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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전 유신선포때 탱크가 몰려오던 상황을 어제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해내던 이철 전 의원. 갑자기 눈물이 가득한 채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하고 있다.
 40년전 유신선포때 탱크가 몰려오던 상황을 어제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해내던 이철 전 의원. 갑자기 눈물이 가득한 채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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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이 없었거나 제가 그 집에 가지 않았다면 두 형제가 레코드가게 하며 오순도순 살지 않았을까. 제가 그 집에 숨어들면서부터… (두 분은) 유신정권에 희생됐지만, 저도 거기에 (책임을 느껴)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

이철 전 의원(65)은 '유신'하면 마음에 가장 남는 일이 '두 형제의 죽음'이라고 했다.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아래 민청학련)' 이름으로 유신 반대 시위를 일으킨 후 수배 중이던 때였다. 그는 평소 알고 지내던 레코드가게에 잠시 숨어 있었다. 이곳을 함께 운영하던 형제는 이 전 의원을 숨겨줬다는 이유로 구속당했다. 먼저 풀려나온 동생은 행방불명됐고, 형은 감옥에서 4년여를 살고 나와 '목우스님'이 됐다. 스님은 이후 미국에서 포교활동을 하던 중 사망했다.

이 전 의원은 "남들 눈에는 국회의원이 되는 등 화려한 길을 걸었다고 보일지 몰라도 제 선택이 아니었다"며 "그런 굴곡을 겪은 사람은 저뿐만이 아니란 게 더 문제"라고 말했다. "희생자는 몇천 배 몇만 배 있다"며 레코드가게 형제들처럼 집안이 아예 풍비박산된 사람들이 곳곳에 있다고 강조했다.

그 수많은 피해자를 낳은 것이 바로 유신시대였다. 이 전 의원은 17일 오후 서울 중구의 한 카페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정확히 40년 전인 1972년 10월 17일 유신이 선포됐던 상황을 떠올렸다. 40년이나 지난 일인데도 그의 목소리는 마치 어제 일을 말하는 듯 거침없었다.

탱크 소리로 시작, '터무니없는' 국민투표로 자리 잡은 유신체제

1984년 10월 26일 서울대에서 열린 유신 독재타도 기념대회
 1984년 10월 26일 서울대에서 열린 유신 독재타도 기념대회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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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9월 제대하고 막 복학했을 때였다. 당시 대학로에 있던 서울대학교 정문 근처에서 친구와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종로5가쪽에서 탱크 소리가 났다. 우리 때는 박정희 장군이 필요하면 수시로 군대를 동원했기에 참 익숙한 소리였다. 그래도 '무슨 탱크인가' 해서 달려가 보니 한 대는 서울대 쪽으로, 한 대는 광화문 쪽으로 계속 달리더라. 학교 앞에 멈춘 탱크는 시민들을 향해 포구를 겨눴다. 그게 유신의 시작이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조국의 평화와 통일, 그리고 번영을 희구하는 국민 모두의 절실한 염원을 받들어 우리 민족사의 진운을 영예롭게 개척해 나가기 위한 중대한 결심"이라며 이날 오후 7시를 기점으로 국회를 해산시켰다. 헌법 조항 일부의 효력도 정지했다. 이후 '유신헌법'을 만들어 11월 21일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이 전 의원은 "국민투표장에 가보니 누가 지시하지 않았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투표한 용지를 참관인에게 보여준 뒤 투표함에 넣고 있었다"며 "터무니없는 투표였다"고 말했다. 이 '터무니없는 투표'에 참가한 유권자의 91.5%가 유신헌법에 찬성했다. 마침내 박정희 대통령이 영구집권하는 길이 열린 것이다.

새 헌법에 따라 박 대통령은 입법·사법·행정권 모두를 장악했다. 이 전 의원은 "(폭군 등으로 유명한) 로마의 네로 황제나 중국의 진시황가 그런 권한을 가졌겠냐"고 질문을 던진 뒤 고개를 저었다. "현대에도 그런 권한을 가진 사람은 없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민청학련 사건 재판 때 군사법정에서 제 변호사가 '히틀러나 무솔리니도 이런 독재를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가 현장에서 구속됐다. 아마 법원 역사에도 유례없는 일 아닐까."

