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가 당선되자, 외국의 매스컴은 일제히 18년 장기 집권한 고 박정희 대통령의 딸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고 보도했다. 뉴욕타임즈는 "독재자의 딸 대통령 선거 승리(Daughter of dictator wins South Korea presidency)"라는 제하에 "박 전 대통령이 경제 발전과 정치적 억압이라는 유물을 동시에 남겨 한국의 여론이 엇갈리고 있다"고 보도했다.

 영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포스터

영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포스터 ⓒ SK 텔레콤(주)

AP통신은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에 선출됐지만, 독재자 아버지의 그림자가 승리를 덮고 있다(Park Geun-Hye Elected South Korea, But Dictator Father Looms Over Win)"라는 제하로, 워싱턴포스트는 "권위적인 아버지를 둔 박근혜 후보가 경기 둔화와 사회적 문제에 대한 우려가 커진 가운데 대통령에 당선되었다"고 전했다.

영국의 가디언과 BBC 역시 "18년 동안 철권통치를 펼친 독재자의 딸이 한국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선거에서 경쟁자를 제쳤다"고 박근혜 당선인의 아버지에 대하여 언급했다. 외국 언론들이 들고 나오는 '독재자 고 박정희 대통령의 딸'이라는 말, 난 뒤늦게 본 이준익 감독의 <구르물 버서난 달처럼>이란 영화에서 '달'이란 단어가 자꾸 '딸'이란 단어로 읽혀 그 애길 해보련다.

딸은 아버지의 구름을 벗어날까

영미 언론이 가차 없이 꼬집고 있는 '독재자의 딸'이란 그늘, 과연 박근혜 당선인은 벗어날 수 있을까? 박근혜 당선인은 벌써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했다고 볼 수 있다. 여론에 밀리는 듯한 인상을 주긴 했지만, 후보 시절 지지율이 하락하자 급하게 지난 해 9월 아버지의 통치에 대한 사과까지 했다. "그런 점에서 5·16, 유신, 인혁당 사건 등은 헌법 가치가 훼손되고 대한민국의 정치발전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생각합니다."

박 당선인의 과거 사과를 두고도 갑론을박이 있었다. 사과라느니 사과가 아니라 구구한 변명이라느니, 어쨌든 박 당선인 본인은 사과라는 절차를 밟은 게 분명하다. 그 의미를 국민이 수용하든 안든 상관없이 독재자 아버지라는 구름을 벗어나려고 시도했다는 말이다. '구름을 벗어 난 달', 영화가 말하는 내용과 정반대의 경우이긴 하지만, '구름을 벗어난 딸'이 될 수 있을까.

영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을 보면서 '5·16 군사정변'과 '12·12 군사반란'이 저절로 머릿속에 떠오른다. 둘 다 성공한 군사정변(혹은 반란)이다. 전두환 통치를 얘기할 필요는 없다. 박 당선인 얘길 하는 거니까. 군사정변을 미화하려는 이들이 우리 국민 중에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들을 등에 없고 박 당선인이 고 박정희 대통령의 독재통치를 은근슬쩍 미화한다면, 그 구름은 더 먹구름이 될 게 뻔하다.

명분이 있는 움직임?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의 소재는 '이몽학의 난'이다. 1596년 선조 29년에 왜군이 침략하여 정국이 혼란할 때 조정은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왜군이 들어오느니 안 들어오느니 탁상공론만 하고 있었다. 영화의 대화는 이렇다.

왕이 묻는다. "지금 전쟁이 난다는 거야?" 동인이 대답한다. "안 납니다. 전하!" 서인이 말한다. "난다니까" 동인 중 한 사람이 같은 편에게 묻는다. "정말 왜놈들 안 오는 거야?" "와", "그런데, 왜 안 온다고 하는 거요?" 그리고 그 이후 대답이 가관이다. "저 놈들 당론이 온다고 하는 건데. 우린 안 온다고 해야지"

 이몽학(차승원 분)은 꿈을 위하여, 야망을 위하여, 분연히 일어나 궁궐을 향해 질주한다.

이몽학(차승원 분)은 꿈을 위하여, 야망을 위하여, 분연히 일어나 궁궐을 향해 질주한다. ⓒ SK 텔레콤(주)


정국이 이런 때 속모관(粟募官) 한현의 선봉장인 이몽학이 동갑계 회원 700명을 거느리고 왕좌를 노리고 한양으로 진군하면서 '이몽학의 난'은 일어났다. 충청도 홍산에서 일어난 농민군은 임천을 함락시키면서 세를 불려 '왜적의 재침을 막고 나라를 바로잡겠다'는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킨다. 영화는 '명분'을 '꿈'이란 단어로 둔갑시킨다.

박정희 장군의 군사정변도 나름 이유가 있었다. 혼란한 정국과 부패한 정부, 무능한 정권, 사리분별 못하고 정쟁과 사리사욕에 얽혀 있는 정치인들, 뭐 이런 게 그런 정변을 일으키는 빌미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나름대로 정변의 이유가 되는지는 몰라도, 이런 빌미들이 전혀 정변을 정당화하지 못한다는 것은 정설이 되고 말았다 이몽학의 난이나 박정희의 정변이나 다를 게 없어 보인다. 성공했느냐 실패했느냐가 다를 뿐.

