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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 고향땅을 떠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무렇지 않게 해왔던 '일상'이 어느 순간 '과업'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맥도널드에서 햄버거를 주문하거나 마트에서 물건을 사는 것조차 쉽지 않은 일이 돼버린다. 많은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 내 언어와 문화가 달라져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각자의 이유를 대며 미지의 세계로 떠난다. 그것을 그들은 '꿈'이라 부른다.

2010년 9월 처음 호주에 갔을 때 그랬다. 필리핀과 태국,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시아를 여행하고 온 터라 더했다. 소위 '왕'처럼 지내다 갑자기 길 잃은 '미아'가 돼버린 심정이었다. 단지 '여행자'에서 '노동자'로 신분이 바뀌었을 뿐인데 제대로 해내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특히 처음 정착한 곳이 보수적인 호주 남부의 작은 동네다 보니 동양에서 온 '피부색 다른' 청년이 적응하기란 쉽지 않았다.

한국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일들이 시작됐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뒷골목 식당에서 접시를 닦았고, 호텔 화장실에서 청소를 했다. 불과 보름 전까지만 해도 필리핀 해변에서 칵테일 마시며 마사지를 받았는데 모든 것이 꿈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불편함은 시간이 지나면 해결되는 법이다. 사람 사는 곳은 결국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자 낯선 호주 또한 일상이 되어버렸다. 잔고가 쌓이자 마음의 여유가 생겼고 친구들을 사귀게 되자 '괜찮은 동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을 떠난 이유

집 앞만 나가면 캥거루들이 있었는데 떠났습니다.
▲ 이런 호주에서 집 앞만 나가면 캥거루들이 있었는데 떠났습니다.
ⓒ 김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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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해가 넘어 4월이 되었다. 호주는 한국과 계절이 반대인 관계로 초가을 바람이 가득한 날이었다. 친구의 생일 파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불과 열시도 안 된 시간이었다. 물론 거리엔 인적이 없었다. 저녁 여섯시만 되면 죄다 문을 닫는 것이 호주인의 일상인지라 밤거리는 조용했다.

한적한 도로를 따라 걸었다. 그런데 멀찍이 요란 법석한 음악 소리와 함께 차 한 대가 달려왔다. 덕분에 내 걸음 역시 함께 빨라졌다. 하지만 걸음이 차보다 빠를 수는 없는 법. 어느 순간 바로 옆에 따라와 있었다. 그렇게 시작됐다.

창문이 열리고 "FucX'이라 외치는 욕지거리가 들려왔다. 무시하고 뛰었지만 갑자기 공만 한 것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고개를 돌려보니 바닥엔 이미 흥건히 계란 노른자가 터져있었다. 무서웠다. 젖 먹던 힘을 다해 뛰었다. 하지만 이내 따라온 녀석들, 눈앞엔 파란 눈의 금발 청년들이 서있었다.

난생 처음으로 계란으로 맞아봤다. 아팠다. 딱지가 가라앉아도 마음의 상처가 계속 된다는 말, 그 때 처음 느꼈다. 아무 것도 못하고 며칠을 방에만 있었다. 갑자기 익숙한 것이 그리워졌다. 그리고는 결심을 하나 하게 됐다.

'이제 됐다. 집으로 가자.'

다시 돌아온 한국, 2년 넘게 밖에 있었는데도 적응은 필요 없었다. 모든 것이 이미 숙달된 상태였다.

더 무서운 대한민국

한국에 돌아온 후, 안산에서 일을 하게 됐다. 그런데 안산, 대한민국에서 외국인 노동자가 가장 많은 곳이다. 거리를 걷다보면 피부색 짙은 외국인을 쉽게 만나게 된다. 그 날도 그랬다. 회식을 마치고 밤 열한시가 다 되어 지하철을 탔다. 그리고 몇 정거장 지나지 않아 놀라운 광경을 접하게 됐다. 이주노동자 몇 명이 전동차에 올라타자마자 걸쭉한 욕지거리가 문 밖에서 들려왔다. 그 곳엔 술 취한 20대 청년 셋이 있었다.

"뭘 꼴아봐. 깜둥이 새끼들아. 꺼지라고. 니네 나라로"

욕 한마디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내뱉지 못했다. 그곳엔 1년 전 나에게 계란을 던지며 욕하던 파란 눈의 백인과 똑같은 모습을 한 청년들이 서있었다. 문이 닫히기까지 십여 초가 한 없이 길게만 느껴졌다. 전동차가 완전히 출발하고 나서야 상기된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왜 그런 거예요?"
"모르겠어요. 화나요. 지나가는데 욕했어요. 쳐다봤다고 때리면서 욕 했어요."

'다름'부터 인정하자

하나 둘 '인정'할 때, 한 명 두 명 변화를 시작한다
▲ '다름'부터 하나 둘 '인정'할 때, 한 명 두 명 변화를 시작한다
ⓒ 김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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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노동자 백만 시대다. 다문화 가정만 따져도 30만 호가 넘는다. 언제까지 우리사회는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이들을 무시하고 외면할 것인가. 얼마 전 조카가 다니는 유치원에 까무잡잡한 다문화 가정 아이 한 명이 새로 왔다고 한다. 당연히 한국 엄마들 사이에선 난리가 났다.

그런데 진짜 놀랐던 것은 피부색이 다른 그 아이가 웬만한 애들보다 한국말을 잘했다는 사실이다. 엄마들 입장에선 당연히 한국말 한마디도 못하는 '동남아 아이'일거라 생각했는데, 아이는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만큼 우리말이 이미 모국어가 되어있었다. 엄마들의 편견이 '검은 피부'만 주목했던 거다.

하지만 그간 관심을 갖지 않았을 뿐, 우리 곁엔 이미 많은 이주노동자와 다문화 가정이 함께 살고 있다. 더욱 중요한 건 그들의 아이 역시 함께 자라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한국으로 돌아올 때 호주 친구에게 거짓말을 하나 했다.

"한국은 말이야, 호주보다 특별한 게 하나 있어."
"뭔데?"
"차별이 없다는 거."

물론 '희망사항'을 말한 거다. 언젠가 호주 친구가 한국에 오게 됐을 때, 현실이 되지 말란 법이 없으니까. 한 명 두 명 '다름'부터 인정하면 자연스레 '차별'은 없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니 주변의 가까운 '다름'부터 인정하자. 이주노동자, 다문화가정 분명한건 우리 모두 꿈을 찾아가는 사람들이다.


태그:#이주노동자, #다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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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팀 취재기자. 오늘도 애국하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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