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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차는 같이 타자

12월 24일. 드디어 출발이다. 오늘의 목적지는 바야모(Bayamo)이다. 이 도시의 이름이 들어간 바야모 행진곡(La Bayamesa)은 쿠바의 공식국가로 1902년 제정됐다. 이 곡은 세스페데스가 작곡했다. 그는 바야모 남서쪽 아래에 있는 데마야구아에서 스페인에 대항하여 최초의 독립전쟁을 시작한 독립투사다. 이른바 10년 전쟁이 이곳에서 일어났다.

바야모는 그란마(Granma) 주의 주도로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의 고원에 위치해 있다. 그란마란 이름은 1956년 12월 카스트로와 그 혁명군들이 요트를 개조한 그란마 호를 타고 쿠바 동남쪽 카보 크루스(Cabo Cruz) 반도에 상륙한 것을 기념하여 그 이름이 붙여졌다. 혁명 전에는 오리엔테 주였다.

혁명군은 카보 크루스 산 근처에 있는 알레그리아 델 피오 사탕수수 농장에서 정부군에게 발각된다. 정부군의 공격으로 거의 전멸하고 오직 12명만이 잡히지 않고 생존했다. 피델 카스트로의 지도 아래 이 12명이 대부분이 농부인 인민들의 협조로 마침내 혁명을 완수한다. 민심이 천심이었다.
 
사탕수수 밭에 나있는 운송용 길. 혁명군은 이러한 길을 이동경로로 삼았다.
 사탕수수 밭에 나있는 운송용 길. 혁명군은 이러한 길을 이동경로로 삼았다.
ⓒ 이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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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모는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을 넘어 가야 하므로 자전거 타기에 좀 힘들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산맥을 넘는 여정인데도 높은 고개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산티아고를 떠나자 바로 도로가 나타났다. 도로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차를 타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출근하는 사람들을 빈 차에 태워 보내는 지도원들이 간간이 제복을 입고 서 있다. 이 사람들을 쿠바노들은 '아술'이라고도 부른다. 파란색 번호판인 국가 차만 세워서 그런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참고로 주황색은 외국인 합자회사 차, 빨간색은 국방부 차, 그리고 갈색 번호판은 관광객 차다.

이곳에서는 법으로 빈 차를 함께 타게 되어 있다고 한다. 없는 살림에 어차피 가는 차 좀 같이 타라는 것인가 보다. 그래서 이들이 빈 차가 오면 기다리는 사람들을 배정해준다. 국가 차라 그런가? 얻어 타는 사람들도 고마운 표시를 잘 하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가 아바나에서 산티아고 데 쿠바까지 올 때 어떤 검문소에서 차를 세우라고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에도 야심한 시각이기는 했지만 검문소 안에는 우리가 가는 방향으로 가고 싶은 사람이 있었던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 차에 여석이 있는지를 물어보았다. 하지만 우리 차는 자전거와 사람으로 꽉 차 있어서 자선을 베풀 여지가 없었다. 당시에 맥시무스가 그냥 검문소를 지나치려고 하다가 급하게 멈추고 후진해서 검문소에 대한 존경심을 나타냈던 것으로 기억된다. 뭔가 권위에 대한 도전과 굴종 사이의 갈등이라고나 할까.

이른 아침 트럭을 개조한 버스(camion)에 타는 쿠바 사람들
 이른 아침 트럭을 개조한 버스(camion)에 타는 쿠바 사람들
ⓒ 이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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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부족으로 자연과 공생하다

한 마을이 나타났다. 길에 자동차는 거의 보이지 않고 온통 마차뿐이다. 마치 미국 서부 개척시대의 영화를 보는 느낌이었다. 4륜 마차가 다니는 것을 보니 석유 공급이 얼마나 부족한지 와닿았다. 마을을 통과하여 나오니 넓은 들판이 쫙 펼쳐 있다.

멀리 쳐다보니 트랙터가 움직이고 있는데 많은 새들이 그 주변에 모여 있다. 논인 것 같았다. 쿠바에서는 농약과 화학비료를 거의 사용하지 않으므로 새들이 그렇게 많이 모여드는 것 같다. 트랙터가 갈고 간 길에 뒤집어진 흙에서 나온 벌레를 잡아먹는가 보다. 비록 기계로 논밭을 일구지만 새들이 함께 하는 그 모습은 참 보기 좋았다.

