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쿠바를 자전거로 여행하면서 느낀 점 중의 하나는 현지생산 물품은 현지에서 소비하는 것 같았다. 상티 스프리트스로 오는 도중에 오전에만 하더라도 과일을 파는 노점상들이 즐비했었다. 그래서 속으로 이제 도중에 쉬면서 과일을 사먹을 수 있으려니 했다. 과일을 많이 사서 배낭에 넣으면 그만큼 무거워서 자전거 타는 일도 어렵기 때문에 짐을 가능하면 줄이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날 오후처럼 길가에 아무런 노점상도 발견하지 못하면 괜히 우울해지고 힘도 더 든다. 아직은 물류라는 개념이 없고 상점에서 물건을 구매하기 보다는 배급에 의존하기 때문인 듯 했다. 그래서 치즈를 생산하는 집단농장 주변의 구간에서는 치즈만 팔았고 오렌지 농장이 있는 구간에서는 오직 오렌지만 팔고 그런가보다.

결국 상티 스프리트스를 거의 4Km쯤 남기고 겨우 하나의 노점상을 만나 목을 축일 수 있었다. 상대적으로 짧은 일정이라 2시경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점심부터 해결해야 해서 길가에 있는 식당에 들어갔다. 돼지고기, 수프, 샐러드, 밥까지 해서 일인당 우리 돈 500원 정도에 식사를 해결할 수 있었다. 정말 이곳의 가격시스템을 이해하기 어렵다.

호텔보다 좋은 까사

도시 중앙광장으로 갔다. 역시 광장은 사각형으로 되어 있었고 멋진 호텔이 2개 있었는데, '호텔 플라자'에 들어가 가격을 흥정하려했더니 호텔 가격이 70세우세로 너무 비쌌다. 그래서 인근 까사를 알아보려 고 원장과 전 선생은 오던 길에 보았던 까사 쪽으로 자전거를 타고 갔고 나는 광장 주변을 돌아다녔다. 이때 처음으로 비가 내렸다. 한참을 돌아본 후 고 원장 부부가 알아본 호텔 근처 까사가 가장 좋은 위치에 있었고 조건도 괜찮았다. 물론 호객꾼이 접근해서 갔는데 그가 바로 주인이었다. 서로 까사를 알아보고 광장에서 다시 만났는데, 광장에 인접한 까사가 훨씬 좋은 조건이었기 때문에 고 원장과 전 선생이 잡아놨던 까사는 미안하기는 하지만 반환했다. 그 까사 주인 아주머니는 불쾌한 듯한 표정이기는 했지만 크게 문제삼지 않았다. 다행...

호텔보다 훨씬 분위기 좋은 까사에서 저녁 만찬
 호텔보다 훨씬 분위기 좋은 까사에서 저녁 만찬
ⓒ 이규봉

관련사진보기


우리가 정한 광장 옆의 건물에 있는 오스탈 블르바드(Hostal Boulevard)라 적힌 그 까사는 돌로 지은 이층 건물로 이층에 두개의 방이 있고 거실이 있었다. 살림집은 안쪽에 따로 있다. 천정도 매우 높았고 큰 창문은 길가의 환경을 한 눈에 다 보게 해준다. 호텔보다도 시설이나 분위기가 더 좋았다. 숙박비는 20세우세였다. 저녁은 쿠바 가정식으로 하고 1인당 7세우세로 했다. 닭 한 마리 튀김, 돼지고기 요리, 샐러드, 빵, 커피, 구아바 쥬스 등 아주 풍성했다. 우리는 쿠바가 자랑하는 아바나클럽 7년산과 맥주로 매우 푸짐하게 식사를 했다. 아침 식사는 3세우세였는데 역시 그만한 값어치가 있는 식사였다.

저녁을 먹기 전에 주변을 산책했다. 광장을 마주하고 성당이 있어 들어가니 거의 보수를 하지 않은 가난한 성당이었다. 입구에는 이 가난한 성당에 기부를 요청하는 문구가 있었다. 성금함에 갖고 있던 쿠바 지폐를 모두 집어넣었다. 마침 옆에 있던 할아버지가 '그라씨아'를 반복하며 말한다. 가톨릭은 혁명을 지지했다. 그러나 점차 사회 체제가 공산주의로 가는 것을 보고 가톨릭교회는 이를 매우 비판했다. 혁명 후 공산주의를 선언하면서 쿠바 정부는 종교를 탄압했다. 그러나 지금은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고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문과 로마 가톨릭 교회의 헌신적인 사회선교는 종교 정책에 큰 영향을 주었다.

다음 날 새벽 집 밖에서 동네 사람들 잡담하는 소리에 잠을 깼다. 이들은 도체 잠이 없는 지 밤늦게까지 떠들고 이른 새벽부터 또 떠든다. 그것도 큰 소리로.

