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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제주도의 백미는 뭐니뭐니 해도 역시 설경과 눈꽃이다. 육지 사람들은 제주도에 와야만 눈덮인 겨울산을 볼 수 있는거 마냥 한라산을 겨울 제주여행지 일순위로 놓고 제주를 찾는다. 윗새오름으로 백록담으로 사라오름으로.

한라산 꼭대기가 아니더라도 제주에서는 멋진 설경과 눈꽃을 볼 수 있는 곳이 많다. 사려니 숲길이 그렇고 적당히 중산간에 있는 오름이나 숲길은 겨울내내 눈으로 덮여있다. 

한라산 둘레길은 해발 600~800미터 정도의 한라산 허리께를 빙 돌아 탐방할 수 있는 코스인데 지금은 1,2코스만 만들어져 있다. 중문에서 제주로 이어지는 1100도로(1139도로)의 아래쪽 서귀포 자연휴양림을 중심으로 오른쪽은 1코스, 왼쪽은 2코스 이다. 무오법정사를 찾아가면 거기가 둘레길 1코스 출발점이다.

포근하고 화창한 1월 어느날 한라산 둘레길을 찾았다. 기온이 거의 15도에 육박한다. 겨울철 제주도는 하루에도 두 개의 계절을 체험할 수 있는 곳인데 고도가 낮은 아래쪽은 봄날이고 해발 300미터만 넘어가면 새하얀 겨울이다.

그런데 한라산 자락 처럼 대중교통편이 좋지 않은 곳에는 차를 가져가는 것이 편한데 둘레길처럼 시작점과 종점이 멀리 떨어진 경우는 어떡해야할까. 가장 손쉬운 방법은 일행과 함께 차를 두 대 가져가서 한 대는 시작점에 한 대는 종점에 세워두면 된다. 이 곳 둘레길 1코스는 시작과 종점 거리가 10km 정도이므로 운전부담도 없다.

무오법정사 앞 한라산 둘레길 입구
 무오법정사 앞 한라산 둘레길 입구
ⓒ 임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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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형과 함께 그렇게 양쪽에 차를 두고 둘레길 1코스를 걷기 시작한다. 시작은 무오법정사로부터 시작된 숲길이다. 기온은 따뜻한데 땅에는 눈이 가득하다. 녹색이파리가 드문드문 붙어있는 앙상한 가지로 된 숲길이다. 조금씩 올라갈 수록 눈이 많아진다.

한라산 둘레길 초반 숲길
 한라산 둘레길 초반 숲길
ⓒ 임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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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 둘레길의 설경
 한라산 둘레길의 설경
ⓒ 임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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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유난히 파랗고 주변이 너무 조용하다. 그저 나와 일행 두 명의 눈밟는 소리만이 사그락거린다. 눈 밭 사이로 가끔 냇물이 졸졸 흐르고 있다. 눈이 내린 지 1주일 이상 지나서인지 나무에는 눈이 전혀 없고 땅에만 있는데 가끔 만나는 괴이하게 얼어붙은 고드름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특이한 고드름
 특이한 고드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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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숲속길을 가다보니 지나치게 조용하다.

"형! 우리 길을 잘못 든 게 아닐까? 너무 조용해. 그리고 무슨 시멘트로 된 수로 밖에 없어."
"아냐 길에 가마니 깔려 있잖아."
"그거 가마니 아냐. 야자열매 껍질이야."
"그래?"
"응. 친환경 소재라고 거 외 오름 탐방로에 이거 많이 깔려 있잖아."

눈을 밟은 발자국을 따라 우리는 무심히 걷는다. 녹색 잎사귀와는 어울리지 않은 새하얀 눈만이 시야를 가득 메우고 있다. 호젓한 숲 길에 그저 가느다란 시멘트 수로만이 이정표인양 한 줄로 그어져 있다. 백설의 왕국 같은 숲을 한시간 가량 걸으니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 벤치가 덩그렇게 놓여있다. 어디에도 둘레길 표시가 없다.

엉덩이 붙일 곳을 발견한 기념으로 우리는 막걸리 한 병을 꺼내 놓고 잠시 쉬어 간다. 꿀맛 같은 막걸리 한 잔으로 목을 축이고 다시 일어 섰지만 과객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딴청 피우고 있는 눈 덮인 숲의 비협조적인 표정이 불안감을 증폭시킨다.

"이 길 맞어 이거?"
"형 말대로 가마니가 계속 있잖아. 여러 명이 지나간 발자국도 있고..."