인간은 자연과 공생하는 법을 정말 배워야 한다. 창조주가 이 지구를 창조할 때 인간이라고 해서 특별한 지위를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머리가 다른 동물에 비해 영리하다는 이유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자연을 파괴하며 모든 동식물의 생사여탈권을 갖고 있는 것은 창조주의 뜻을 저버리는 것 아닐까?

결국 자연의 파괴는 우리 후손에게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선조에게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후손에게 잠시 빌린 것이란 생각을 하면 이렇게 자연을 마구 파괴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아! 자본주의의 끝 모를 탐욕이여.

하얀 새들이 논에 가득 앉아 있다.
 하얀 새들이 논에 가득 앉아 있다.
ⓒ 이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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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게 잠긴 '대단한' 화장실

예상 외로 길은 너무도 완만했다. 오르막도 거리는 좀 길지만 자전거로 오르기에 충분했다. 쿠바혁명군이 정부군에 맞서 마에스트라 산맥 밀림에서 싸웠다는 것이 기억났다.

"카스트로와 게바라가 정부군에 맞서 싸우던 그 산맥 맞아? 그다지 험난하지도 않은데."

처음 만난 마을을 지나 점심때에 이르기까지 길가엔 단 한 곳도 상점이 나타나지 않았다. 갖고 간 도시락을 먹을 그늘진 곳을 찾으며 한참 가다보니 마을이 보인다. 입구에 커다란 야자수 나무가 서 있고 그 옆에 작은 상점이 보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보니 얼음에 채운 반가운 맥주가 있었다.

남자야 가는 길 아무데서도 일을 볼 수 있지만 역시 숙녀인 윤 원장이 화장실이 필요했나 보다. 부군과 함께 앞에 있는 큰 집으로 향하며 화장실을 찾아 나섰다. 돌아오면서 하는 말이 우습다.

"겨우 말이 통해 화장실에 갔는데 자물쇠로 굳게 잠겨 있는 거예요. 주위에 있던 세 사람이 열쇠로 이 자물쇠를 열려고 여러 번 시도했는데 끝내 열지를 못해요. 그때 멋진 구두를 신은 신사가 오더니 '착!' 하고 열어주더라고요. 큼직한 자물쇠로 잠겨 있어 대단히 시설이 좋은 화장실인 줄 알았는데, 낡을 대로 낡은 화장실이라니. 정말 웃겨!"

정말 맛있는 맥주

높은 야자나무 그늘에 누워 먼 하늘을 바라보며 쿠바의 대표 맥주 부까네로(Bucanero)를 마셨다. 얼마나 시원하던지 갈증이 싹 가신다. 부까네로는 외눈박이 해적의 모습을 상표로 한 쿠바의 대표 맥주다. 다른 맥주에 비해 약간 비싸긴 하나 맛이 아주 좋았다. 외국에 나올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왜 우리나라 맥주는 그렇게 맛이 없는지.

예나 지금이나 오직 오비, 카스, 하이트가 대표한다. 3개 회사가 서로 상부상조하고 있어 그런 거 아닌가? 좀 다양했으면 좋겠다. 지역에 가면 그 지역의 특색에 맞는 색다른 맥주가 있었으면 좋겠다. 전국에 공급되지 않더라도 그 지역에서만이라도 사 먹을 수 있는 그런 소규모의 다양한 맥주들이 있었으면 좋겠다. 어떠한 조직이라도 다양성이 확보돼야 새로운 균형을 이룰 가능성이 높아진다. 다양성을 상실한 조직은 비록 잠시 높은 생산성을 올리더라도 변화에 취약해 한 번의 외부 조건 변화만으로도 망할 수 있다는 것을 왜 모를까?

갖고 온 도시락을 꾸역꾸역 먹었다. 맥주가 없었다면 먹기 힘든 점심이 될 뻔했다. 쿠바에서 맥주는 장소에 관계없이 대체로 1세우세 전후다. 상점에서 사먹든 식당에서 사먹든 그 유명한 나씨오날 호텔에서 사먹든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선 편의점에서 1300원 하는 맥주를 일류호텔 방에 있는 냉장고에서 꺼내 먹으면 아마 8000원쯤 내야 할 걸? 