1974년 5월 27일 당국이 발표한 민청학련사건 명단
 1974년 5월 27일 당국이 발표한 민청학련사건 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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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것을 봤다고, 들은 것을 들었다고, 아는 것을 안다고 말할 수 없는 시대도 시작됐다. 이 전 의원은 "그때는 길거리나 다방, 학교에서 감히 '유신이 진짜 옳은 거냐'는 말도 꺼내질 못했다"며 "항상 주위를 둘러보며 중앙정보부 요원이나 경찰이 있는지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유신 선포일부터 반년여 동안 학교에는 휴교령이 내려졌다.

1973년 봄, '이렇게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친구들과 함께 유신 반대 시위를 준비한다. 마침내 10월 2일 서울대에서 유신 선포 후 처음으로 유신 반대 시위가 벌어졌다. 그날의 뜨거운 반응을 본 이 전 의원은 전국 규모의 시위를 계획했다. 그 결과 1974년 4월 3일 '민청학련' 이름으로 전국의 대학생들이 '유신 반대'를 외쳤다. 시위 자체는 성공적이지 않았지만 깜짝 놀란 정권은 수많은 사람들을 잡아들였다. 체포된 자만 1024명, 기소된 사람은 200명이 넘었다.

"수사관들은 '너는 짐승'이라고... 하도 맞아서 허위 진술서를 썼다"

민청학련 사건 이후 고등학생으로 위장해 도망다니던 이 전 의원은 한 달여 만에 붙잡혔다. 수사기관에 끌려가자마자 그는 모든 옷이 다 벗겨진 채 맞았다. 그 시절 구타와 고문은  "모든 수사기관들의 공통점"이었다. 이 전 의원은 "(수사관은 끌려온 사람을) 인간 취급 안 한다"고도 했다. "수사관들은 '너는 짐승이야, 물이 필요하면 나한테 애원하고 밥이 필요하면 굴복해'라고 했다"며 "하도 두들겨 맞아서 허위 진술서를 썼다"고 말했다.

"김상협 당시 고려대학교 총장을 오가는 사람이 많은 광화문에서, 그것도 붐비는 오후 4시쯤에 만나 500만 원을 받았다고 말이다. 누가 봐도 말이 안 되는데, 수사관들은 그걸 소중히 간직하더라(웃음). 나중에 (정부가) 그걸 써먹진 않았다."

이때 정부는 '민청학련이 국가를 전복해 공산주의 정권을 세우려했다'며 '민족지도부와 재일교포 적군파, 인민혁명당(아래 인혁당) 재건위란 배후조직이 있다'고 발표했다. '민족지도부'는 함석헌 선생과 윤보선 전 대통령이 꼽히는 등 모양이 그럴듯했다. 하지만 '재일교포 적군파로 지목된 다치카와 마시키는 이 전 의원과 동료를 인터뷰한 일본인 기자, 하야카와 요시하루는 통역에 불과했다. 인혁당 재건위로 붙잡혀온 8명도 사정은 비슷했다.

"'긴급조치 위반'으로 노란 딱지를 수의에 붙인 채 독방에 있을 때였다. 감옥에서 청소하고 밥 나르는 수감자가 오더니 공범이 들어왔다며 '서도원'이란 분이라고 하더라. 잘 모르겠어서 어느 학교 학생이냐고 물었더니 58살쯤된 노인이라고 했다. '노인 없어, 우린 다 학생이야'라고 말했다. 그분이 인혁당이란 이름으로, 저희 배후로 지목된 서도원씨다. 이름을 들어보거나 만난 적도 없던 분이었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완벽한 조작이었다."

1975년 4월 8일 오전 대법정에서 개정된 민청학련 인혁당 관련사건 피고들에 대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상고심 선고공판 모습
 1975년 4월 8일 오전 대법정에서 개정된 민청학련 인혁당 관련사건 피고들에 대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상고심 선고공판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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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학생들을 석방하라'는 여론이 뜨거워졌고 외신 보도까지 이어졌다. 박정희 대통령은 어쩔 수 없이 1975년 2월 '형집행정지'로 민청학련 관련자들을 석방했다. 사형선고를 받았던 이 전 의원도 이때 풀려났다. 하지만 인혁당 재건위 8명은 감옥을 나서지 못했고 그해 4월 대법원 상고가 기각된 지 18시간 만에 사형당했다.

