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의 첫 토요일(5일). '제67회 전국 남녀 피겨스케이팅 종합선수권대회'(1/4~1/6)'가 열리는 '목동아이스링크'에는 4000여 명의 구름떼 관중이 몰렸다. 예년에는 찾아볼 수 없는 이례적 광경, 김연아의 '국내 컴피티션(시합)' 출전으로 말미암은 진풍경이었다. 6년 만에 국내 대회에 출전한 피겨 퀸의 도전, 그로인해 빛났던 은반 위 경쟁, 이틀간의 현장을 '스토리텔링 기사'로 담았다. - 기자말

김연아의 반전 드라마 <뱀파이어의 키스>

 피겨퀸 김연아의 <뱀파이어의 키스>가 시작됐다.

피겨퀸 김연아의 <뱀파이어의 키스>가 시작됐다. ⓒ 곽진성


5일, 제67회 전국 남녀 피겨스케이팅 종합선수권대회에 출전한 김연아(23·대한민국 국가대표) 선수는 쇼트 프로그램 연기를 앞두고 있었다. 4000여 피겨 팬들의 시선이 집중된 은반. 연기를 앞둔 김연아 선수는 다소 긴장되어 보였다. 링크 안으로 들어선 23살 스케이터는 조심스럽게 연습을 시작했다. 그런데 고조된 분위기 속, 기어코 일이 터졌다. 강한 울림이 장내에 가득 울려 퍼졌다.

"쾅.....!"

ⓒ 곽진성

김연아 선수가 점프 연습 도중 그만, 넘어지고 만 것이다. 속도가 줄지않고 그대로 펜스에 부딪친 위험천만한 장면이었다. 강한 충격파가 온 몸에 전해진 듯, 선수는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피겨 그랜드 슬램을 달성한 피겨 챔피언. '강심장'이라는 별명에 걸 맞는 커리어를 쌓았던 '김연아'지만, 오랜만의 국내대회 출전이 적잖게 부담으로 다가오는 듯 보였다.

'괜찮을까?'. 관중들은 걱정 어린 눈빛으로 선수를 주시했다. 다행히 선수는 훌훌 털고 일어났다. 숨을 한번 크게 내쉬고 옷과 다리에 묻은 얼음 결정을 툭툭 털어냈다. 그녀가 다시 스케이팅을 시작하고 나서야, 관중석 팬들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켜보는 취재자 입장에서는 여전히 염려가 됐다. 웜업 때 겪은 충격이, 잠시 후 있을 시합에서 심리적으로 영향을 미칠 것 같았다. 출전까지 남은 시간은 불과 20여 분, 갑작스런 충격파를 잊기에는 턱 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쇼트프로그램 연기를 위해 입장하는 김연아. 긴장되어 보였다.

쇼트프로그램 연기를 위해 입장하는 김연아. 긴장되어 보였다. ⓒ 곽진성


설상가상(雪上加霜). 김연아 선수가 '불편함'을 느낄만한 일들은 연이어 발생했다. 쇼트 프로그램 연기를 위해 은반으로 걸어 들어갈 때 그녀는 크게 휘청거렸다. 난간에 발이 걸렸던 것이다. 장내의 광경도 부담이었다. 군데군데서 들려오는 몹시 가열된 고성(高聲)과, 번쩍번쩍 카메라 플래시는 선수에게 몹시 신경이 쓰일 법한 일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쇼트프로그램 <뱀파이어의 키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김연아 선수는 연기를 이어나갔다. 그런데 앞선 불운의 영향 탓일까. 연기의 초반부에 또 한번 예상치 못한 불운이 발생했다. 활주 도중, 양발 스케이트 날이 부딪쳐,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뒤에서 누가 잡아당긴 것처럼, 두다리가 공중에 뜬 채로 넘어져 보기 아찔했다.

방송 해설가들의 입에서 '아'라는 탄식이 이어졌고, 지켜보던 취재진들 역시 깜짝 놀랐다. 선수 본인도 몹시 당황한 표정이었다. 김연아 선수는 재빠르게 일어나 스케이팅 했지만 충격의 여파는 첫 점프까지 영향을 미쳤다.

활주에서 속도를 내지 못해 첫 점프(트리플 러츠(3Lz)-트리플 토룹(3T))을 성공시키지 못했다. 결국 단 트리플 러츠 1회전을 하는데 그치고 말았다. 이상하게 운이 없는 하루였다. 최악의 출발이라고 할 만했다.

 김연아가 쇼트 프로그램에서 선보인 반전드라마.

