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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인생은 알기 힘들고 어렵기 마련이지만 지난 날 정말 힘들었던 한 때가 있었습니다. 서울에서 생활하던 1990년대의 10년 동안이 특히 그랬습니다. 지방 출신의 가난한 대학생으로 서울에서 학업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학비와 생활비, 책값 등을 저 스스로 챙겨가야 하는 시절이었습니다. 달동네의 한 뼘밖에 안 되는 사글세방을 전전하고, 하루 세 끼를 멀건 된장국으로 때울 때도 다반사였지요.

그러다가 정말 힘들 때 가끔 이런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우리 집은 왜 이렇게 가난한 거야. 아버지, 어머니께서는 왜 날 이 힘든 세상에 내보낸 거지' 하고 말이지요. 그 모든 삶의 선택은 내가 한 것인데도 말입니다. 그때 부모님께서는 오직 말없이 저를 지지해 주셨을 따름입니다.

그런데 실상 부모님께서는 제게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고3 시절, 두 분께서는 서울 소재 사립 대학에 지원하겠다는 제 말씀에 단 한 마디 말씀으로라도 반대하지 않으셨습니다. 대학 입학에 관한 한 '인 서울'이 별로 큰 매력이 없던 1980년대 후반이었음을 감안하더라도 두 분께는 정말 큰 결정이었습니다. 당시 집안의 경제적 상황이 절대적으로 여의치 않을 때였으니까요.

1985년 2월의 시린 겨울 아침을 기억합니다. 그날 따라 아버지께서는 별로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하지만 표정은 약간 들떠 있으셨습니다. 우리는 이른 아침밥을 챙겨 먹고 순천행 버스를 탔습니다. 궁금한 마음에 버스에서 무슨 일이냐며 여쭤봤지만 아버지께서는 딱히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아버지와 저는 순천 터미널에 도착했습니다. 코끝이 여전히 매서운 아주 이른 아침이었습니다. 하지만 햇살만은 눈부시게 빛나는 날이었죠. 아버지가 저를 이끌고 간 곳은 터미널 인근의 순천 아랫장이었습니다(순천에는 5일장이 두 번 서는데, 지리적으로 남쪽에 서는 장을 '아랫장', 북쪽에 서는 장을 '웃장(윗장)'으로 부릅니다). 저는 그때서야 눈치를 챘습니다.

'아, 자취방 살림살이를 챙겨 주시려고 하는 거구나.'

제 고향은 순천에서 아주 먼 산골 마을입니다. 그때 저는 순천에 있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입학하기로 결정되어 있었죠. 당시 고향 마을에서 순천까지는 족히 한 시간이 넘게 걸리는 거리였습니다. 버스를 타고 다니기에는 힘든 거리였습니다. 그래서 아랫동네 선배가 살던 자취방을 함께 쓰기로 하고 이야기가 돼 있었습니다. 시골에서 같은 교회에 다니던 선배는 책가방과 몸만 가지고 오면 된다고 했지만 어디 그럴 수야 있었겠는지요. 그래서 지레 아버지께서 자취 살림에 필요한 것들을 사 주시려나 보다고만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아버지께서 발걸음을 옮겨 들어간 곳은 가구집이었습니다. 순간 가슴이 두방망이질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땐 정말 '아, 드디어…' 하는 마음이 절로 일었죠. 아버지께서는 제가 어렸을 때부터 그토록 바라던 책상 일습을 챙겨 주시려던 것이었습니다. 정말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저는 책상이 그렇게 갖고 싶었습니다. 조금 잘 사는 친구네 집에 놀러갔다가 책상이라도 보고 온 날이면 어김없이 아버지를 졸라댔습니다. '대체 자식에게 방바닥에 엎드려 공부하라는 부모가 어디 있느냐. 하다못해 사과 궤짝 같은 것으로 앉은뱅이 책상이라도 만들어줘야 하는 거 아니냐'며 투정을 부리기 일쑤였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없는 살림에 책상이 뭐냐며 한사코 사주지 앉으셨습니다. 노는 것보다 공부를 더 좋아하고, 학교와 동네에서도 공부 잘 한다고 칭찬이 제법 자자한 자식에게 마음 먹고 책걸상 한 벌 못 사줬겠습니까. 하지만 그 시절 내내 우리 집은 그 책상 하나마저도 살 수 없는 어려운 형편이었음을 저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버지 마음이야 오죽했을런지요.

