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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섯 도솔이의 침묵, 감탄
 열여섯 도솔이의 침묵, 감탄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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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파삭에서 배를 타고 나왔다. 나루터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이번에는 로컬버스 '성떼우'를 잡아탔다. 시판돈에 있는 작은 섬 돈콘까지가 오늘 우리들의 여정이다. 시판돈은 '시'가 4이고 '판'이 천이고 '돈'이 섬이니 이른바 '4천섬'인데, 메콩 강 위에 4000여 개의 섬들이 흩뿌려져 있다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우리가 탄 성떼우는 말만 버스지 군용트럭처럼 트럭의 양쪽에 길게 앉을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걸 타고 3시간 동안 이동하는 일이 쉽다고 할 수 없으리라. 천막 사이로 바람이 불어 닥치고, 자리는 비좁고 딱딱해서 엉덩이는 아픈데, 귀까지 차 소리로 온통 멍해졌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그 상황을 뚫고 떠들고 논다. 아이들은 놀기 위해서 이 세상으로 온 존재들임이 분명하다. 그 외엔 다른 방법으로 그들을 설명할 길이 없다.

우리들은 시판돈의 초입에 해당하는 강변마을 나카상에 도착해서 다시 배를 탔다. 작지만 길고 날렵하게 생긴 배는 우리 일행을 7~8명씩 나누어 태우고 꽁무니에 달린 모터의 동력 소리와 함께 힘차게 강물을 갈랐다. 강물이, 대지를 향해 기울고 있는 태양 빛과 어울려 싱싱하고 예쁘게 빛났다.

거칠어지고 솔직해진 아이들 "아아... 좋다"

성떼우 3시간의 이동, 편하다고만 할 수 없지.
 성떼우 3시간의 이동, 편하다고만 할 수 없지.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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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 빛을 먹은 그 강물이, 우리 배가 만들어낸 파도를 넘실넘실 넘을 때마다 작은 별 몇 개가 반짝 물 위로 뛰어올라 대기 속으로 사라졌다. 제 자리를 모르고 머리 위까지 올라갔던 내 마음이 심장 아래로 회귀하는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평화롭고 고즈넉했다. 그때 한 아이의 낮은 목소리가 내 마음에 작은 파문 하나를 더 그려 넣었다.

"아아… 좋다……."

배가 작은 섬들과 수초들 사이사이로 달리는 동안, 좋을 때면 '진짜' '대박' 같은 센 단어들을 동원해 소리를 지르는 것만 알 것 같던 아이가 들릴 듯 말 듯 낮고 수줍은 언어 두 마디를 강물에 문득, 툭, 풀어놓은 것이다. 아… 좋다……. 그 아이의 좋아하는 그 마음이 내게로 건너와 내 마음 속에서 작은 파문이 되어 번져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나 역시 좋았다. 

그 앞에 앉은 다른 아이는 여행 초기에는 탁해 보여 더럽다고 말했던 강물에 스스럼없이 손을 집어넣고 그이의 맑은 눈빛을 밑밥 삼아 물살을 낚고 있다. 그 너머에는 또 다른 두 아이가 전날 우리가 참파삭 유적지에 다녀올 때 자전거를 타고 황톳길을 달리던 그 기분이 얼마나 좋았는지 새삼 이야기하고 있다.

차를 타고 갔더라면 그만큼은 멋지지 않았을 거라고 자기들끼리 다짐하는 말도 들려온다. 걷거나 자전거를 타는 것이 차를 타는 것보다 볼 것이 많다는 것, 또는 여행의 질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이 알아가고 있는 것이다. 점심 때에는 나루터 식당에서 아이들이 능청스럽게 앉아 밥을 먹고 있는데, 한 손으로 '조물딱 조물딱' 뭉쳐서 먹는 그 모습이 라오 현지인들처럼 그렇게 자연스러워 보일 수가 없었다.

상큼한 바람을 가르는 배 위에서
 상큼한 바람을 가르는 배 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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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어느 사이에, 아이들이 거칠어졌다. 정말이다. 저들 안에 저렇게 거칠고 원색적인 면도 있었나 싶다. 머뭇거림이 사라졌다. 자신들의 감정에 솔직해진 것이다. 야생의 맛이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그동안 너무 많은, 하지 말아야 할 것들로 둘러싸여 살아오는 동안 스스로가 만들어놓았던 어떤 멈춤과 통제의 경계선들을 이곳 열대의 강물에 조금씩 풀어놓고 있는 것만 같았다.  

섬에 도착하자 모둠별로 숙소를 구했다. 그동안 아낀 돈으로 '근사한' 호텔을 잡겠다던 희경이네 모둠은 뜻한 바대로 '온수도 콸콸 에어컨도 빵빵'한 다른 모둠에 비해 두 배나 비싼 호텔에 들어가 부러움을 샀다. 저녁에는 여행학교 아이들 모두가 한 자리에 모였다. 대들보 삼아 두 다리를 강물에 담근 역시 '근사한' 레스토랑이었다.

그곳에서 보는 돈콘은 작고 예쁜 섬이었다. 무엇보다 고요했다. 그래서일까. 강물 소리가 바람을 타고 나무와 숲과 마을의 집들과 길들을 모두 돌고 나서도 우리들 이방인의 가슴까지 흘러들었다. 마을 크기에 비하자면 여행자의 수가 그리 적은 것이 아닌데도, 섬마을은 전혀 시끄럽거나 들떠있지 않았다.

