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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선거일이 채 두 달도 남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주요 정당의 후보가 모두 결정되면서 이제 본격적인 대통령 선거 국면이 시작된 듯합니다. 그동안 정치에 별반 관심 없던 이들조차 거의 매일 보도되는 각 후보별 지지율 추이를 보면서 선거에 관심도 높아지는 요즘입니다.

과연 야권의 단일화는 실현될 것인지, 또한 박근혜 후보와 야권 후보의 양자 구도에서 최종 승리자는 누가 될 것인가를 두고 저녁 모임 때마다 나름의 관전평을 늘여놓곤 합니다. 그러면서 최근 들어 저에게도 선거와 관련해서 묻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당신이 지지하는 후보는 누구냐?"는 질문입니다. 그때마다 제 답은 늘 똑같습니다.

"제가 지지할 후보는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서민들의 억울한 사연에 귀 기울여 줄 사람입니다. 특히 그중에서도 군에 입대한 아들을 의문사로 잃고 고통 속에 살아가는 불쌍한 어머니들의 한을 풀어줄 사람을 지지하겠습니다."

부산에서 밤 기차를 타고 올라온 어떤 모녀

미군 수사관이 현장에서 촬영한 고 김훈 중위의 시신. 좌측 상단 청바지 차림의 미군 수사관 다리가 보이고 김 중위의 양손에는 화약 잔재를 채취하기 위해 봉투가 끼워져 있다. (유족의 양해를 얻어 김 중위의 사진을 공개합니다)
▲ 미군 수사관이 현장에서 촬영한 고 김훈 중위의 시신 미군 수사관이 현장에서 촬영한 고 김훈 중위의 시신. 좌측 상단 청바지 차림의 미군 수사관 다리가 보이고 김 중위의 양손에는 화약 잔재를 채취하기 위해 봉투가 끼워져 있다. (유족의 양해를 얻어 김 중위의 사진을 공개합니다)
ⓒ 김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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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당시 저는 천주교 인권위원회에서 활동가로 일했습니다. 그리고 그때 판문점 241GP 3번 벙커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김훈 중위의 아버지 김척 예비역 중장을 만났습니다. 그 후 15년. 저는 군에서 의문의 사인으로 죽어간 참 많은 군인들의 어머니들을 만났습니다. 천주교 인권위원회가 김훈 중위 사건을 도와준다는 말이 입에서 입을 통해 알려지면서 군 의문사 어머니들이 저희들을 찾아와 억울함을 호소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김훈 중위 사건이 전 국민적 의혹으로 확산되던 1998년 12월과 1월, 그 두 달여 기간 안 만난 150여 군 의문사 가족들의 사연은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눈물부터 먼저 쏟아지는 사연이 참 많았습니다. 그중에 가장 잊혀지지 않는 사연은 어느 모녀의 이야기입니다.

1999년 1월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아침 출근을 하는데 사무실 앞에 할머니처럼 보이는 어머니와 갓난 아기를 업은 젊은 여자가 서 있었습니다. "어떻게 오셨냐"고 여쭈니 부산에서 밤기차를 타고 왔는데 88년 군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할머니의 아들 사건을 진정하러 오셨다고 했습니다. 이 추운 겨울에 온기 하나 없는 싸늘한 복도에서 1시간이 넘도록 기다리셨다는 말씀에 너무나 송구했고 가슴 아팠습니다.

급히 문을 열고 따뜻한 차를 대접한 후 말씀을 들었습니다. "여기는 어떻게 알고 부산에서 오셨냐"고 하니 예상처럼 "방송에서 김훈 중위 사건을 이곳에서 도와준다는 것을 보고 무작정 올라왔다"고 하십니다. 언론을 통해 매일 보도되는 김훈 중위 관련 보도를 보며 자기도 억울하게 군에서 잃은 아들 생각에 매일같이 눈물로 살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를 보다 못한 그 딸이 어머니 소원이라도 풀어드리겠다며 밤 기차를 타고 새벽에 올라온 길이라는 것입니다.