김연아가 쇼트 프로그램에서 선보인 반전드라마. ⓒ 곽진성


 피겨여왕 김연아 선수의 연기

피겨여왕 김연아 선수의 연기 ⓒ 곽진성


컴피티션을 하다보면 '불운'이란 불청객이 갑작스레 찾아올 때가 있다. 빛나는 순간에 갑작스레 찾아온 불운은, 미리 세워놓은 멋진 계획을 엄망진창으로 만들어 놓는다. 많은 이들이 주목한 무대에서의 흔들림. 이럴때면 아무리 강심장이고, 뛰어난 챔피언이라도 심리적으로 무너지기 십상이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울고 싶고, 아예 포기하고 싶어지기도 한다. 겁도 덜컥 나버린다. 자연히 김연아 선수의 다음 스케이팅이 염려됐다. 긴장과 활주 실수 후, 밀려올 타박상 통증으로 다음 점프를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걱정이 들었다. 2번째 점프가 만만찮은 트리플 플립 점프라는 사실은 걱정의 농도를 진하게 했다.

하지만 김연아 선수는. 이런 상황에 아랑곳 없이 링크장을 크게 돌며 경쾌한 스텝에 이어 트리플 플립 점프를 뛰기 위해 다시 한번 도약했다. 그런데 그녀의 점프는 현장에 모인 많은 이들의 예상을 깨는 도전이었다.

원래 쇼트 프로그램 2번째 점프는 트리플 플립(3F) 단독 점프였다. 그런데 김연아 선수는 여기에 트리플 토룹(3T)를 연결해 시도하는 모험을 건 것이다. 첫 번째 점프의 실수에 주눅들지 않고, 오히려 즉흥적으로 두 번째 점프 난이도를 높였다. 세계 상위권 피겨 랭커들도 감히 시도할 수 없는, 김연아만의 높은 클래스를 향한 도전이었다.

 피겨여왕 김연아의 열연

피겨여왕 김연아의 열연 ⓒ 곽진성


 김연아의 환상적인 기술, '유나카멜스핀'

김연아의 환상적인 기술, '유나카멜스핀' ⓒ 곽진성


힘찬 도약, 엄청난 높이와 비거리에 탄성이 터져 나왔다. 도전은 완벽한 자세의 도약과 착지를 이뤘다. 장내에서는 놀라움 가득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완벽에 가까운 성공이었다.

김연아는 이날 2번째 점프의 성공으로 반전의 시작을 알렸다. 초반부 흔들렸던 쇼트프로그램 연기는, 3F+3T 콤비네이션 점프 이후 반전되어 명품으로 완성되어 갔다. 김연아 선수가 독창적으로 만든 '유나(연아)카멜스핀'은 이날 프로그램의 백미였다.

더블 악셀까지 깔끔하게 성공한 김연아는 <뱀파이어의 키스>에서 느껴지는 차갑고, 음울한 분위기를 잘 연출하며 프로그램을 끝마쳤다. 기승전결이 뚜렷한 한편의 클래식 영화를 본 듯한 느낌이었다.

 연기를 마친 뒤, 만족스러워하는 김연아

연기를 마친 뒤, 만족스러워하는 김연아 ⓒ 곽진성


 연기를 마친 후, 홀가분한 표정의 김연아

연기를 마친 후, 홀가분한 표정의 김연아 ⓒ 곽진성


스포츠란 무대. 나아가 꿈을 향한 컴피티션에서 드라마틱한 반전이 일어날 때가 있다. 불가능 할 것 같고, 해낼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에서 이뤄내는 멋진 반전은 지켜보는 이들을 감동시킨다. 그 원동력은 두려움의 순간 더욱 용기를 내는 것. 마음 속으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앞으로 나서는 일이다. 언제나 그런 담대함 속에 반전은 시작된다.

오랫동안 갈고 닦은 비장의 무기로 세상을 놀래킨 김연아의 연기. 아낌없는 박수가 터져 나왔다. 스포츠를 통해 삶의 교훈을 얻고, 피겨를 통해 배움을 얻은 참 멋진 순간이었다.

"중독될 정도로..." 김연아가 전한 레미제라블

 김연아 선수의 프리스케이팅 '레미제라블'

김연아 선수의 프리스케이팅 '레미제라블' ⓒ 곽진성


2013년의 첫 일요일(6일)은 개인적으로 무척 바쁜 하루였다. 오전에 한 공영방송사 입사 시험을 봐야 했고, 오후에는 5일에 이어 '피겨 종합선수권' 취재를 가야했다. 꿈을 향한 청춘이란 이렇듯, 바쁜 일들의 연속. 그런데 하루의 시작부터 그만 일이 꼬였다.

전날 새벽까지 기사를 쓰다 깜빡 잠이 든 것이다. 일어나보니 시험 시작까지 채 1시간 30분도 남지 않았다. 시험장(청담역 인근 K고)까지 헐레벌떡 달렸지만, 입구를 지킨 안내자의 한마디가 청춘을 더욱 조급하게 만든다.

"여러분 뛰셔야 합니다. 이제부터 오르막 길입니다. 안 뛰시면 (시험에) 늦습니다."

