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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섬 너머 어딘가는 캄보디아라는데...
 저 섬 너머 어딘가는 캄보디아라는데...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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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악!"
"엄마야!"
"꺄악!"

자갈길에서 터져 나오는 아이들의 비명 소리가 경쾌하다. 우리들은 자전거를 타고 좁고 구불거리는 오솔길을 따라 열대 원시림 한가운데를 달리고 있었다. 그러다 짧은 목재다리라도 나오면 그들의 비명 소리는 한 옥타브 정도 더 높이 올라간다. 그만큼 열대 원시림의 길은 상쾌하고 스릴 넘치는 재미를 주고 있었다.

오늘은 섬을 한 바퀴 자전거로 돌아보는 날이다. 4시간 정도가 예상되는 길이었다. 수경이와 도솔이는 배탈 설사로, 유진이는 감기몸살로, 희경이는 생리로 빠지고, 11명이 이른 아침 윤미네 게스트하우스에 모였다.

처음에는 강을 따라 숲길이 이어졌는데 드문드문 마을이 두세 번 나타났었다. 마을을 지날 때마다 동네 꼬마들이 놀고, 물소가 있고, 여행자의 타들어가는 목을 축일 수 있을 조그만 가게가 있었다. 그런 다음에 길이 섬 내륙으로 파고들며 급격히 좁아졌고, 지금과 같은 자갈길의 험한 코스가 나타난 것이다.

돈콘 섬 일주를 위해 자전거에 올라타는 아이들
 돈콘 섬 일주를 위해 자전거에 올라타는 아이들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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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두 번의 자전거 여행에서 사고가 있었던 관계로 걱정이 되긴 했으나, 아이들은 그 두 번의 사고 때문에 오히려 라오스에서의 자전거 타는 법을 익혀가고 있는 듯하다. 그들은 무인도를 탐험하듯 열대 원시림의 소로를 비명을 질러대며 울퉁불퉁 달렸다.

그렇게 두 시간 쯤 달려 도착한 곳이 '반항콘'이라는 마을이었다. 그곳에 옛 프랑스 식민지 시절, 섬을 가로지르던 철길의 종착역이 있었다. 철로의 흔적은 강물과 만나기 직전까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우리들은 자전거를 세우고 옛 철도역이 서 있었을 난간 위에 섰다.

난간 아래로, 말 그대로, 눈이 부시도록 멋진 풍경이 펼쳐졌다. 호수처럼 넓고 커진 강물 위로 푸른 햇살이 부서져 금모래를 뿌려놓은 것처럼 반짝거렸다. 그 금모래 밭 가장자리에서 작은 배 한 척이 흘러들었다. 아이들은 이번에는 비명 소리 대신에 탄성을 질렀다. 윤미와 하영이다.

"이모! 강이 바다처럼 예뻐요!"
"누가 그림을 그려 붙여놓은 것 같아요!"

그들은 섬과 강과 햇살의 아름다움을 그렇게 표현했다. 하지만 나는 강을 보며 폴짝폴짝 뛰면서 그 아름다운 풍경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아름다운 그들을 말로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다만 이날의 나의 일기에 아이들의 탄성 소리가 영화 속의 효과음처럼 경쾌했다고만 적혀있다. 그만큼 아이들은 자연의 아름다움에도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있었다.

금빛 번쩍이는 메콩강의 물빛
 금빛 번쩍이는 메콩강의 물빛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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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미와 서희와 나운이 등 몇몇의 아이들은 강가로 내려섰다. 강물에 손을 담그고 모래를 만지작거리다가, 급히 나를 부른다.

"삼촌! 삼촌! 여기 진짜 금이에요!"

그랬다. 강물 위에서 반짝이던 금빛이 진짜 금이었다. 모래를 손바닥에 쥐고 물속에서 살랑살랑 움직여주면 금빛이 선명하게 빛났다. 사금이었다.

"삼촌, 사금 이거 캐가도 돼요?"
"어떻게?"
"음… 힘들겠다, 히."
"손바닥에 두고 흔들어봐, 이렇게. 손에 묻었다."
"어? 진짜!"
"예쁘지?"
"네! 그래도 물에 있는 게 더 예뻐요."

사금은... 물속에서 더 예쁘다는 아이들
 사금은... 물속에서 더 예쁘다는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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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금은 그렇게 강물 속에 남고, 우리들은 다시 자전거를 타고 달렸다. 이번에는 리피 폭포가 목적지다. 섬에 단 하나뿐인 투어트럭이 들어오는 길이라서 그런지 비포장이긴 해도 꽤 넓었다. 우리들은 뜨거운 햇살 아래 피부를 태우며 신나게 달렸다.

그렇게 1시간쯤 달렸을까. 폭포 소리가 들렸다. 폭포는 웅장했다. 지난 여름에 왔을 때에는 완전 흙탕물이었는데, 건기인 지금은 맑았다. 하지만 그 웅장하고 절박하게 느껴지던 폭포수 소리는 그대로였다. 그렇게 리피 폭포의 절박한 소리와 함께 라오스에서의 마지막 날이 끝나가고 있었다. 나는 폭포 가까이로 내려갔다.

"삼촌, 거기 내려가도 돼요?"
"조심해서 내려와!"

