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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겼다고 봐야지."

18대 대선 선거일이었던 지난해 12월 19일 오후, 문재인 캠프의 핵심 관계자는 잠시 표정 관리하는 법을 잊은 듯했다. 예상을 뛰어넘는 투표율 고공행진이 이어지고 있던 시점이었다. '너무 일찍 샴페인을 터뜨리는 것 아니냐'고 질문하자, 그는 그제서야 "끝까지 긴장을 놓지 않겠다"는 공식적인 답변을 했다. 민주통합당은 이미 잔칫집 분위기였다.

반면 같은 시각 새누리당은 초상집 분위기였다. 오후 3시 투표율이 59.3%에 달하자, 박근혜 캠프 조직총괄본부에서는 "위기상황입니다. 투표율이 심상치 않습니다"라며 지지층 투표 독려를 당부하는 문자메시지를 다시 발송했다. 이날 들어서만 두 번째였다. 김무성 총괄본부장은 이미 주요 당직자들에게 같은 내용의 문자메시지를 보낸 상태였다. 집권 여당이 높은 투표율을 비상 상황으로 규정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진 것이다.

18대 대선을 지배한 '투표율 결정론'의 오류

16대, 17대, 18대 대선에서의 연령대별 투표율 변동. 방송 3사 출구조사 결과 50대의 투표율이 90%에 근접한 놀라운 수치를 보였다. 이는 변동이 적었던 40대의 투표율 증가와도 확연히 비교되는데 훨씬 큰 증가 폭이었다. 투표참여 운동을 독려하면 20~30대만 투표율이 올라갈 것이라는 잠정적 가정은 무너졌다.
 16대, 17대, 18대 대선에서의 연령대별 투표율 변동. 방송 3사 출구조사 결과 50대의 투표율이 90%에 근접한 놀라운 수치를 보였다. 이는 변동이 적었던 40대의 투표율 증가와도 확연히 비교되는데 훨씬 큰 증가 폭이었다. 투표참여 운동을 독려하면 20~30대만 투표율이 올라갈 것이라는 잠정적 가정은 무너졌다.
ⓒ 새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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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누리당과 민주당의 극과 극 표정은 근거 없는 '투표율 결정론' 탓이었다. '투표율이 높으면 야당에 유리하고, 투표율이 낮으면 여당이 유리하다'는 근거 없는 속설이 18대 대선판을 떠돌았다. 크고 작은 선거 때마다 투표율이 몇 퍼센트 이상이면 누구에게 유리하다는 '투표율 공식'이 전문가들의 견해라는 권위를 둘러쓰고 회자됐지만 사실 절대적 법칙이라고 할 만큼의 과학적 근거는 없었다.

지난해 4·11 총선에서는 투표율 55%가 야당 승리의 기준점으로 제시됐다. 하지만 전국 투표율은 54.2%에 머물렀음에도 비례대표 정당별 득표수는 야권(민주당+통합진보당)이 16만 표 정도 많았다. 또 2010년 7·28 재보궐 선거에서는 투표율 35%가 야당의 승리 기준으로 회자됐다. 실제 은평을 지역 투표율은 재보선 치고는 상대적으로 높은 40.5%를 기록했지만 당시 한나라당의 이재오 후보가 압승했다.

이처럼 역대 선거의 경험을 보면 투표율은 선거의 구도나 성격, 주목도, 선거 캠페인의 양상에 영향을 받는 종속 변수였을 뿐, 선거의 승패를 바꾸는 독립변수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이준한 교수(인천대 정치학)가 미국 버클리대에서 펴내는 아시아 지역 정치 관련 저명 학술지인 <아시안 서베이>(Asian Survey)에 발표한 논문 '한국 선거에서 투표율이 정당(득표율)에 미치는 영향'(Partisan Effects of Voter Turnout in Korean Elections)에 따르면, 1992년 이후 치른 10번의 주요 선거 중에 투표율을 100%로 가정할 경우 선거결과가 바뀌는 경우는 1997년과 2002년 대선 뿐이었다. 야권이 간발의 차이로 이긴 선거에서만 승패가 바뀐 것으로 나타나는 등 높은 투표율은 오히려 야권에 불리한 결과로 이어질 것으로 전망됐다.