쿠바 싸이클 선수를 만나다

오늘은 쿠바에 온 목적 중 하나인 산타 클라라에 입성하는 날이다. 산타 클라라에는 체 게바라가 묻혀있기 때문이다. 내가 대학생 시절부터 어렴풋이 알고 있던 체를 만나보는 것이 이번 여행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다. 전날 지나쳤던 사이클 선수들을 또 다시 만났다. 이번에는 그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고속도로가 아닌 일반도로를 선택하여 갔더니 길의 오르막이 좀 있었다. 너무 평지라 자전거 타기가 재미없었는데 제주도 오름 같은 지형이 처음으로 나타났다.

쿠바 싸이클 선수와 함께
 쿠바 싸이클 선수와 함께
ⓒ 이규봉

관련사진보기


점심을 먹었는데 맥주 빼고 4명이서 2000원 정도 나왔다. 중간에 쉬려고 길가의 큰 나무 밑에 갔더니 트럭을 개조한 버스를 기다리는 가족이 있었다. 아마 엄마는 어린 계집애를 데리고 시내에 가려고 하는 것 같았고 허름한 차림의 농부 같은 아버지는 배웅하러 나온 듯 했다. 배낭 속에 남은 초코릿을 꺼내 계집애에게 나눠주고 남아있던 볼펜도 한 자루 여인에게 건네니 쏜살같이 가방 속으로 집어넣는다. 이곳은 학용품도 매우 부족해 보였다.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좀 쉬거나 하면 앞가슴 포켓에 꽂아 놓은 펜을 달라고 하는 사람들이 자주 있었다.

영웅광장의 체 게바라

산타 클라라에 도착했으나 체 게바라 기념관이 시내 한 가운데 있어 찾기가 힘들었다.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자전거 탄 친구가 또 나타나 우리를 안내했다. 그를 따라 시내를 한참 달려 체 게바라의 동상이 보이는 혁명광장으로 들어섰다. 자전거를 타고 온 우리가 이상한 듯 관리 군인은 우리에게 감시의 눈을 떼지 못하는 것 같았다.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자전거를 지정된 장소에 주차하라는 묵언의 명령을 우리에게 하고 있었다. 한쪽 구석에 자전거를 주차하고 체 게바라의 시신이 있는 기념관에 들어갔다. 물론 그의 시신은 베트남의 아버지인 호찌민처럼 미라로 만들어 있지도 않고 따로 무덤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를 직접 볼 수는 없었지만 그의 행적은 잘 볼 수 있었다.

입구에 있는 벽에는 함께 혁명을 하던 혁명동지들의 얼굴 하나하나가 부조로 새겨져 있다. 방으로 들어가자 그의 어린 시절부터 볼리비아에서 총살당하기까지 그에 관련된 각종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가 의대 학생일 때 사용하던 치과 치료용 도구도 있었다. 고 원장 부부에게 관심 있을까 하고 말을 건네 보니 여기까지 와서도 치과 얘기는 재미가 없단다. 뭐든지 직업으로 하면 그렇게 되는가보다. 산타클라라는 지금까지의 다른 도시들과는 다르게 기념관을 방문하는 관광단들이 제법 많았다. 캐나다 관광객 틈에 끼어서 전시관을 구경하였다.

체 게바라는 1967년 10월 9일 볼리비아에서 혁명을 감행하다 잡혀 39세의 나이로 총살당했다. 볼리비아 정부는 그가 묻힌 묘를 비밀에 붙였다, 처형 당시 감독했던 군목이 1992년 비밀을 털어놓으면서 매장된 지 30년만인 1997년 7월 12일 체의 유해가 공식적으로 확인됐다. 시신을 아바나로 옮겨 혁명광장에서 추도식을 열고 이곳에 안장했다.

산타 클라라 영웅광장의 체 게바라 동상
 산타 클라라 영웅광장의 체 게바라 동상
ⓒ 이규봉

관련사진보기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주문

오늘도 중앙광장에 있는 산타 클라라 리브레 호텔에 투숙하였다. 여장을 푼 후 저녁을 먹기 위해 어슬렁댔다. 호텔 프론트에서 갈만한 식당을 물었더니 한 식당을 알려주었다. 그 식당을 찾으려고 배회할 때 호객꾼이 나타났다. 관광객이 많으니 그만큼 삐끼들도 많은 듯이 보였다. 그 역시 호텔에서 알려준 그 식당으로 안내했다.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잘 차려진 식당 내부를 보니 값이 좀 나올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너무 비쌌다. 1인당 12세우세란다. 뭔가 바가지를 씌울 것 같은 느낌에 정중히 거절하고 그 식당에서 나왔고  대신 주변에 있는 마치 체인점 같은 피자 전문집으로 갔다. 피자와 스파게티를 주문했다. 피자에 있는 올리브가 맛이 괜찮아 올리브만 따로 시키면서 우리 식대로 좀 많이 달라 했더니 정말 많이 주었다. 그러나 계산할 때 올리브 값이 피자값보다 더 많이 나왔다. 많이 달랬더니 그는 3인분어치 올리브를 가져온 것이다. 배보다 배꼽이 더 컸다. 쿠바는 모든 것을 무게로 판매한다. 이 식당의 피자와 스파게티는 허름한 식당의 그것보다는 훨씬 먹을 만했다.