감옥에서 나와 자유의 몸이 됐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이 전 의원은 "미국으로 유학 가라는 중앙정보부의 제안을 거부하자 고난의 길이 시작됐다"며 "복학도 안 되고, 아무 것도할 수 없게 됐다"고 말했다. 24시간 내내 경찰이 붙어 다니는 등 감시받는 일은 일상이었다. 도저히 생활이 안 돼 미국의 누나에게 가려고 했지만 그 또한 중앙정보부가 막았다.

이 전 의원은 이 모든 상황이 "저만 겪은 게 아니라 당시 사회분위기가 그랬다"고 말했다. 그는 "국민 대부분이 권리를 빼앗기고, 독재정권에 빌붙은 소수의 사람들조차 결코 행복하지 않았던 게 유신시대"라며 "다시는 그런 시대가 재연되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신시대 재연되지 않아야 하는데, 젊은 세대가 잘 몰라서 걱정"

이철 전 의원은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유신 기간 대부분을 퍼스트레이디로 보냈기 때문에 정치적 책임이 있다고 강조했다.
 이철 전 의원은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유신 기간 대부분을 퍼스트레이디로 보냈기 때문에 정치적 책임이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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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문에 그는 "박정희 딸이어서가 아니라 유신 기간 대부분을 퍼스트레이디로 보냈기 때문에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도 정치적 책임이 있다"며 "명백한 사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다시는 그런 아픈 시대가 이 땅에 재연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박 후보를 '이번엔(대통령감이) 아니다'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또 같은 맥락에서 "지금 이 사회의 중심인 젊은 세대는 5·16 쿠데타와 3선 개헌, 10월 유신 등이 의미하는 바를 거의 모른다는 게 굉장한 걱정"이라고 얘기했다.

"앞으로의 세대는 우리가 아니다. 우리가 더 잘 살고, 안온하게 생활하겠다는 게 아니다. 우리 후배, 아이들이……."

갑자기 이 전 의원의 말문이 막혔다. 유신시대에 대한 온갖 감정이 한꺼번에 솟구쳤는지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들이) 살아갈 땅이고 나라다."

그는 하던 말을 어렵게 마무리 지었다. 이 전 의원은 조금이라도 젊은 세대가 유신의 실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고 싶어 했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받은 배상금의 일부를 영화 <유신의 추억>(감독 이정황, 제작 M2픽처스) 제작에 보탠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를 만들자는 아이디어가 나왔을 때 무릎을 치며 찬성했다"던 그는 "영화가 잘 만들어져 젊은 세대 일부에게라도 (유신시대가) 잘 전달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유신의 추억>은 10월 23일 국회와 시청광장에서 열리는 시사회에서 처음 공개된다.

[이철은 누구?]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선고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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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 전 의원은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재학 중 '3선 개헌' 반대운동을 벌이다가 영장도 없이 군대에 끌려갔다. 그는 복학 후 민청학련을 조직, 1974년 4월 3일 전국적인 유신 반대 시위를 주도했다. 이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1975년 2월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그는 1984년 12대 총선을 시작으로 13대, 14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이기택, 노무현 의원 등 통일민주당 잔류파와 함께 '꼬마민주당'을 창당했고, 이후 노무현 전 대통령 등과 함께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에서 활동하다가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신한국당과 민주당의 합당에 참여하여 한나라당 소속이 되었다.

그러다 2000년 총선을 앞두고 자신의 성향과 맞지 않는다며 한나라당을 탈당, 정계를 떠났던 이 전 의원은 2002년 대선 당시 정몽준 국민통합21 후보 캠프에 참여하며 정계에 복귀했고, 정몽준 의원의 공조 파기 선언 이후 정 의원과 결별한 뒤 열린우리당에 입당했다. 2004년 총선에는 열린우리당 공천을 받아 부산 북·강서갑선거구에 출마했으나 정형근 전 의원에게 패했다.

2005년 6월 30일부터 2008년 1월 21일까지 한국철도공사 사장을 지냈고, 그가 재임 중이던 2006년 고속철도(KTX) 여승무원들 해고사태가 일어났다. 이 전 의원은 현재 '민청학련운동계승사업회' 회장으로도 활동 중이다.



태그:#유신의 추억, #이철, #박정희, #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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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정치부. sost38@ohm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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