이준한 교수는 "투표하거나 기권하는 요인에는 연령을  포함한 인종, 소득 등 사회경제적 지위 등이 다양하게 개입하기 때문에 투표율이 높아져도 선거 결과가 진보 성향의 특정 정당에 일괄적으로 유리한 것은 아니다"라며 "외국에서도 투표율의 변화가 선거 결과의 변화로 이어진다는 연구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는 연구도 상당하다"고 설명했다.

여는 투표율 낮추기, 야는 투표율 높이기 '올인'

투표율의 영향이 제한적이라는 지적에도 여야는 투표율의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선거에서 가장 중요한 지지율 높이기 경쟁보다는 투표율에 더 목을 매는 듯한 상황이 벌어졌다.

새누리당은 투표율 낮추기가 감춰둔 선거 전략이었다. 대선 투표율이 낮았으면 좋겠다는 속내도 거침없이 밝혔다. 박근혜 캠프 총괄본부장이었던 김무성 전 의원은 대선을 3일 앞둔 지난해 12월 16일, 기자들과 만나 "우리 전략은 중간층이 이쪽도 저쪽도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듣지 못하겠다면서 투표 자체를 포기하는 것"이라고 말해 논란을 일으켰다. 그는 대선 투표율이 70%를 넘지 못할 것이라는 기대 섞인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새누리당 일각에선 투표율 낮추기에 목을 매다보니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범죄행위를 벌인 '전과'도 가지고 있다. 한나라당 시절이던 2011년 10월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앞두고는 투표율을 낮출 목적으로 선거관리위원회 홈페이지에 대한 디도스(분산서비스 거부) 공격을 감행해 당을 스스로 위기로 몰아넣었다.

투표율을 중심으로 사고한 민주당의 전략적 오류는 더 심각했다. 투표율 높이기는 선거 전체를 관통한 전략이었다. 민주당의 투표율 높이기는 두 가지 방향에서 추진됐다. 선거 초반에는 투표시간 연장에 주력했다.

투표시간 연장은 국민 참정권 확대를 꾀한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측면이 있지만 대선을 코앞에 두고 제기된 탓에 정략적 차원의 접근이라는 반발을 샀다. 투표율 상승에 두려움을 가진 새누리당의 반대로 실현 가능성은 없는데, 선거 초반 중요한 전략적 자산의 낭비를 불렀다는 평가다. 또 선거 이슈가 과도하게 투표 시간 연장에 쏠리는 부작용도 초래했다.

이준한 교수는 "투표시간을 연장하면 어느 정도 투표율이 증가하긴 하겠지만 큰 효과는 없다는 연구결과가 이미 나와 있었다"며 "민주당은 가장 중요한 선거전을 펼쳐야할 때 투표시간 연장 운동에 너무나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오히려 부재자 투표를 적극 활용해 달라고 캠페인을 하는 게 투표율을 올리는 데 더 효과적이었을 텐데 민주당은 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투표율 높이기로는 못 이긴다"는 경고음 '무시'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후보가 지난해 12월 18일 오후 서울 강남역 M스테이지의 '싸이 말춤' 조형물 앞에서 투표참여를 호소하고 있다.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후보가 지난해 12월 18일 오후 서울 강남역 M스테이지의 '싸이 말춤' 조형물 앞에서 투표참여를 호소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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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심각한 문제는 잘못된 투표율 신화가 선거 중반 이후 돌이킬 수 없는 전략적 오류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문재인 캠프는 선거의 승패를 가를 핵심 변수인 세대별 지지율 높이기  보다 문 후보의 지지도가 높은 2030세대의 투표율 높이기에 주력하기 시작했다. 문 후보는 선거일을 18일 앞둔 12월 1일 처음으로 "투표율이 77% 넘으면 말춤을 추겠다"는 투표 독려 캠페인을 시작한 이래, 선거 열흘을 앞둔 시점에는 매일 같은 메시지를 비중 있게 반복했다.