가구점 주인은 사람이 없어 배달을 못 한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아버지께서는 그런 법이 어딨냐며 언성을 높이셨습니다. 큰 맘 먹고 자식에게 해주는 선물인데 좀 멋지게 안겨주고 싶은 마음도 있으셨겠지요. 하지만 더 이상은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직접 들고 가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버지와 저는 걸상을 책상 위에 올려 끈으로 묶은 후 책상 앞뒤의 좌우 귀퉁이를 잡고 가구점을 나섰습니다. 햇살은 이른 아침보다 좀더 따사로웠습니다. 하지만 겨울 아침의 칼추위는 여전했습니다. 가구점을 나와 거리를 삼십여 분 걸어 자취방까지 가는 내내 마음이 먹먹했습니다.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습니다. 속으로 '아버지!' 하고 부르며 수없이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보답하며 살아가겠습니다. 그리고 착하게 살겠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는 게 좀 뭐합니다만, 제 아버지께서는 참 지혜로운 분 아닙니까. 그깟 책상 하나로 자식을 그렇게 완전하게 사로잡아 버렸으니 말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제가(자식들이) 간절히 원하는 것을 절대로 그냥 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실상은 '갑자기'가 아니겠지요) 그것을 들어주십니다. 마음속에 놀람과 감동이 아니 생길 리 없는 것이지요.

아버지께서는 늘 그랬던 것 같습니다. 당신은 결코 자식을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놀게만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이 어떤 것이 되었든지간에 꼭 일을 하게 했습니다. 쇠죽을 끓이거나 돼지 여물통을 채우거나 나무청(나뭇단을 보관해두는 곳)에 있는 나무들을 정리하는 일들을요. 그건 동네의 여느 집 부모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아버지께서는 특히 더욱 그러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열심히 하는 구석이 보이면 숨겨 두었던 엿이며 과자를 챙겨주시곤 했습니다. 저와 어린 동생이 거는 장난도 기꺼이 받아주셨죠. 무뚝뚝하기만 하던 당시 아버지들과는 분명 다르셨습니다. 제가 군대를 전역한 후에까지(동생은 몇 년 전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까지) 아버지 등에 달라붙어 잠을 자기도 했던 내력이 이런 데 있었을 겁니다.

대한민국의 많은 부모들이 자식들 앞에서 스스로를 부정하고 배신합니다. 다음과 같은 한 마디 말로요.

"얘들아, 너희는 우리처럼 살지 말거라."

소설에서, 영화에서, 드라마에서, 그리고 평범한 일상의 마디마디에서 우리는 이 말 한 마디를 수없이 만납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부모를 배반하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길이구나.'

그리하여 자식들은 자신들의 '가난하고 못난' 부모가 살았던 삶을 철저하게 부정합니다. 그 지긋지긋한 가난은 못난 부모 탓으로 귀결됩니다. 가난에 대한 인식의 어두운 대물림이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더 나아가 가난을 죄악으로 보는 경악스러운 일들이 자연스럽게 펼쳐집니다. 이 놀라운 일이 대한민국에서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여기저기서 일어납니다.