바야모에 도착하여 요안나가 알려준 주유소를 찾았다. 우리 부탁으로 어제 요안나가 이곳의 까사를 미리 예약해줬다. 주유소 앞에서 기다리겠다던 까사 주인은 찾을 수 없었다. 아마 우리가 말을 잘못 이해할 수도 있었겠다. 다행히 적어준 주소를 갖고 주유소에 있는 사람에게 물어 그가 까사를 찾아냈다. 주유소에 있던 한 사람이 직접 자전거로 까사까지 우리를 안내했다.

그란마 주에 들어왔음을 알려주는 주 경계표. 배는 혁명군이 타고 온 그란마 호를 나타낸다.
 그란마 주에 들어왔음을 알려주는 주 경계표. 배는 혁명군이 타고 온 그란마 호를 나타낸다.
ⓒ 이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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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싸! 이중화폐 브라보!

이곳 까사는 이층집이었다. 어머니 낸시는 아래 층에서, 아들 안또니오는 2층에서 까사 운영을 독립적으로 하고 있었다. 쿠바에서 까사는 일정한 조건을 갖춘 집만이 할 수 있다. 그래서 에어컨이 있고 화장실이 그런대로 잘 갖추어져 있다. 나라의 허가를 받아야 하며 세금이 많다.

각 지방마다 세금이 다르다. 예를 들어 아바나에서도 미라마르같이 부촌인 경우 세금이 더 높고, 쎈트로 아바나는 세금이 좀 싸다. 쎈트로 아바나일 경우 한 달 세금이 150세우세 정도라고 한다. 손님이 있든 없든 관계없이 세금을 내야 한다. 따라서 성수기에 열심히 손님을 받아야 비수기에 세금을 내더라도 견딜 수 있다고 한다.

역시 전망 좋은 2층으로 고 원장 부부가 올라가고 우리는 1층에 묵었다. 2층에서는 여권을 등록한 것 같은데 우리 여권은 등록하지 않은 듯하다. 세금 탈루(?), 이거 무시 못하는 욕망이다. 우리나라도 이로 인해 흥한 사람도 물론 많지만 망한 사람도 많다. 잘못 걸리면! 그러나 확률적으로 걸리지 않는 경우가 훨씬 많다. 그러기에 일반 상식을 가진 사람은 탈세의 욕망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저녁을 먹기 위해 안또니오가 알려준 곳을 찾아 가려고 길을 나섰다. 하지만 그곳으로 가는 도중에 사람들이 어느 식당 같은 곳에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있어서 그곳으로 갔다. 간판에 있는 그림으로 봐서는 생선전문 식당인 것 같다.

문은 닫혀 있고 젊은 쿠바 커플들이 여기저기에 서서 한담을 하고 있다. 그들 말이 7시가 되어야 문을 연다는 것이다. 30분이나 남았는데 딱히 갈 데도 없고 해서 문 열기만 기다렸다. 그들은 우리 차림을 보더니 반바지 입고는 입장이 거부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한 친구는 그래도 외국인이니까 기다려 보란다.

7시가 조금 더 지나서 문을 열더니 이름을 부른다. 보니 다 예약한 손님들이다. 우리는 그들이 다 들어가고 나서야 들어갈 수 있었다. 일부 반바지 차림이었으나 들어오란다. 그다지 넓지 않은 홀에 내부 장식은 거의 없다. 탁자만 한 10여 개 놓여 있고 가운데 무대에는 뭔가 공연할 분위기이다. 그래도 오늘이 성탄절 이브인데! 한 노신사가 기타 치며 노래 부르기 시작한다.

메뉴를 보니 매우 비쌌다.

"뭐 이렇게 비싸!"

우리는 숫자가 좀 작은 것만 골라 이것저것 시켰다. 맥주 값은 보지도 않고 그래야 1세우세 정도겠지 하고 5병을 주문했다. 그런대로 음식은 좋았다. 계산서를 달라하니, 이게 뭐야! 눈이 둥그래졌다. 자그마치 189세우세다. 아니 이럴 수가! 웬 바가지 요금? 종업원을 불렀다. 말이 안 통하니 가지고 다니던 아이패드를 열어 스페인 사전을 찾았다. 단어를 보여주면서 말을 나누다가 맥주 값을 물었더니 20페소라는 것이다.