그나마 이 같은 이벤트형 선거 독려 캠페인은 역대 선거에서 투표율을 올리는데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4·11 총선만 해도 안철수 전 후보가 투표율이 70%가 넘으면 '미니스커트를 입고 춤을 추겠다'고 하는 등 많은 유명 인사들이 비슷한 공약을 내걸었지만 투표율은 54.2%에 그쳤다. 20~30대 투표율도 50%를 넘지 못했다.

당시 전문가들은 이 같은 민주당의 '투표율 올인' 전략에 대해 50대 이상 세대의 인구 비중 증가 등을 근거로 "세대별 지지율이 바뀌지 않으면  투표율 상승만으로 한계가 있을 것", "만약 문 후보가 진다면 투표율이 아니라 50대 전략의 실패가 결정적 패인이 될 것"(정한울 동아시아연구원 여론분석센터 부소장)라는 경고음을 울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문 후보는 지지율에서 절대적 열세를 보이던 50대 이상 세대에 대해서는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못했다. 물론 문재인 캠프도 50대의 민주당 이반 현상에 대해 위기감을 느끼긴 했다. 문 후보는 12월 11일 방송연설을 50대에 대한 메시지로 채웠다. 이날 연설 제목은 "내 친구, 50대 가장들을 위하여"였다. 문 후보는 정년연장, 반값 등록금, 의료비 100만원 상한제 등 정책을 내놓고 50대 잡기에 나섰다. 하지만 끈기 있는 노력은 없었다. 선대위 산하에 꾸렸던 '50대 위원회'도 지지부진했다.

문재인 후보의 시민캠프에 참여했던 한 핵심 인사는 "안철수 후보와의 매끄럽지 못했던 단일화, 그 이후 안 후보의 지원에 목매느라 제대로 된 민생 정책 대결을 벌일 절대적 시간이 부족했다"며 "선거 중반을 지나면서 50대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지 않느냐'는 분위기가 팽배했다"고 말했다.

문재인 캠프의 한 핵심 인사는 "2002년 대선과 2010년 지방선거를 보면 행정수도 이전이나 무상급식 등 선거판을 흔들만한 대형 이슈를 만들어냈을 때 야권이 이겼다"며 "이번 대선에서도 50대를 공략할 대형 이슈를 선거 초기, 선거판이 싸움판이 되기 전에 힘 있게 밀어붙였어야 했는데 때를 놓쳤고 노력도 부족했다, 뒤늦게 한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고 말했다.

"투표율 프레임 매몰, 2030 주력 전략이 패착"

민주통합당 박지원 원내대표가 지난해 12월 19일 오후 서울 영등포 당사에 마련된 개표상황실에서 방송사 출구조사 결과를 지켜보다 얼굴을 감싸쥐고 있다.
 민주통합당 박지원 원내대표가 지난해 12월 19일 오후 서울 영등포 당사에 마련된 개표상황실에서 방송사 출구조사 결과를 지켜보다 얼굴을 감싸쥐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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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선거의 승패는 50대의 선택에서 갈렸다. 방송 3사 출구조사 결과대로라면 문 후보는 90% 가까운 투표율을 기록한 50대에서 지지율이 37.4%에 그쳤다. 표로 따지면 박근혜 후보에게 250만 표 뒤진 참패였다. 2012년 50대는 10년 전 2002년 대선에서 이회창(47.9%), 노무현(48.1%) 후보에게 거의 같은 지지율을 보인 세대였다는 점에서 민주당의 신뢰 상실과 전략 실패가 가져온 패배라는 지적이 나온다. 

이준한 교수는 "투표율 높이기로 선거에서 이길 수 있다고 분석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며 "투표율이 올라가면 승리할 수 있다는 프레임에 너무 매몰돼 2030세대에 주력하는 선거 전략을 짠 게 민주당의 패착"이라고 말했다.

김윤태 교수(고려대 사회학)도 "2030세대의 투표율을 중시하는 세대 프레임은 5060세대의 안보적 보수주의를 촉진하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만들었다"며 "진보진영이 계급배반 투표의 덫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경제, 복지 등 구체적 민생 이슈를 강조하는 전략을 제시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태그:#대선평가, #문재인, #민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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