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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일러를 틀지 않아 추운 알베르게에 유일하게 따뜻함을 제공하는 화로 주위. 이곳에 둘러 앉아 오순도순 이야기꽃을 피운다.
 보일러를 틀지 않아 추운 알베르게에 유일하게 따뜻함을 제공하는 화로 주위. 이곳에 둘러 앉아 오순도순 이야기꽃을 피운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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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밤, 문군은 조용히 응접실로 나온다. 지금쯤이면 여독으로 침대에 파묻혀야 할 텐데 쉬이 잠을 이루지 못한다. 피곤함이 지나쳐 수면을 방해하고 있다. 넷북에 간단히 일기를 작성하고 가만히 앉아 테이블에 놓여진 순례자들의 흔적을 뒤적거린다. 알베르게 방명록은 언제나 감정선을 감질나게 터치한다. 각자가 가는 길에 의미를 부여하고 또 자신을 돌아본다. 혼자 걷는 이, 여럿이 걷는 이, 만남과 헤어짐, 다시 재회하는 이것들이 하나하나 소중한 추억으로 남겨져 있다.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공감으로 텅 빈 공간을 채우고 있을 때 한 구절이 눈에 들어온다. '오늘도 나는 맨발순례를 했다'. 맨발순례라니. 순간 섬광 같은 예지가 스친다. 이거다! 남의 비밀을 몰래 훔쳐보기라도 하는 듯 문군의 맥박이 펌프질하기 시작한다. 일단 숨을 죽인다. 그리고 그 날의 순례일기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진정어린 순례자의 고뇌와 반성이 한 줄 한 줄 차분하게 고백되어 있다.

'그래, 맨발로 간다. 육체의 고난이 죄를 사하진 못하지만 참회하는 기분으로 걸어보자.'

맨발순례 중인 존. 발바닥이 언 지 오래다.
 맨발순례 중인 존. 발바닥이 언 지 오래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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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그는 순례자 한 명을 이 야심찬 계획에 끌어들인다. 존이다. 자신은 뭐든지 탱크처럼 해결하는 강한 남자라며 허세를 부리지만 알고 보면 소심하고 여린 성정이란 걸 이미 파악하고 있던 터다. 둘은 맨발로 카미노를 만끽하자며 의기투합한다. 지켜보던 산티는 난감한 표정이다. 헬리오스는 격려한다. 그들만의 상상 속에서 겨울 카미노의 로맨틱하고도 위대한 도전이 시작된다.

양말을 벗고 첫 발을 내딛었을 때 그 느낌이란 것이 참으로 오묘하게 찌릿하다. 응달진 곳의 보도블럭 바닥은 마치 얼음장 같고, 발등을 뒤덮는 한기만으로도 몸서리치기에 충분하다. 시작부터 고비다. 발바닥은 벌써 굳어가고 있다. '1월의 길이란 게 뭐 다 그렇다'고 서로 다독인다.

"30분 있다 햇살이 비치면 금방 괜찮아질 거예요." 30분이 흘렀다. 여전히 차갑다. "더 얼어 죽겠는데요?" "아직 땅이 데워지지 않아서 그래요. 조금만 기다려 보자고요." 또 30분이 흘렀다. "저기… 화상 입는 건 아니겠죠?"

굳어버린 발바닥이 제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다. 굼벵이처럼 오므리니 자꾸 휘청거린다. 행여 유리조각이나 날카로운 물질에 찔릴까 바닥도 조심스레 훑는다. 신음이 새어 나온 건 오래 전 이야기. 지나가던 할머니가 멈춰 서서 보더니 손을 내저으며 경악한다. 

"이봐요, 지금 몹시 추워요! 빨리 신발 신으세요."

걱정해주는 고마움이 보인다. 둘은 안심부터 시킨다.

"괜찮아요, 할머니. 우리는 순례자라 일부러 이렇게 다니는 거예요."

온 몸과 정신으로 자연을 껴안는다는 산티. 그의 걸음은 가장 늦지만 순례 후엔 가장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온 몸과 정신으로 자연을 껴안는다는 산티. 그의 걸음은 가장 늦지만 순례 후엔 가장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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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은 뚝심 있게 밀고 나간다. 거창한 목표에 체면이 덧씌워진 상황이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삼키는 와중에 먼저 포기를 얘기하기는 서로가 데면데면한 상황이다. 그즈음 온 몸과 정신으로 자연을 껴안는다는 산티가 천천히 뒤따라 와 컨디션을 묻는다. 둘은 동시에 '오케이' 사인을 보낸다.

하지만 곧 뜻하지 않은 고비를 만난다. 자갈길이다. 작은 돌들이 빼곡하게 쌓인 길, 몽실몽실 둥글면 좋으련만 이제 막 깨놓은 것처럼 뾰족하기 그지없다. 지압도 이런 지압이 없다. 한여름 햇빛에 달궈진 지열이라면 차라리 목도리 도마뱀처럼이라도 갈 수 있다. 그런데 이건 아니다. 서너 걸음 떼려 해도 독한 정신력으로 이를 악물어야 한다. 대관절 이 길을 어떻게 맨발로 갔단 말인가? 둘은 도탄에 빠진다. 그때 슬며시 운을 떼는 문군.

"춥고, 아픈데, 남은 여정을 생각해서라도 신발 신는 게 좋지 않을까요? 다른 순례자들은 이미 중간 지점에 가 있을 것 같아요. 많이 뒤처지는군요. 게다가 앞으로 계속 오르막인데."

그러면서 마지막 자존심 한 가닥은 놓지 않는다.

"그래도 그대가 끝까지 걸어가겠다면 나도 함께 완주하겠어요."