"뭐? 20세우세?"

우리는 흥분했다. 뭐가 이렇게 비싸. 이럴 수가? 그러나 그것은 세우세가 아닌 세우페였다. 그러니까 20페소는 1세우세가 좀 안 되는 값으로 좀 싼 맥주 값이었다. 전국이 동일 요금 체제라는 것을 아는 순간 우리는 착각했음을 알았다. 저녁 식사비용은 189세우세가 아니고 189세우페였던 것이다. 관광객이 드문 이곳 식당은 쿠바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므로 화폐 단위가 세우세가 아닌 세우페였던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세우세로 착각하고 흥분했던 것이다. 189를 24로 나누면 8세우세, 즉 8달러 정도이다. 맥주 5병을 포함한 4명의 저녁 식사비용이 우리 돈으로 1만 원 정도였다. 맥주를 빼면 5000원도 안 되었다. 200세우페를 지불하고 또 다른 흥분으로 식당 문을 나섰다. 이럴 줄 알았으면 비싼 음식을 주문하는 건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이중화폐의 즐거움을 맛보았다. 아싸! 그라씨아! 이중화폐 브라보!

성탄음악이 없는 쿠바의 성탄절

식당을 나오니 마차가 서 있다. 돈을 엄청 절약한 듯한 착각에 빠져 마차를 타보고 싶었다. 마차로 한 바퀴 돌자고 하니 10세우페라고 한다. 그것도 4명 모두에. 잔돈이 없어 20세우페 지폐를 주었다. 거스름돈을 안 준다. 없다는 것이다. 여행 책자에 나오는 말이 기억났다.

"잔돈을 항상 준비하시라. 거스름돈이 없단다."

팁으로 생각하고 거스름돈 10세우페를 기분 좋게 주었다. 바야모는 발레로 유명한 도시였으나 지금 이 시간에 어디서 하는 줄도 모르고 내일 아침 일찍 떠나야 하니 볼 생각조차 할 수 없어 아쉬웠다. 편의점에서 물과 맥주를 사고 거스름돈으로 막대사탕을 받았다. 이처럼 큰 상점도 잔돈이 없다는 것이다.

오늘이 전 세계 많은 곳에서 먹고 마시고 뛰노는 성탄절 저녁이건만 가톨릭 신자가 많은 쿠바에서는 그 분위기를 느낄 수 없었다. 이곳 바야모도 그렇고 어제 있었던 산티아고도 그렇고, 시내 어느 곳에서도 성탄이라든가 연말 분위기를 느낄 수 없었다. 마치 아프리카에서 잘 살고 있던 그들을 강제로 끌고 와 노예로 삼은 기독교인들의 정신적 지주 예수에게 반항이라도 하듯이 그들은 성탄절에 무관심했다.

생전 처음으로 성탄절 저녁을 이렇게 성탄 장식물은커녕 성탄곡 한번 듣지 못하고 보냈다. 고 원장 부부도 둘이서 보낼 양이었던지 자신의 방으로 갔고 함께 누워 있는 전 선생도 잠이 들었다. 예수 탄생을 기념하는 모임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대신 1956년 이곳에서 가까운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의 정상인 피코 투르키노(Pico Turquino)에서 겨우 목숨을 건진 체 게바라와 카스트로 형제를 포함한 그란마 호의 생존자들이 성탄절 저녁을 보낸 것을 생각하며, '쿠바혁명을 위하여'를 외치며 혼자 맥주를 더 마시고 일찍 잠으로 떨어졌다.


태그:#화장실, #이중화폐, #성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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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을 통해 사회를 분석한 <오지랖 넓은 수학의 여행>, 역사가 담긴 자전거기행문 <미안해요! 베트남>, <체게바를 따라 무작정 쿠바횡단>, <장준하 구국장정6천리 따라 자전거기행> 출간. 전 대전환경운동연합 의장, 전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장, 현 배재대 명예교수, 피리와 클라리넷 연주자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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