내심 불안하긴 하지만 한라산 둘레길 입구라는 표지판과 거기서부터 줄곧 깔려있는 야자수가마니를 굳게 믿어야 한다고 되뇌이며 눈에 찍힌 등산화 자국을 따라간다. 가느다란 수로는 아마도 오래전 식수가 없을 때 계곡물을 받아 쓰던 길인가보다. 눈 덮인 숲속에 한 줄 수로만이 방향을 안내해 주고 있다고 믿는다.

지대가 조금씩 높아지면서 그와 비례해 눈이 시나브로 깊어진다. 등산화 밑창 높이에서 부서지던 눈은 어느새 발목까지 푹푹 빠진다.걷기가 점점 힘들어진다. 눈에 찍힌 발자국 수가 점점 줄어드는 것 같다. 눈이 깊어서 앞사람 자국만 밟고 가서 그런걸까.

길을 잃었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점점 현실화되는 기분이다. 잊어먹고 있었는데 야자수가마니도 어느새 없어져 버렸다. 거의 두시간을 걸어왔는데. 다행인 점은 기온이 높고 바람이 없어 전혀 춥지가 않다는 점이다. 춥기는 커녕 목덜미에 땀이 스멀거려 넥워머와 털모자는 베낭에 넣어버리고 방한점퍼도 벗어야할 판이다.

둘레길에서 길을 잃고 하원수로길로.
 둘레길에서 길을 잃고 하원수로길로.
ⓒ 임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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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올 것이 왔다. 눈에 찍힌 발자욱이 단 한개만 남아있다. 우리는 길을 잃은게 분명했다. 아래에서 본 안내판을 떠올려보니 이 길은 둘레길이 아니고 '하원수로길'이다. 여하튼 길은 길이다. 다만 조금 이상한 길이다. 쥐어짜낸 기억에 의하면 제원수로길은 윗새오름으로 가는 영실탐방로와 연결되어 있다.

동행한 형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멍하게 서 있다. 멘붕상태이긴 나도 마찬가지지만 우리는 결정을 해야한다.

"형. 길 잘 못 든 건 할 수 없고 영실까지 올라가자. 지금와서 돌아갈 수도 없잖아."
"영실 나오는 건 확실해?"
"아마... 확실할거야. 분명히 연결되어 있었어. 이 발자국 봐. 혼잔데 올라간 자국만 있고 돌아 내려온 자국은 없잖아. 이 사람도 그렇게 갔을거야."
"혼자 아무대나 올라가서 텐트치고 야영하고 있는거 아냐?"
"이런대서 무슨 야영을 해...하하"

우리는 외로운 발자국을 겹쳐 밟고 간다. 눈은 이제 종아리까지 빠진다. 홀로 찍힌 발자국을 따라 가고 있으려니 무슨 야생의 추적자가 된 기분이다. 수로 양쪽 중 어디를 밟을까 고민했던 것도 알 수 있고 중간에 볼일 본 흔적까지 찾을 수 있다. 이 와중에서도 재미난 추적이었다.

그렇게 30분을 불안에 떨며 올라가니 폐차된 트럭이 보인다. 더 이상 어떤 증거물이 필요하랴. 도로라는 뜻이다. 내 기억과 판단이 옳았으며 영실탐방로와 만난 것이다. 거짓말 처럼 등반객들이 삼삼오오 내려 오고 있다. 우리는 눈에 흠뻑 젖은 등산화를 쳐다보며 한숨 돌린다.

영실과 이어진 곳
 영실과 이어진 곳
ⓒ 임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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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부터 차를 세워 놓은 둘레길 출발점으로 가는 것도 문제다. 안내판을 보니 디귿자 형태로 돌아서 가야 한다. 516도로와 만나는 지점까지 다시 한시간을 걷고 516도로에서는 엄지손가락을 거꾸로 세워 지나 가는 차를 얻어타고 무오법화사 입구에서 다시 걷고 하여 머나먼 길을 돌아왔다. 늦은 오후, 기울어 가는 태양빛은 곱기만 하다.

무오법정사 들어가는 초입
 무오법정사 들어가는 초입
ⓒ 임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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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시간 반 이상을 걸었지만 정작 한라산 둘레길 1코스는 걷질 못했다. 살짝 억울한 기분만 들었지 아쉬운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제주에 살고 있으니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올 수 있는 곳이다. 아마도 녹음이 흐드러진 봄에 다시 와야 할 거 같다. 실은 아쉬할 것도 없다. 정해진 코스대로 가지 않으면 어떠랴 내가 가는 이 길이 제주의 비경이고 속살인 것을.

제주에서는 이렇게 오름이나 숲길을 걷다보면 왕왕 길을 자주 잃는다. 하지만 전혀 걱정할 필요 없다. 숲은 또 다른 길로 이어지고 길은 또다른 숲이 되니 말이다.


태그:#한라산둘레길, #무오법정사, #하원수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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