아들은 3대 독자였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애지중지 키운 아들을 군에 보내놓고 어머니는 매일 정한수를 떠놓고 아들의 무사 귀환을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맞이한 훈련소에서의 첫 면회. 마냥 어리게만 보이던 아들이 이전보다 더 늠름해져 있어 너무 장했고, 그래서 이제 곧 나올 100일 휴가를 간절히 기다리던 그때, 새벽 어스름이 채 걷히지 않은 시간에 부대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는 것입니다.

부대 선임하사라는 사람이 하는 말이 "아들이 좀 다쳐 지금 병원에 있으니 어서 빨리 부대로 와야겠다"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예감은 달랐습니다. 뭔가 더 안 좋은 일이 벌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 길로 택시를 대절하여 부산에서부터 아들이 근무하던 강원도 첩첩 산골의 모 군 병원으로 갔습니다. 그러면서 어머니는 불길한 자신의 예감이 주책으로 끝나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고 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육감은 사실이었습니다. 아들은 좀 다친 것이 아니라 이미 숨이 끊긴 채 돌아올 수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헌병대 수사관은 그 늠름했던 아들이 자살했다고 말했습니다. 군복무 염증을 느낀 아들이 스스로 총을 쏴 자살했다는 헌병대 수사관의 말이었다고 합니다. 그 순간 어머니는 소리쳤습니다.

"내가 지를 아낀 만큼 그 놈이 얼마나 이 에미를 사랑했던 놈인데, 그 놈이 군 생활이 힘들다고 이렇게 나를 떠날 리가 없어요."

어머니는 비명처럼 이 말 한마디를 외치고 실신했습니다.

죽은 아들 관광버스로... 아들 낳은 것이 원망스러워

"가보니 처참하더라고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고 정신을 차릴 수가 없는데 어떡하겠어요. 부대에서 무조건 자살이라고 하면서 빨리 화장하라고 하는데……. 그래도 제가 믿을 수가 없어 아들이 죽었다는 사건 현장이라도 한번 보여 달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중대장이 '거기 가 봐야 뭐 할 거냐"면서 그냥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럼 아들과 같이 근무했던 소대원이라도 한 만날 수 있게 해 달라, 아들이 어떻게 생활했는지, 어떤 일이 그동안 있었는지 들어보고 싶다며 간청했는데 그 역시 중대장 하는 말이 "괜히 힘들게 군 복무하는 다른 사병들만 괴롭히지 마시고 어서 죽은 자식이나 데려가서 화장 하시라고……. 그래, 이도 저도 다 안된다고 해서 3일째 되던 날 장례를 하러 화장터로 가려는데 이번에는 부대에서 아들 데리고 나갈 차가 없다는 거예요.

할 수 없이 제가 그 낯선 곳에서 물어 물어 관광 버스를 불렀어요. 그리고 그 큰 버스에 죽은 아들 놈을 싣고 우리 식구끼리 나오는데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었어요. 그래도 나는 그때 돈이라도 있어 관광 버스라도 불러 자식을 데리고 나왔지만 돈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하나 생각하니 이 나라가 원망스럽고 아들 낳은 것이 너무 억울하더라구요."

끊길 듯 끊길 듯 그날의 아픔을 눈물로 말하는 어머니의 사연을 들으며 끝내 저 역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가 말하는 그날의 영상이 제 가슴에, 마음에 너무도 선명하게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도대체 자식 밖에 모르고 살아가는 이 땅의 어머니들에게 군대가 왜 이렇게 잔인하게 대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남의 집 귀한 자식을 '국민의 의무'라며 강제로 징집하여 데려가 놓고 이렇게 막 대해도 되는 것인가요. 이것이 정말 국가가 국민에게 강요할 수 있는 '신성한 의무'인가요.

