어왔다. 다른 일본 도시와는 다르게 산의 가장 높은 마루에도 집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집들은 언덕 위에 산재되어 있지만 상당히 정돈돼 있다. 아내는 높은 산 위에 들어선 집들과 산 아래 좁은 평지에 들어선 길들이 마치 우리나라 부산을 보는 것 같다고 했다. 산 위에 들어선 집들, 정말 나는 정겨운 부산 시내를 지금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다는 착각에 빠졌다.

우리는 구라바엔 입구에 도착해서 구라바엔 전체를 한번 조망해 보았다. 구라바엔에는 글로버의 저택을 중심으로 시내에 있던 서양 건축물들을 옮겨 마치 서양 테마 박물관같이 재건해뒀다. 그러나 구라바엔의 저택들은 일본 개화기 때에 서양인들이 직접 짓고 거주했던 실제 집들이라는 점에서 상당한 호기심을 유발한다. 구라바엔에는 나가사키 항을 통해 들어온 서양 문물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비오는 날 이곳에서 바라보는 나가사키 바다는 일품이다.
▲ 도크하우스 전망 비오는 날 이곳에서 바라보는 나가사키 바다는 일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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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라바엔 제일 위쪽을 통해 들어온 우리 눈앞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저택은 구 미쯔비시에서 지은 제2도크 하우스다. 외국선박 승무원의 숙소로 지어진 유럽식 건물인데 그 당시 나가사키에 거주한 유럽인들의 부와 권력이 느껴진다. 원래 나가사키항 근처에 있었던 도크하우스는 보존을 위해서 구라바엔의 가장 위쪽으로 옮겨졌다.

예쁘게 지어진 도크 하우스의 전면으로 들어서자 나가사키 항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정경이 눈 안으로 가득 들어온다. 정녕 감탄사가 절로 나올만한 전망이다. 누구에게 묻지 않아도 이곳에 왜 대저택이 자리 잡게 됐는지 한눈에 알 수 있다. 비가 흩뿌리는 날씨 속에 도크 하우스 2층에 서서 저택의 아래를 내려다봤다. 도크하우스 앞의 연못에 빗물이 젖어들고 나가사키 앞의 바다에도 빗물이 흩날리고 있었다.

외국 선박 승무원의 숙소로 지어진 곳이다.
▲ 도크하우스 외국 선박 승무원의 숙소로 지어진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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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크 하우스 앞 연못에는 어른 팔뚝보다 큰 잉어들이 가득 들어 있다. 온갖 색상의 이 잉어들은 연못 속에서 바쁜 일 없다는 듯이 유유히 헤엄치고 있다.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곳에 아늑한 연못이 바다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니 참으로 전망이 일품이다. 많은 여행객들은 이곳에서 도크하우스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거나 벤치에 앉아 여유를 만끽하고 있다. 굳이 나가사키 최고의 여행 포인트를 꼽으라고 하면 이 도크하우스 연못 앞에서 내려다보는 나가사키 항의 광활한 전경이다.

구라바엔에는 제2도크 하우스보다 더 오래 전에 지어진 건물들이 많다. 구라바엔에는 도크 하우스 뿐만 아니라 구라바 주택(グラバー住宅·Glover House), 링가 주택(リンガー住宅·Ringer House), 올토 주택(オルト住宅·Alt House) 등 무려 세 채의 옛 저택이 있고 워커주택, 자유주택 등 한껏 고풍스러운 유럽풍 건물들이 모여 있다. 개항 당시 서양인들이 모여 살던 지역에 자리한 구라바엔은 아홉 동의 서양식 건물들을 옮겨와 모아놓은 곳이다.

이곳 구라바엔에서만 먹을 수 있는 핫도그이다.
▲ 글로버 핫도그 이곳 구라바엔에서만 먹을 수 있는 핫도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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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 구라바엔에서만 먹을 수 있다는 글로버 핫도그를 먹으며 저택들을 찾아나섰다. 글로버 핫도그는 다른 데서 먹을 수 없다는 희소성은 있지만 맛은 많이 먹어본 맛이다. 언덕 하나를 내려가니 석재 외벽이 아름다운 목조건물, 링거 주택이다. 이 단층 건물은 일본에서 중요 문화재로 지정할 정도로 역사성이 인정받는 건축물이다. 영국인 프레드릭 링거(Frederick Ringer)는 나가사키의 글로버 상회에서 일본차를 가공한 홍차를 영국에 수출하다가 독립해 다양한 사업을 일으킨 무역상이다.

그리 크지 않은 방갈로 풍의 링거 주택은 첫눈에도 단아한 느낌을 준다. 링거 저택이 아름다운 것은 집의 외벽 뿐만 아니라 기둥이 석재로 장식돼 있기 때문이다. 이 석재는 저택이 있던 곳 정원의 바위를 쪼개서 만든 것이라고 하니 집을 짓기 위한 정성이 대단했을 것이다. 거부의 저택답게 다양한 용도와 형태의 응접실과 거실이 있고, 저택에 전시된 독일제 오르골과 축음기는 고풍스러움을 더하고 있다. 저택의 사방에는 발코니가 둘러싸고 있고 약 1m 간격으로 문이 자리 잡고 있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의 이 저택으로 바람이 부니 사방의 문을 통해 들어온 바람이 상쾌하기만 하다.

링거 주택은 주택 자체의 역사적 의미보다는 링거와 전혀 관계가 없는 오페라 <나비부인>으로 더 유명하다. 오페라 <나비부인>의 원작소설인 <나비부인>이 바로 이 나가사키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 그래서 나가사키에 자리한 링거 저택에 나비부인 오페라 공연에 사용되었다는 화려한 의상·소품·가발까지 전시하고 있다.

