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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의 역사에 대해 쓴 책은 많다. 그러나 그것은 대개 우리나라 최초의 주거 유적과 온돌유적은 어디이며, 지금은 터만 남은 황룡사의 실제 규모는 어떠했으며, 부석사와 수덕사로 대표되는 목조건축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주로 이야기한다. 다시 말해 건축의 역사를 건축기술의 발달과 미학적인 측면에서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은 건축의 형태를 결정짓는 또 다른 중요한 원인, 즉 그 시대의 지배담론과 그것에 따르거나 혹은 반하는 개인의 욕망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사람을 닮은 집, 세상을 담은 집> 305쪽)

겉그림.
▲ <사람을 닮은 집, 세상을 담은 집> 겉그림.
ⓒ 서해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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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기억이 별로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초등학교 때부터는 줄곧 아파트에서 살았고 지금도 그렇다. 첫 아파트는 13평이었고 지금은 그 세 배쯤 된다. 늘려 이사 갈 수는 있어도 줄여 이사 가기는 어렵다는 것을 느끼는데, 13평이던 집에 비하면 수없이 감사해야 할 지금 집도 주변에 그보다 더 크거나 더 좋은 시설을 갖춘 아파트와 비교해 보면 유별나게 감사할 이유를 찾기가 어렵다. 집 옮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터라, 지금 수준(?)에 만족할 뿐이다.

가만 생각해보면, 초등학교 때부터 아파트로 둘러싸인 세상에 살다보니 단독주택이 빼곡히 들어선 동네를 지나다니는 게 무척 신기한 일 중의 하나였다. 익숙해지면 다시 또 나타나는 그 많은 주택 사이의 골목길들은 아파트 동네에서는 보기 힘든 것이었다. 나름 재밌는 주택가 골목길을 걷는 게 즐겁다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아파트를 떠나 다른 형태의 집에서 살아보라면 선뜻 응하기가 어렵다. 시멘트로 둘러싸인 대한민국이 볼썽사납다고 하여도 막상 내가 아파트가 아닌 다른 형태의 집에 살 생각을 하면 너무 낯설고 또 걱정스럽기까지 하다.

환경과 지역에 상관없이 곳곳에 들어선 아파트로 뒤덮인 대한민국이 너무 삭막하다고 하여도 줄곧 아파트에서 살아온 나로서는 딱히 반론을 제시하기 어렵다. 내가 원한 방식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아파트 외에 다른 방식의 거주 공간을 경험한 적이 사실상 없기 때문이다. 똑같은 형태의 아파트에서 살면서 남들과 비교하여 우쭐댈 만한 것은 평수, 내부 장식, 지역 개발 가능성 등이다. 집이 나를 잘 말해주는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집 없는 나, 아파트를 벗어난 나를 상상하긴 어렵다. 무엇을 위해 집이 필요하고 무엇 때문에 굳이 아파트를 고집하는지 때론 나도 잘 모르겠다.

<사람을 닮은 집, 세상을 담은 집>은 사회현상으로 본 집의 의미, 우리의 전통건축에 담긴 집의 의미, 시대마다 달라진 가치관에 따라 달라진 집의 의미를 살펴보게 하는 책이다.

"건축의 역사는 곧 체제 순응의 역사라 할 수 있다. 건축은 그 시대의 지배담론에 충실히 순응하며 그 사회의 제도를 담을 수 있는 건축물을 양산하고 또한 기득권의 세력을 더욱 확대 재생산하는 데 충실히 기여한다. 서원·사당·종가·선산과 씨족마을 등이 모두 성리학적 유교 질서를 물리적으로 구현하기 위한 장치로 활용되면서 더불어 기존 사림들의 기반을 더욱 공고히 하는 데 기능한 것을 살펴보았다. 흔히 건축을 생활을 담는 그릇이라 한다. 그렇다면 그 그릇 속에 담긴 것은 무엇인가. 네모난 그릇 속에 담긴 물은 네모난 형태를 띠고 둥근 그릇 속에 담긴 물은 둥근 형태를 띤다. 즉 건축은 우리 일상의 모습을 기존의 사회체제 안에 순응시키려는 또 하나의 사회제도인 것이다."(본문 171쪽)

살고 싶은 집과 살 수밖에 없는 집 사이에서

살 곳이 필요하니까 집을 짓는 것이겠지만, 집을 어떤 재료로 어떤 형태로 짓는지는 그 시대의 가치관과 그 사회 사람들이 선호하는 건축 방식에 따라 달라진다. 집을 짓는 데는 반드시 뒷이야기와도 같은 이유가 있다. 집 짓는 덴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말이다.