꿈이 문제다

영화에서 정여립, 황정학(황정민 분), 이몽학(차승원 분)은 평등 세상을 꿈꾸며 '대동계'를 만들어 관군을 대신해 왜군과 싸운다. 얼마나 멋진가? 그런데 한 사람 이몽학이 변한다. 영화의 언어로 하면 구름을 벗어난다. 그것은 순전히 자신의 꿈 때문이다. 왕좌에 앉지 않고는 평등세상을 만들 수도, 왜군을 물리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는 결국 왕좌를 차지하기로 마음먹는다.

안 따르는 자는 그 자리에서 목을 벤다. 반대하는 친구 황정학과도 결별한다. 물론 오랜 연인인 백지(한지혜 분)도 버린다. 꿈을 위하여, 야망을 위하여, 분연히 일어나 궁궐을 향해 질주한다. 세도가 한신균 일가를 몰살시키면서 파죽지세로 세를 불리고 무장을 하고 야망을 위하여 거침없이 전진한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한신균의 서자 견자(백성현 분)는 이몽학의 친구였지만 꿈이 달라 헤어진 황정학과 한 팀이 되어 이몽학을 추격한다. 그러다 기생인 이몽학의 연인 백지를 만나게 되는데, 그녀의 말이 견자의 마음을 찢는다. 견자는 이몽학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면서 던진 말, "넌 꿈이 없잖아!" 꿈 없는 사람은 꿈 있는 사람을 당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럴 듯하다.

왜구의 침입과 지독한 파벌 싸움으로 국운이 기울어가던 16세기 조선의 왕좌를 노리는 게 꿈이라? 뭐, 꿈이라면 꿈이다. 그런데 그 꿈이 없어 이몽학을 이기지 못 할 거라는 거다. 그 말에 영화를 보는 내가 다 화가 났다. 그 개인의 꿈 때문에 벌어진 오욕의 역사가 질펀한 대한민국 땅에서 국민으로 살고 있기에.

결국 견자는 왕이 버리고 떠난 텅 빈 궁궐에서 이몽학과 맞닥뜨리고 둘이는 칼싸움에 돌입한다. 일단 그 장면이 시원하다. 잘난 꿈쟁이와 그런 꿈이 없는 이가 대결한 것이니까. 누가 이기고 지고는 그리 문제될 게 없다. 누가 먼저 죽고 나중 죽느냐의 차이만 있을 터이니까. 굳이 편을 들라면 당연 왕 될 꿈이 없는 견자 편이다. 그리고 '구름을 벗어난 달'인 이몽학은 견자의 칼에 죽는다. 견자 역시 왜구의 조총에 맞아 죽는다.

'구르믈'과 '구름을'의 차이

 견자는 왕이 버리고 떠난 텅 빈 궁궐에서 이몽학과 맞닥뜨리고 둘이는 칼싸움에 돌입한다. 일단 그 장면이 시원하다.

견자는 왕이 버리고 떠난 텅 빈 궁궐에서 이몽학과 맞닥뜨리고 둘이는 칼싸움에 돌입한다. 일단 그 장면이 시원하다. ⓒ SK 텔레콤(주)


이건 분명히 영화에서나 있을 법한 엔딩장면이다. 현실은 많이 다르다. 우리 역사는 분명히 달랐다고 쓰고 있다. 영화는 '구르믈' 벗어나면 안 되는 거였다. 이몽학이 순수한 동기를 잃으면 안 되는 거였다는 말이다. '구르믈'은 좋은 의미다. 나라를 위해 대동계를 결성하고 왜구와 싸워내는 그 '구르믈' 벗어나면 안 되는 달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몽학은 그 '구르믈' 벗어난 '달'이 되고자 했다. 결국 아무런 달도 되지 못하고 말았다.

박근혜 당선인은 고 박정희 대통령이라는 '구름을' 벗어나야 한다. '독재자의 딸'이라는 '구름을 벗어난 딸' 말이다. 영화에서 '달'은 벗어나서 탈이지만, 현실에서 '딸'은 벗어났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인수위원회의 수석부대변인 윤창중 같은 이의 입을 단속해야 하리라. 물론 입단속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매스컴의 보도를 접하긴 하지만. 그런 입단속 말고 고 박정희 대통령의 독재를 미화하는 그런 이들 단속 말이다.

윤창중 수석부대변인이 대선 직후인 지난 달 21일자 칼럼 '대통령 박근혜를 말한다'에서 박근혜 당선인을 "국민에게 '박정희+육영수의 합성사진'을 연상키시고도 남을 만큼 대쪽 같은 원칙과 책임의 정치, 그러면서도 차고 넘치지 않는 정치를 펼칠 것"이라고 말했다. 정변을 일으키고 독재를 했던 고 박정희 대통령이 원칙과 책임의 정치를 한 대쪽 같은 애국자로 읽히는 건 나만 그런가?

박근혜 당선인은 알고서든, 모르고서든, 구름을 떠나지 못한 모습이 보이면 안 된다. 영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을 강력 추천한다. 구름을 벗어나라는 의미가 무언지 배우면 좋겠다. 그래서 외신들의 우려를 잠재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덧붙이는 글 * 감독 이준익/ 황정민, 차승원 주연/ (주)아침, (주)타이거 픽쳐스 제작/ SK 텔레콤(주) 배급/ 상영시간 111분/ 2010. 4. 28. 개봉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영화 박근혜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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