정말 그 어머니를 도와드리고 싶었습니다. 재야 인권운동가인 제가 가진 힘이야 너무 미약하지만 이 어머니의 아픈 마음만은 누군가 도와 드려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상처받은 이 어머니의 고통을 모른 척 그냥 돌려 보내 드리는 것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여쭤봤습니다. 아들의 죽음에서 어머니가 생각하는 의문점이 무엇인지, 그래서 우리가 그중에 자세히 봐 주기를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씀해 달라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평소 아들 성격이 밝고 긍정적이었는데 갑자기 자살했다는 것이 이해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특히 사고가 나기 며칠 전, 집으로 전화해 얼마 남지 않은 100일 휴가 때 친구 누구 누구와 신나게 놀기로 했다며 좋아하던 아들이 자살했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아들에 대해 자살의 이유도, 원인도 없이 그냥 막연하게 '군 복무 염증에 의한 자살'이라며 빨리 화장하라는 말만 되풀이하던 헌병대 수사관의 말만 생각하면 너무 분하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어머니는 사건 당시 자신이 느낀 의문에 대해 저를 이해시키고자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건이 일어난 1988년 당시,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4년 전인 그때는 평범한 어머니가 사건의 실체에 대해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없었습니다. 더구나 사건 현장도, 수사 기록도 보지 못한 그 어머니의 처지에서 객관적인 사실을 묻는 저의 질문은 어쩌면 답답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의문은 있는데 그것을 딱히 짚을 수 없는 어머니 입장이나 이를 듣고도 '달리 우리가 무엇을 해 드릴 수 있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교차하던 그때였습니다.

그동안 가만히 우리들의 대화만 듣고 있던 딸이 저에게 물었습니다.

"저, 만약에 동생 사건을 여기에 진정하면 저희도 김훈 중위 가족들처럼 텔레비전이나 신문 같은 곳에 나가게 되나요?"

'자살한 외삼촌이 시댁에 알려질까...' 오열 하던 딸

뜬금없는 딸의 질문에 당황했습니다. '이 분이 언론에 나오고 싶어서 그런가' 하는 생각과 속으로 "딸이 참 철이 없구나"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약간 속은 상했지만 냉정함을 찾아 차분하게 설명했습니다.

"그건 저희도 알 수 없죠. 일단 저희가 이 사건에 대해 내용을 정리한 후 언론사 기자들에게 관심을 촉구하고자 자료를 배포할 계획인데 이 사건을 다룰 것인지 아닌지는 언론사 데스크가 판단할 일이니 저희가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닌데, 왜 그러시죠?"

머뭇거리던 딸은 그제서야 자신의 말을 꺼내놓기 시작했습니다. 딸은 죽은 군인의 누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결혼한 지 채 2년이 못 된 신혼으로 5개월 전 아들을 낳았다고 말했습니다. 딸의 말에 의하면 자신이 결혼하면서 어머니는 혼자 살았다고 합니다. 일찍 남편과 사별하고 자기와 남동생만 바라보며 행상으로 자식을 키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3대 독자 아들을 잃고 괴로워하는 어머니를 보다 못한 딸이 어머니에게 "내일 저와 같이 서울의 천주교 인권위원회로 가시자"고 말한 그날 밤, 누나는 밤새 한 숨도 자지 못했다고 합니다. 옆에 잠들어 있는 남편에게 이 사실을 말해야 할까. 남편은 아내에게 남동생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상태였다고 합니다. 결혼하기 전, 군에서 죽은 남동생이 있었다는 말을 그녀는 차마 남편에게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밤새 뒤척이면서 고민을 했어요. 남편에게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겁이 나서 결국 말을 못하고 왔어요. 군에서 자살한 동생이 있다고 하면 남편이 어떻게 생각할까. 그리고 시부모님이 알게 되면 또 어떻게 하나. 제가 겁이 나는 것은 사실 제 5개월 된 아들 때문인데요. 정말 그런 일은 없겠지만 만약 아들이 자라면서 뭐가 잘못 되거나 아니면 커서 군에 갔다가 또 무슨 일이 벌어지면 시댁에서 뭐라고 말을 할까.