나가사키를 배경으로 하는 오페라 <나비부인>을 전시하고 있다.
▲ 나비부인 전시관 나가사키를 배경으로 하는 오페라 <나비부인>을 전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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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거 주택의 전시실에 발을 딛다 보니 나비부인이 부르는 대표적인 아리아인 <어떤 개인 날>이 흘러나오고 있다. 아리아를 듣고 있으면 게이샤 출신의 나비부인이 그녀의 남편인 미국 해군장교 핑커튼을 기다리는 모습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다. 이곳에 서면 본처를 데리고 나타난 남편 앞에서 단도로 목숨을 끊는 나비부인의 비장한 일본식 자결이 자꾸만 어른거린다. 유럽에서 도입된 뮤지컬이지만 주인공이 칼로 자결하는 마지막 장면을 보면 상당히 일본화된 뮤지컬이다. 

링거 주택 앞에는 <나비부인>을 연기한 일본 최초의 오페라 가수인 미우라 타마키(三浦環)의 기념상과 함께 오페라 작곡가인 지아코모 푸치니(Giacomo Puccini)의 상이 함께 세워져 있다. 유럽 무역상들의 저택을 모아놓은 저택 전시장 안에 <나비부인>이라는 나가사키의 스토리를 잘 포장해 놓은 것이다. 역사 오랜 스토리텔링을 소중히 여기고 잘 활용하는 일본인들의 특성이 이 구라바엔에서도 훌륭하게 발휘되고 있다.

크고 격조 있는 일본의 서양식 건축물이다.
▲ 올트 주택 크고 격조 있는 일본의 서양식 건축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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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거 주택에서 길을 따라 이동하자 구라바엔에서 가장 큰 규모의 석조 저택인 올트 주택이 나온다. 올트 주택은 링거 주택과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는 석조 형태의 주택이지만 주택의 규모도 크고 저택 앞에 잘 다듬어진 분수대도 있을 정도로 격조 있는 저택이다. 저택의 실내에서 강하게 느껴지는 것은 묘한 일본의 분위기다. 저택의 방마다 이곳 규슈에서 발달한 일본 자기들이 놓여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가사키 바다 앞에 자리한 저택의 앞마당에는 남국의 용설란이 싱싱하게 빛나고 있다. 

길을 굽이 돌아 작은 언덕을 하나 더 내려가자 '구라바엔'의 이름을 제공한 영국인 무역상 토마스 글로버(Thomas Glover)가 살던 주택이 나온다. 이곳의 이름이 '구라바엔'인 것은 나가사키의 다른 곳에 있다가 이곳에 옮겨진 다른 저택과 달리 '구라바(Glover)'가 살던 이 저택은 원래 이 자리에 지어져서 나가사키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글로버는 1859년, 21세의 젊은 나이에 대양을 건너는 긴 항해 끝에 일본의 개항항이었던 나가사키에 건너왔다. 그는 한 무역상회에 취직하여 경험을 쌓은 후 무역상으로 독립해 큰 부자가 된 인물이다.

글로버가 살던 당시의 식당과 음식들이 재현되어 있다.
▲ 글로버 주택 글로버가 살던 당시의 식당과 음식들이 재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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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버의 저택은 마치 네 잎 클로버와 같은 모습이다. 고풍스러운 방갈로 풍의 지붕은 과거 일본에서도 참 이국적이었을 것 같다. 이 저택은 1863년에 지어져서 일본 최고의 서양식 목조 건축물이라는 역사적 가치도 가지고 있다. 거부의 대저택 안은 그가 살던 당시의 모습 그대로 거실·응접실·침실이 재현돼 있고, 글로버가 사용하던 가구와 의상들은 상세한 설명과 함께 알기 쉽게 전시돼 있다.

글로버 저택 앞의 일본식 정원에는 쌀쌀해지는 날씨 속에서도 노란 국화꽃이 한 가득 피어 화사함이 가득하다. 조금씩 흩뿌리는 빗물을 보며 저택의 지붕이 가려주는 벤치 앞에 앉았다. 베란다 앞을 보니 나가사키의 바다를 향한 전망이 탁 트였는데 개인 주택의 전망이 이 정도면 더 이상 무엇이 부러울까 싶다.

날씨에 아랑곳 않는 노란 국화가 화사하다.
▲ 글로버 주택 날씨에 아랑곳 않는 노란 국화가 화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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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비 내리는 구라바엔의 서정을 만끽하며 나는 구라바엔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정말 볼만한 곳을 봤다는 만족감 속에서도 무언가 마음 속에 허전한 것이 남은 듯 했다. 그게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구라바엔의 어느 바닥에 박혀 있다는 하트 모양의 두 개의 돌이었다. 구라바엔의 바닥에서 찾으면 사랑이 이뤄지고 좋은 일이 생긴다고 하는 작은 하트 모양의 돌이 생각난 것이다. 작은 것에도 의미부여를 잘 하는 일본인들이 만든 스토리이기는 하지만 나는 그 하트를 보며 행운을 빌고 싶었다. 그런데 구라바엔을 벗어나 언덕길을 다 내려가고 나서야 '하트'가 생각났다.

결국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하트를 마음 속에 품을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나는 언젠가 구라바엔을 다시 찾을 것 같다. 나는 내 성격을 알기에 다시 구라바엔을 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 마음 속의'하트'를 찾으러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에만 송고합니다. 제 블로그인 http://blog.naver.com/prowriter에 지금까지의 추억이 담긴 세계 여행기 약 300편이 있습니다.



태그:#일본여행, #규슈, #나가사키, #구라바엔, #글로버 주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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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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