엄청 많은 아이스크림!

주변을 둘러보니 아이스크림 가게라는 코페리아(Copellia)가 있었다. 여행 책자를 통해서 한 번 읽어본 적이 있어 들어갔다. 커다란 한 건물을 통채로 다 사용하는데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 어떻게 들어가서 어떻게 주문을 하는지 몰라서 도움을 받을까 하고 주변에 영어를 할 만한 사람을 찾고 있었다. 그때 어떤 젊은 부인이 우리를 도와주었다. 그렇다고 해서 완벽하게 의사소통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고 우리가 여러 종류의 지폐를 내어 놓으니까 그 젊은 부인이 몇 개를 골라 표를 대신 사 주었다. 이곳은 입구에서 아이스크림 값을 미리 내고 들어간다.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 우리는 들어갔다. 1인당 한 400원 정도였다. 표를 창구에 내고 기다렸는데 자그마치 1인당 세 접시가 나온 것이다. 우리는 저녁 먹은 후 포만감과 함께 넷이서 12 접시 가득 담긴 아이스크림을 마주하게 됐다. 먹어도 먹어도 끝이 없다. 이들이 왜 이렇게 살쪘는지 이해가 된다. 대체로 채식보다는 육식 위주의 식습관 때문인 것 같다.

쿠바 음식을 먹으면서 느낀 것 중의 하나는 채소를 잘 먹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니 적어도 우리가 음식점에서 주문할 때 특별히 샐러드나 채소를 위주로 만든 음식을 많이 보지 못했다. 목축업이 발달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혁명의 영향으로 채소를 가꿀 형편이 되지 않아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여행 내내 우리는 채소에 굶주릴 수밖에 없었다. 아이스크림 이야기가 나와서 그런데 쿠바의 웬만한 도시에는 아이스크림 체인점 코펠리아가 있는 것 같았다. 또한 길가에는 아이스크림을 자전거나 이동용 차량에서 파는 경우도 많았다. 적어도 커피와 아이스크림은 아주 싼 가격에 먹을 수 있었다. 작은 잔에 진한 에스프레소 한 잔에 쿠바인 1페소 정도이고 아이스크림도 한 스쿱에 1페소 정도이니 그럴 만도 하다. 그렇다고 맛이 덜한 것이 아니라 정말 맛있다.  

씨끄러운 새 소리에 잠을 깨다

광장에서는 밴드의 연주 소리가 들렸다, 가까이 가보니 클라리넷의 수가 플룻보다도 많았다. 보통 플룻이 더 많은데. 잠시 그들의 연주에 귀를 기울였다. 광장 둘레에는 커다란 나무들이 둘러싸 있었다. 이 나무에는 까마귀 같은 새까만 새들이 잔뜩 앉아 있었다. 이 새소리가 너무도 시끄러웠다. 어둠이 오자 새 울음이 잦아들었다. 그러나 다음 날 새벽 이 새소리가 얼마나 시끄러웠던지 새소리 때문에 잠을 깼다. 호텔을 끼고 있는 광장에서는 밤새도록 뉴스 같은 내용으로 무언가 끝없이 지껄이고 있었고, 로비에서는 밤새껏 음악을 틀어놓아 엄청 소음이었다. 아마 체제를 선전하는 선전방송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의 60년대와 70년대를 살았던 사람들이면 이런 의미를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잔재로 남아 있는 게 시골 이장님의 동네 스피커이고 도시에서는 우리가 지금 사는 아파트의 공동 스피커가 아닐까 한다.

내일 도착할 예정인 꼴론(Colon)은 전혀 숙소에 대한 정보가 없어 여행 오기 전부터 고민했던 곳이다. 그래서 꼴론의 호텔에 대한 정보를 호텔 프론트에 부탁하니 너무 친절하게 알려준다. 걱정했던 꼴론에서 숙박은 하루 전에 이곳에서 산티아고 아바나 호텔을 예약하면서 끝난 것 같았다. 카운터의 여직원은 능숙한 영어로 일처리를 해주었고 외국인 관광객을 많이 대해봐서 그런지 꼴론에 있는 호텔 산티아고 아바나에 전화를 걸어 예약까지 일사천리로 처리해주었다. 이제 자전거를 타고 가서 그 호텔만 찾으면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하진 않았다. 그 호텔에서 무슨 일이 생길지는 모르고...


태그:#영웅광장, #아이스크림, #새 소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수학을 통해 사회를 분석한 <오지랖 넓은 수학의 여행>, 역사가 담긴 자전거기행문 <미안해요! 베트남>, <체게바를 따라 무작정 쿠바횡단>, <장준하 구국장정6천리 따라 자전거기행> 출간. 전 대전환경운동연합 의장, 전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장, 현 배재대 명예교수, 피리와 클라리넷 연주자로 활동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