쿠르르르. 폭포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그래서 눈앞에 보이는 폭포 속으로 빠져들 것 같았다. 또 아이들이 말하는 소리가 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여름엔 황톳빛... 겨울엔 옥빛...
 여름엔 황톳빛... 겨울엔 옥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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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촌, 여기 진짜 좋아요!"
"뭐라고?"
"진짜 좋다고요!"
"폭포가?"
"그게 아니고요!"
"그럼 섬이?"
"아니 라오스가 좋아요! 여행도요!"

정호처럼 나도 라오스가 좋다. 여행도. 그런데 오늘은 라오스에서의 마지막 날이다. 내일 아침이면 우리는 스무 시간 동안 버스를 탈 것이고, 그 다음날 새벽이면 태국 방콕의 어느 거리에 서 있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내일이면 차도 적고 소음도 적고 사는 것도 단순한 이곳 라오스에서의 짧았던 우리들의 삶과 여행은 어느새 과거형이 되는 것이다.

리피폭포 앞에서
 리피폭포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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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의 거리로 돌아온 후 아이들은 라오스에서의 마지막 시간을 보냈다. 마지막으로 라오 음식을 먹고, 기념품들을 사고, 남아 있는 라오 화폐를 다 쓰느라 군것질거리를 사 모았다. 돈이 제법 많이 남은 서희는 우리부부에게 저녁 식사 때 라오 비어 한 병을 시켜주기도 했다.

그리고 우리는 아시안컵 축구대회의 결승전을 보기로 했다. 해외여행지에서 관람하는 우리나라 국가대표 축구팀 경기는 여행에서의 또 하나의 별미로 기억되기 마련이다. 게다가 한일전이었다. 아이들과 함께 여행자 거리의 인터넷 카페와 레스토랑을 다 뒤졌다. 아리랑 TV와 KBS WORLD 채널이 잡히는 곳이 간혹 있었지만, 축구 경기를 중계하지는 않았다. 당연히 인터넷은 동영상 다운로드 속도를 감당하지 못했다.

보고자 마음을 정하고 나니 점점 더 간절해진 우리들은 길가의 가정집에서 TV 소리만 나도 들어가 보았지만, 허사였다. 결국 포기하고 숙소로 돌아가야 했다. 그런데 한 아저씨가 오토바이를 타고 게스트하우스까지 우리를 찾아왔다. 좀 전에 TV 소리를 듣고 들어가 보았던 그 가정집의 아저씨였다. 라오 말이어서 잘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TV에서 축구를 한다는 이야기는 분명히 이해할 수 있었다.

후후, 간절함이란 이처럼 벽촌의 제약도 언어의 장벽도 다 넘어서는 법이다. 우리 부부는 그 아저씨의 오토바이 뒷좌석에 타고 아이들은 오토바이를 쫒아 뛰었다. 순식간에 도착한 그 아저씨네 집, 하지만, TV에서는 축구를 하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는 왜 우리를 데리러 왔을까? 이 밤에 오토바이까지 타고서. 그는 열심히 무언가를 설명하지만 라오 말에는 쇠귀를 가진 우리로서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메콩강, 놀이터이자 빨래터
 메콩강, 놀이터이자 빨래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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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손가락 두 개, 아내가 아저씨의 손가락 두 개를 가리켰다. 그는 이야기를 하며 자꾸만 손가락 두 개를 펴보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새벽 두 시였다. 생방송이 아니라, 녹화방송을 그때 해준다는 의미였다. 아이들에게 의견을 물어보았다.

녹화방송을 보기 위해 2시까지 기다리느니 내일 아침 인터넷으로 결과를 확인하겠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그날 밤 축구 한일전을 보기 위한 해프닝은 그렇게 끝났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고마운 그 아저씨의 이름도 물어보지 못했다.

아이들은 축구 대신 남자와 여자로 나누어서 파티를 열기로 한 모양이었다. 사실 이것은 비엔티안에서부터 '발령'한 12시 이후 야간활동 금지 조항에 해당하지만, 아내와 나는 슬쩍 모른 채 하고 빠져주기로 했다. 라오스에서의 마지막 밤을 그들 나름대로 정리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또 그들이 큰 사고 없이 여기까지 와준 것만으로도 많이 고마웠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여행에 몰입하고, 현재의 시간을 맘껏 즐기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 이상은 나의 욕심이란 걸 나 역시 배웠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본 연재 기사는 <제민일보>에도 연재되고 있습니다. 기사 내용은 김향미&양학용 여행작가 부부가 지난 겨울 중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2학년까지 11명의 청소년과 2명의 대학생과 함께 라오스로 한 달 동안 여행한 이야기입니다.

이들의 저서로는 967일 동안의 세계여행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이야기를 묶은 <길은 사람사이로 흐른다>(예담)와 라오스 여행이야기를 담은 <시속 4킬로미터의 행복>(좋은생각) 등이 있습니다.



태그:#라오스, #여행학교, #시판돈, #돈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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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섬 제주에서 살고 있다. 나이 마흔이 넘어 초등교사가 되었고, 가끔 여행학교를 운영하고, 자주 먼 곳으로 길을 떠난다. 아내와 함께 한 967일 동안의 여행 이야기를 묶어 낸 <길은 사람 사이로 흐른다> 이후, <시속 4킬로미터의 행복>, <아이들, 길을 떠나 날다>, <여행자의 유혹>(공저), <라오스가 좋아>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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