신분제 사회이던 근대 이전 사회에서 집은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정해진 원칙과 형태가 있었기 때문에 집 자체가 사람들의 저잣거리 이야기꺼리가 되긴 어려웠다. 그러나 신분제 사회가 아닌 근대 이후 사회에서 집은 평수·지역 선호도·나라의 건축 이해도와 관련 법 등에 따라 다양한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지역과 집의 관계 속에서 사람들은 '몇 평에 사는 사람'이나 '어느 지역 아파트에 사는 사람' 등으로 사회적 지위를 드러내게 되었다.

신화·역사·사회 현상이 빚어온 건축 방식과 집의 형태는 어느덧 '나는 누구인가'를 말해주는 대표적인 잣대가 되었다. 겉으로는 비교하기 어려운 비슷한 형태로 곳곳에 자리한 아파트 사이에서 무슨 동네 어느 아파트 몇 평인 집에 사는지는 무척 중요한 비교 정보이다. 선택 여지가 많지 않은 아파트 천국(?) 대한민국 사회에서 누가 왜 집을 짓고 사고 어떻게 집을 유지해 가는지를 유심히 들여다보는 책은 여러모로 반가운 일. 이 책이 그런 작고도 의미 있는 일을 해주는 듯하다.

자본의 권력 앞에서 밥줄을 지켜야 하는 '노동자 계층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안정적인 일이다. 또한, 원치 않는 이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일정한 거주지를 얻는 것, 남의 권리 앞에서 한없이 머리를 숙일 필요가 없게 해주는 '내 집 마련'의 꿈은 오늘도 많은 청춘들을 거대한 사회의 톱니바퀴로 만들어 세상을 돌고 돌게 만든다. 노동과 맞바꾸는 '내 집 마련'의 꿈 속에서 사람들은 사는 이유도 집 짓는 이유도 잠시 잊은 채 시대가 정해주고 유도해왔던 아파트에 몰려들었다. 집은 늘 역사와 사회 사이에서 모양이 정해졌다.

"건축이 기존의 사회질서를 더욱 공고히 하는 또 하나의 사회제도인 것처럼, 아파트도 사회제도이다. 아파트는 노동자에게 주거 안정을 도모하면서 기거에 수반되는 주택담보대출, 모기지론 등을 통해 노동자를 더욱 온순하게 만들어 사회를 안정시키는 역할을 한다. 더 나아가 아파트 거주를 중산층 편입과 동일시하는 사회 분위기를 통하여 노동자가 자신이 노동자임을 잊게 만든다. 단층의 단독주택을 띄엄띄엄 짓고 살던 인류가 고층의 공동주택에서 살게 되기까지 그 물리적·구조적 요건을 발전시킨 것이 영국의 산업혁명이었다면, 노동자를 간접 통제하는 기구로서의 아파트는 프랑스 박애주의자들의 발명품이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아파트는 지금 우리의 생활을 안정시키면서 또한 옥죄고 있다."(본문 263쪽)

책은 신화와 역사를 넘나들며 형성된 집의 가치와 형태를 살펴본다. 또한, 경건한 공간이던 마루와 그 집의 대소사가 이뤄지던 집의 중심지인 마당을 통해 한국 전통집의 역사와 의미를 살펴본다. 남자의 공간과 여자의 공간을 구분하는 세계 곳곳의 집 형태에서 집이 만들어지는 이유와 목적을 살펴본다. 본의 아니게 아파트 천국이 된 대한민국 근현대사 속에서 집의 가치를 살펴본다.

이렇게 이 책은 집이란 재료로만 짓는 게 아니고 역사와 사회 현상이 버무려져 지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내가 원하는 집을 짓는다기보다 역사가 보여주고 당대 사회가 선호하는 방식을 따라 집을 짓는 것이란다. 그 시대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고 그 시대 세상의 가치관이 반영된 것이 집이다. 결국, 집 짓는 재료와 도구는 역사와 사회에서 나오게 된다.

가만 보니, 집은 사회가 원하고 사람이 짓고 역사가 평가한다. 내가 사는 집이라고 무작정 내 것이라고 할 수 없는 속내 복잡한 이야기들이 있다며 여러 주제로 집을 말해 주는 책, <사람을 닮은 집, 세상을 담은 집>이다.

덧붙이는 글 | <사람을 닮은 집, 세상을 담은 집> (서윤영 씀 | 서해문집 | 2012.04 | 1만1900원)



사람을 닮은 집, 세상을 담은 집 - 사회를 비추는 거울, 집의 역사를 말하다

서윤영 지음, 서해문집(2012)


태그:#사람을 닮은 집, 세상을 담은 집, #서윤영, #집,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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