혹시 너희 집에 자살한 외삼촌이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생각할까봐…. 정말 무서워서 말을 못 하겠더라고요…(울음) 동생을 생각하면 방송이고 뭐고 누나가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다 하고 싶은데… 그렇게 되면 시댁 식구들도 다 알게 될 것이고 그래서 또 그런 생각을 하면 무섭기도 한데 또 한편으로는 누나가 자기 생각만 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 동생은 또 얼마나 섭섭하게 생각할까 하고 해서 괴롭고…"

결국 그녀는 자신의 말을 채 끝내지도 못하고 사무실 밖으로 뛰쳐 나갔습니다. 그리고 남은 저와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군에서 자살로 '처리'된 남동생이 있었다는 사실이 시댁에 알려질까 봐 두려워하는 그 마음과 홀로된 친정 엄마가 아들을 그리워하는 그 심정을 헤아리면서 겪었을 그녀의 고통을 생각하며 저 역시 무슨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그렇게 서로가 소리 없이 고개를 떨군 채 눈물만 흘리던 그때였습니다. 어머니가 나지막하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제 아들 사건을 여기서 다루지 말아주세요. 그냥 없던 일로 해 주세요."

손수건으로 입을 틀어막고 오열하며 나가시는 그 어머니를 저는 말릴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긴 복도를 따라 울며 가시던 그 어머니의 뒷모습을 저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13년 전 어느 날, 제가 군 의문사 가족을 생각하면 잊을 수 없는 아픈 기억 하나였습니다.

20년 이상 방치된 군인을 안장해줄 대통령 후보는?

지난 2002년 9월 24일 국방부장관 면담을 요구하던 군의문사 유가족이 굳게 닫힌 국방부 철문을 부여잡고 울부짖고 있다.
 지난 2002년 9월 24일 국방부장관 면담을 요구하던 군의문사 유가족이 굳게 닫힌 국방부 철문을 부여잡고 울부짖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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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대통령 후보로 출마한 분들이 이 사실을 알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전국의 군인 병원에는 최소 10년에서 길게는 20년 넘도록 장례를 치르지 못한 채 방치된 군인 시신이 23구에 이르고 있습니다. 또한 군 헌병대에서 자살로 '처리'된 아들의 죽음을 인정할 수 없다며 화장후 인수를 거부한 유해 역시 판문점 김훈 중위를 비롯하여 모두 120여 구가 군 부대 창고에서 방치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이는 '새 발의 피'입니다. 통계에 의하면 한해 평균 130여 명의 군인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를 날짜로 계산하면 3일에 한 명씩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3일이 지나면 한 명, 3일이 지나면 또 한 명. 그리고 이렇게 죽어가는 군인의 절반은 자살로 '처리'되며 자살 사유는 대부분 '군 복무 염증에 위한 자살'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렇게 죽어간 군인들을 지칭하는 국방부의 행정 표현입니다. 99년 판문점 김훈 중위 의문사를 규명하기 위해 만들었던 국방부 특별합동조사단 자문위원으로 국방부를 방문했을 때입니다. 정문을 들어서는데 '비전투 손실 예방의 달'이라고 써 있는 현수막이 보였습니다. 그 뜻이 도무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국방부측 관계자에게 물어봤는데 돌아온 답변이 저를 경악하게 합니다.

"전투 사망하지 않은 모든 군인의 죽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안전 사고나 자살 등 비 전투 상태에서 사망할 경우 손실로 표현하는데 이를 예방하자는 내용이죠."

강력하게 항의했습니다. 어떻게 사람을, 그리고 누군가의 귀한 아들이 죽었는데 이를 '손실'로 표현할 수 있냐며 화를 냈습니다. 그렇다면 죽은 사람을 '마이너스 1'로 표시하고 다음해 다시 그 마이너스를 채우기 위해 누군가의 귀한 아들을 데려오면 되는 거냐며 격하게 따졌습니다. 그래서 그랬을까. 그 다음날 다시 찾아간 국방부 정문에서 문제의 현수막이 사라졌습니다. 저는 국방부가 눈에 보이는 현수막만 치우지 말고 그따위 '야만적인 생각' 역시 함께 사라졌기를 기대합니다.