인생이란 오르막길을 향해 있는 힘껏 내달리는 청춘들. 문득 불안한 내일을 향해 총총 뛰는 우리내 모습이 '시험 토끼' 같아 웃음이 나왔다. 응시생만 3천여 명. 꿈을 향한 컴피티션은 꽤나 치열했고 막막했다. 이 중에서 누가 포디움에 설까.

이날 본, 시험 문제에는 '레미제라블(장발장)'에 관한 문제도 나왔다. 처음에는 레미제라블문제쯤이야 식은죽 먹기라고 생각했다. 기사를 쓰기 위해, 전에 공부한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아는 내용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지문을 읽는 순간 얼굴이 굳어졌다. 문항에 몰랐던 내용이 있었다. 특히 소설 레미제라블(빅토르 위고 지음)이 1918년 우보 민태원에 의해 '애사'란 이름으로 국내에 소개됐다는 것이 그랬다. 문제의 맞고 틀림을 떠나서, 그동안 내가 얼마나 '수박 겉핡기식' 으로 자료조사를 했는지 반성하는 시간이었다.

시험을 보고 나오는 마음이 착잡했다. 스포츠 경기로 치면 자신이 열심히 준비한 기술도 제대로 시도하지 못한채, 예선 탈락한 모양새였다. 그런 착찹한 마음을 안고 오후 취재를 위해 목동 아이스링크로 향했다.

 김연아 선수 레미제라블의 시작.

김연아 선수 레미제라블의 시작. ⓒ 곽진성


그날(6일) 오후 목동 아이스링크의 열기는 뜨거웠다. 6년 만에 국내 대회에 출전한 김연아 선수는 프리스케이팅 '레미제라블' 연기를 앞둔 상황이었다. 자연히 궁금증이 생겼다. 피겨 여왕의 '레미제라블'은 완벽한 준비를 끝마쳤을까? 그리고 대회에서 멋진 연기를 통해 감동을 전할 수 있을까?

두근두근. 잠시 후, 웅장한 음악 속, 김연아 선수의 연기가 시작됐다. 그녀는 첫 점프 트리플러츠-트리플 토 콤비네이션(3Lz-3T)을 멋지게 성공시켰다. 그리고 이후, 이어진 6번의 점프들을 멋지게 성공시켰다. 명불허전.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환상적인 스케이팅이었다.

고난이도의 점프를 실 수 없이 성공시키자 선수의 표정도 한층 밝아졌다. 확신에 찬 표정으로 연기의 피날레를 향해 스케이팅했다. '레미제라블'의 장대한 서사를 4분 10여초에 응축해 놓은 것 같은 멋진 연기. 끝맺음 동작에서 뜨거운 기립 박수가 쏟아졌다.

김연아의 레미제라블. 그 속에 담긴 '사랑의 위대함'에 대한 퍼포먼스. 그녀의 연기는 같은 이름의 소설처럼, 영화처럼, 뮤지컬처럼 깊이 있는 울림을 전해줬다. 올 시즌 세계 여자 피겨의 세계 기록(비공인)인 210.77점에 어울리는 명연기였다.

ⓒ 곽진성

피겨 여자 싱글 경기가 끝난 후, 김연아 선수는 장내에 마려된 프레스 센터에서 기자회견를 가졌다. 그녀는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했던 것일까? 궁금함에 "(김연아 선수는)는 연기를 위해 혹 레미제라블 영화나 뮤지컬을 본 적 있나요?"라고 질문을 했다. 선수가 답했다.

"영화 '레미제라블' 을 두 번이나 관람했어요. 감동적으로 봤습니다. 질리지 않는 작품이었어요. 레미제라블 뮤지컬 DVD도 중독될 정도로 수없이 봤습니다. 덕분에 음악 이해도가 더 높아졌던 것 같아요. 그런 작품의 곡으로 연기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중독될 정도로 '레미제라블'을 봤다는 말이 기억에 남았다. 어떤 한 분야의 포디움에 선다는 것은, 나아가 세계 최고가 된다는 것은 끊임없는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이날, '레미제라블'을 중독될 정도 봤다는 피겨 챔피언의 말은 과장이 아니게 들렸다. 지금것 해왔던 수 천, 수 만번 해왔던 점프 연습처럼. 완벽한 연기를 위해 숱하게 관련 소설을, 뮤지컬을 연구했을 것이다. 그런 치열함이 김연아 선수를 세계 최고의 선수로 만든 비결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6일, 김연아의 완벽한 연기는 새삼 내게도 자극이 됐다. 돌이켜보니 무엇인가에 '중독될' 정도로 열심히 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치열해져야 한다는 것. 젊은 청춘, 목표로 하는 '꿈의 컴피티션'을 성공하기 위해서는 진짜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배운 시간이었다. 꿈 많은 청춘의 도전, 불운을 딛는 '비장의 무기'와 중독될 만큼의 '치열함'을 갖고 전진한다면 분명 빛나는 결과가 있지 않을까. 피겨퀸 김연아의 멋진 도전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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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아 피겨 스케이팅 스토리텔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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