먼저 제안한 건 그인데 말이다. 존은 잠시 고민한 척 하더니 못내 아쉽다는 제스처를 거하게 한 번 취하고는 신발을 신자고 대답한다. 신세계란 이런 것일까? 겨울 도보 여행의 신기원은 등산화가 이뤄낸 거라며 호들갑이다. 시속 3km로 걷던 둘은 이제 시속 6km의 폭풍질주를 시작한다. 발엔 어느새 봄이 찾아왔다.

차가운 겨울 계곡의 정취를 맛볼 수 있는 파뇨테 다리(Puente de Pañote)를 건넌다. 이라고(Irago) 산맥이 가까워 오면서 고도 역시 높아지고 바람은 점점 거세진다. 빈들 풍경에서 이제는 서서히 나무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카미노에서 가장 복잡하지 않은 길을 걸은 하루, 알베르게 문제로 오늘은 라바날에서 멈춘다. 몸도 마음도 고달팠던 맨발 순례는 그렇게 실패로 끝났다.

실패로 끝난 맨발 순례, 새삼 깨달은 '발의 노고'

자갈길에 이라고 산맥까지 넘어야 하는데 등산화를 신고 나서부터는 걷는 것이 그렇게 행복할 수 없었다.
 자갈길에 이라고 산맥까지 넘어야 하는데 등산화를 신고 나서부터는 걷는 것이 그렇게 행복할 수 없었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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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돗가가 있긴 하지만 씻는 용도로만 사용되고 마실 수는 없는 물이다. 몇몇 수돗가는 최근 순례자가 급증하면서 고장이 나 쓰지 못하게 되었다.
 수돗가가 있긴 하지만 씻는 용도로만 사용되고 마실 수는 없는 물이다. 몇몇 수돗가는 최근 순례자가 급증하면서 고장이 나 쓰지 못하게 되었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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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한 번쯤 생각해 볼 것이 생겼다. 문군은 그간 찬밥 신세였던 발의 노고에 대해 생각해 본다. 고생해서 걸어가 주면 종국엔 고린내 난다고 얼마나 타박했던가. 속옷 갈아입는 건 민감하면서 양말은 왜 이삼일씩 무덤덤하게 신는가. 손톱은 예쁘게 깎고 다듬으면서 발톱은 왜 때가 차도록 내버려 두는가. 누워있으면 움직이기 싫다고 왜 손대신 발을 이용해 일을 처리하는가. 알고 보면 도보계의 '송지만(뛰어난 활약을 하면서도 전혀 주목을 받지 못하는 야구 선수)'이다. 그는 이제부터라도 발의 노고에 대한 재평가가 시급하다는 생각에 정성스레 구석구석 비누칠을 하고, 주물럭주물럭 마사지를 해본다.

불길이 살아 춤추는 화로에 앉아 저녁을 기다린다. 헬리오스의 처남이 격려차 방문해 부분 동행 한단다. 새로 카미노에 합류한 그가 신고식 겸 슈퍼에서 음식을 구입해 온다. 콜라와 와인을 곁들여 순대 맛과 흡사한 모르시야와 소고기, 계란 볶음밥, 파스타 등으로 성대한 상차림을 연출한다.

헬리오스는 항상 챙겨주는 스타일이다. 눈만 마주쳐도 필요한 게 없는지 물을 정도다. 점심도 그가 해준 파스타로 맛있게 먹었다.
 헬리오스는 항상 챙겨주는 스타일이다. 눈만 마주쳐도 필요한 게 없는지 물을 정도다. 점심도 그가 해준 파스타로 맛있게 먹었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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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yo!" 카미노의 힙합맨. 표지판의 낙서는 안 될 일이지만 위트 하나는 정말 끝내준다.
 "A-yo!" 카미노의 힙합맨. 표지판의 낙서는 안 될 일이지만 위트 하나는 정말 끝내준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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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비(Havi)라고 해. 그러니까 헬리오스 아내가 내 누이야. 맨발로 걸어왔단 얘기를 들었어. 그 용맹함 대단해. 너에게 내 사촌여동생을 소개시켜 주고픈데, 스무 살에 어여쁜 프로테스탄트 아가씨야. 어때?"
"정말? 당신 말대로 미모를 보장할 수 있어? 소개시켜준다는 말이 진심이야?"
"이봐,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나? 순례 끝나고 우리 집에 놀러와. 재워주고 먹여주고 동생도 소개시켜 줄 테니까. 그리고 당장 페이스북 친구부터 맺자고!"
"아, 고마운데 사양할게. 물론 페이스북 친구는 맺자고, 헤헤."
"싱겁긴. 암튼 앞으로 재밌게 걸어보자고, 친구."

초면에 문군에게 던지는 멘트가 범상찮다. 정말 넉살좋은 친구다. 페이스북 친구를 맺었더니 과연 헛소리할 친구가 아님을 인정하게 된다. 헬스장을 운영하며 다듬어진 우람한 근육에 반한 수많은 여성들이 그와 다정한 포즈를 취한다. 에너지가 넘치는 그와의 순례가 문군은 기대가 된다.

같이 맨발 순례한 존 역시 하비가 요리한 음식에 오늘의 고단함을 잊은 듯하다. 둘은 그 이후 같이 있는 공간에선 맨발의 '맨'자도 꺼내지 않는다. 맨발 순례로 자신을 돌아본 건 오늘로도 충분하단 얘기가 마지막 나눔이었다. 그리고 남성미가 물씬 풍기는 하비에게 기선제압을 한 유일한 말 역시 이것이었다.

"하비, 우리 같이 한번 맨발로 걸어보지 않을래?"

근육질의 하비가 정색하는 표정을 문군은 만천하에 꼭 공개하고 싶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에는 2012년 1월 31일의 기록이 담겨 있습니다.



태그:#산티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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