대통령 후보, '군 의문사 진상규명위' 공약 제시해야

충남 논산 육군훈련소 가족면회가 13년 만에 재개된 지난 2011년 5월 4일 한 훈련병이 고개를 돌려 면회를 온 가족을 찾고 있다.
 충남 논산 육군훈련소 가족면회가 13년 만에 재개된 지난 2011년 5월 4일 한 훈련병이 고개를 돌려 면회를 온 가족을 찾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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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저는 꼭 군대에 갈려고요!"
"그래야지. 그런데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냐?"

올해 대학 1학년인 아들의 뜬금 없는 말에 반문하니 '아들의 병역 비리로 어려움을 겪는 보도를 보며 자신은 꼭 군대를 가서 아버지를 곤란하게 하지 말아야겠다'고 오래 전부터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순간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내심 당황하다가 빙긋이 웃으며 제가 말했습니다.

"그거야 높은 사람들 이야기이고 아빠야 뭐 평범한 사람인데 어디 가서 그런 말은 하지 마라. 남들이 들으면 웃겠다."

그러자 아들은 '아버지가 자랑스럽기에 자기 때문에 아버지가 누군가에게 손가락질 받지 않게 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말해주는 아들이 고마웠습니다. 그리고 지난 9월 말, 아들은 징병을 위한 신체검사를 받았고 현역 군인으로 입대가 결정되었다며 밝은 목소리로 전화했습니다.

그날 제 마음은 어땠을까요. 국민으로서 신성한 '병역의 의무'를 다하겠다는 아들이 한없이 자랑스러웠을까요? 아니면 제가 그동안 만나온 수많은 군 의문사 사건을 떠올리며 마음이 무거웠을까요?

그래서 저는 이번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후보들에게 요구합니다. 지난 2010년 당시 한나라당 신지호 의원이 제출한 '군 의문사 진상규명 등에 관한 특별법 폐지 법률안'에 따라 해산된 '대통령소속 군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를 다시 상설적인 기구로 만들어 주십시오. 이를 통해 3일에 한 명씩 죽어가는 이 땅의 아들들이 왜 죽었는지, 어떻게 죽은 것인지 그 이유라도 그 어머니들이 확실하게 알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사랑하는 아들들이 정말 자살했다면 무슨 일로 그렇게 모진 마음을 먹게 된 것인지, 정말 군 헌병대의 발표처럼 구타나 가혹행위는 없었는지 국방부가 아닌 제3의 정부 기구가 조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진실을 밝혀주는 것 역시 이 나라와 국방부가 국민에게 해야 할 또 다른 '신성한 의무'임을 인정해 주십시오. 군인 급여를 올리고 내무반을 바꿔주는 처우 개선도 중요하지만 사람이 죽고 사는 군 의문사는 외면한 채 외치는 군대 개혁은 거짓말이라고 저는 주장합니다.

그리하여 지난 9일, 국방위 소속 민주당 안규백 의원이 국정감사에서 밝힌 것처럼 '고위 공직자 아들 33명이 국적 포기로 병역을 면제받았다'는 이 나라에서 누구처럼 회피하지 않고 머리 빡빡 깎고 훈련소에 입대한 서민의 자식들과 그 어머니들이 더 이상 고통에 미쳐가지 않도록 해 줘야 합니다. 정말 이 같은 저의 외침에 화답해줄 대통령 후보는 없을까요?

2012년 12월 19일. 상설적인 '대통령소속 군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의 출범을 공약한 대통령 후보에게 저는 제가 가진 '신성한 주권'을 행사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길에 많은 분들이 동참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 군에서 자식을 잃고 고통 속에 사는 고 오동길 이병의 어머니를 비롯한 이 땅의 모든 어머니들에게 호소합니다. 죽지 말고, 절망하지 말고 자식의 명예회복을 위해 힘 내세요. 그 길에 저도 함께하겠습니다. 어머니.


태그:#군 의문사, #김훈 중위, #오동길 이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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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운동가, 재야인사 장준하 선생 의문사 및 친일 반민족행위자의 재산을 조사하는 조사관 역임, 98년 판문점 김훈 중위 의문사 등 군 사망자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저서-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오마이북),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돌베개), 다시 사람이다(책담) 외 다수. 오마이뉴스 '올해의 뉴스게릴라' 등 다수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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