아버지께서는 평생 농군으로 사셨습니다. 그러면서도 당신이 자랑스러운 농부임을 결코 잊은 적이 없으셨습니다. 저는 열 살 전후부터 꼴지게를 지고 들로 산으로 아버지를 따라 다녔습니다. 아버지의 고집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이란 모름지기 일을 해야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그렇게 다닐 때마다 아버지께서는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일과 농부에 대한 당신의 자긍심을 제게 자랑스럽게 펼쳐 놓으셨습니다. 그렇다고 '나처럼 살아라'라는 말씀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연히 '나처럼 살지 말아라'라는 말씀도 한번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내 앞에 주어진 삶은 성실하게,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라는 철학을 온몸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 집은, 그리고 우리 부모님은 늘 가난에 쪼들렸습니다. 하지만 결코 그것에 굴복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들 스스로도 굴복하지 않았고, 자식들에게도 그 굴복을 대물림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한 닢 동전조차 귀히 여기셨지만 그것에 휘둘린 적은 결코 없었습니다. 돈 차제가 목적이 되어 자식들 앞에서 '돈이 귀하니라' 따위의 말씀은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얼마나 많은 부모들이 이런 말을 내뱉습니까. 돈이 최고이니 무조건(말 그대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들어가 좋은 직장 얻으라는 말을 낯 한번 붉히지 않고 자식들에게 말합니다. 10억을 벌 수 있다면 감옥에 가더라도 개의치 않겠다는 요새 아이들의 말이 어디 그들만의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겠습니까. 이 사회가, 그리고 그 부모들이 만들어낸 것이 아닐런지요.

그렇게 '공부해라, 좋은 대학 가라, 출세해서 돈 벌어라' 하고 말하는 이들이 다시 한번 자신들의 목울대를 울리면서 말합니다. '너희는 우리처럼 살지 말거라' 그리고 이제 이 말은 가난한 부모와 부자 부모를 가리지 않습니다. 그들 모두가 이 사회가 불안 사회라는 것을 동물적인 본능으로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절절하고 애끓는 속내를 어찌 모르겠습니까. 실상 대한민국의 부모들이 그렇게 스스로를 배반하는 것은 그들 탓이 아닙니다. 이 사회가, 만인을 향한 만인의 기약 없는 싸움을 부추기는 이 거대한 시스템이 더 큰 문제입니다. 이 사회와 시스템 속에서 살아가는 삶의 불안 때문입니다. 가난하건 부자건 그들은 자식에게만은 그 불안을 안겨주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부모들이 그렇게 말할수록 없어져야 하는 불안이 오히려 더 커지는 역설이 생겨납니다. '내 든든한 우군인 부모마저도 저런데, 대체 내까짓것이 이 사회와 시스템을 잘 견뎌나갈 수 있을까?' 그러다가 어느 순간, 부모와 자식들은 상대방을 예의 기약 없는 싸움의 대상으로 전락시킵니다. 부모들이 말합니다. '이제 너희들 필요 없으니 알아서들 잘 해 보거라.' 자식들도 지지 않습니다. '이제 당신들은 내 수단일 뿐이야.'

제 아버지께서는 재작년 여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 해 여름 가장 많은 비가 쏟아진 8월 9일이었습니다. 그 비만큼이나 눈물을 많이 쏟아냈습니다. 내게 살과 뼈를 준, 내 마음과 정신을 날카로운 바늘침 같은 가르침으로 단련해 준 당신이 그립습니다.

지난 어느 여름, 평화롭게 낮잠을 즐기고 있는 둘째와 막내 아이. 이 자식들 앞에 당당하고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로 살아가고 싶다.
 지난 어느 여름, 평화롭게 낮잠을 즐기고 있는 둘째와 막내 아이. 이 자식들 앞에 당당하고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로 살아가고 싶다.
ⓒ 정은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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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우리는 왜 사는 걸까요. 도대체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 걸까요. 돈이 있으면 있는 대로 불행하다고 하고, 돈이 없으면 또 그 없는 만큼 삶이 힘들다는 이 요지경 세상은 대체 어떤 곳인지요.

자식 앞에서, 그리고 세상 사람 앞에서 자신의 삶을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부모가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가난과 못남은 우리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니까요. 부모들이 당당하게 자신의 삶에 임했으면 좋겠습니다. 스스로를, 그리고 자식을 다른 이들과 견주지 않는 인생을 꾸려갔으면 좋겠습니다.

대신, 그렇게 각자의 삶에 충실하되, 서로 어깨를 겯고 살아가는 삶의 지혜를 자식들에게 알려줬으면 좋겠습니다. 진정으로 우아하게 빛나는 삶을 자식들에게 보여줬으면 좋겠습니다. 아직 어린 세 아이를 생각하면서, 나 자신부터 그렇게 살아가겠다고 다짐해보는 토요일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교육, #부모, #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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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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