"집에 돌아가면 다시 머리가 복잡해질 것 같아"

선착장. 먼저 도착해 기다리는 아이들
 선착장. 먼저 도착해 기다리는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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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 위에 두둥실 떠 있는 호텔 객실들
 강물 위에 두둥실 떠 있는 호텔 객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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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우리 아이들은 사실 시끄러웠다. 그런데도 고요하고 은은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아이들은 끊임없이 재잘거렸지만 마을도 레스토랑도 변함없이 고요했다. 아이들의 소리가 강물 소리를 따라 졸졸 흐르다 스스로도 강물 소리가 되어 흘러가는 탓인지도 몰랐다.

그날은 저녁놀이 압권이었다. 강물 아래로 해가 빠져드는 모습은 차라리 비현실적이라고 느낄 만큼 아름다웠다. 파랗고 붉고 노란 기운이 야자수와 강물과 그 강물을 저어가는 배와 레스토랑의 외등에 차례대로 내려앉고 스며들다가 바람이 되어 사라져갔다.

우리들은 레스토랑에 앉아 저녁놀의 풍경 안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주문한 식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한 아이가 문득 우리들이 집으로 돌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그러자 아이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하나둘 자신의 심경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삶이 단순해서 좋았는데, 집에 돌아가면 다시 머리가 복잡해질 것 같아."

중학교 3학년인 도솔이다. 이곳에선 삶이 단순해서 좋았는데, 돌아가면 다시 복잡해질 것 같단다. 도대체, 이제 겨우 나이 열여섯인 이 아이의 삶이 왜 이렇게 복잡해야 하는 걸까? 내 마음도 그 아이처럼 다시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그러자 열네 살 수경이가 거기에 자신의 이야기도 얹어놓는다.

"여기서는 걱정거리가 없어 좋아요."

또 다른 한 아이가 그 말에 동조한다.

"여기 사람들은 걱정이 없는 것 같아요. 욕심도 없고요. 그래서 나도 걱정이 없어 좋았는데……."

역시 열네 살, 중학교 1학년 서희다. 거기까지 말하고 갑자기 우울해진 아이는 말을 더 잇지 못한다. 그 아이를 따라 그만 내 가슴까지 먹먹해지고 만다. 우리들은 이 아이들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걸까?

강 위의 레스토랑에서. '오늘'을 가슴 깊이 느끼며 환한 미소를 짓는 아이들
 강 위의 레스토랑에서. '오늘'을 가슴 깊이 느끼며 환한 미소를 짓는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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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는 이 작은 어깨에 무슨 걱정들을 그리 많이 짐져놓은 걸까? 나는 그 다음 순간에 다른 몇 아이들이 동시에 한숨처럼 작은 소리로 웅걸거리는 걸 들을 수 있었다. 정호와 영준이, 그리고 성호였지 싶다.

"돌아가기 싫다… 진짜로."

돌아가기 싫단다.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가기 싫단다. 돌아가면 고등학생이 된다고, 학원을 다녀야 한다고, 방학숙제가 폭풍이라고. 아이들은 지금 그들의 부모가 살고 있는 고국임에도, 그곳으로 돌아가기 싫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그 문장 그대로의 뜻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지만, 가슴이 아파왔다.

이제 열대여섯 살 먹은 아이들이 엄마아빠가 살고 있는 집으로 돌아가기 싫다고 말하는 나라가 세상에 얼마나 더 있을까? 그런 나라는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나라일까? 그런데,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나의 나라가 바로 그 나라라는 사실에 마음이 너무 아팠다.

그날 밤 나는, 삶이 다시 복잡해질 것 같아서, 걱정이 많아질 것 같아서, 단순해서 좋은 지금의 행복을 놓고 싶지 않아서, 집에 돌아가기 싫다는 아이들의 삶의 무게로 인해 그 고요하고 평화로운 섬에서의 밤을 참으로 무겁게 보내야 했다.

돈콘과 돈뎃 두 섬 사이 강물 위로 번지는 노을
 돈콘과 돈뎃 두 섬 사이 강물 위로 번지는 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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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준비하는 것만큼, 지금 이 순간에 아이들이 행복할 수 있는 것도 중요할 텐데, 하는 생각. 아니, 열네 살인 지금 그들의 삶이 행복할 수 없다면, 열여섯 살인 지금 그들이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다면, 수능시험을 치고 스무 살이 되고 대학생이 되면 과연 현재 자기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며 행복해질 거라고 말할 수 있기나 한 걸까?

대학에서 또 공부를 하고 스펙을 쌓고 취직시험을 치고 결혼을 하고 내 집으로 아파트 한 채를 마련하고 나면, 그때는, 과연 오늘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고 누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초등학생 때 놀고 싶었으나 미래를 위해 유예해 두었던 것들을 중학생이 되어서 정작 하면 재미가 없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또 중학생이나 고등학생 때에 하고 싶었던 것들을 대학 시험 이후로 미루어두었다가 막상 대학생이 되어 하고자 하면 이미 그날의 하고 싶었던 것들은 다 과거가 되어 흘러가고 대학생이 된 지금 현재 절실한 것들이 새롭게 생겨난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대학생 때에 하고 싶고 절실한 그것들은 또 다시 취직시험 이후나 승진시험 이후로 미뤄둬야 할지도 모르는 것이 오늘날 청춘들의 슬픈 자화상이다. 흔히 교육학자들은 인간은 발달 단계마다 욕망하는 바가 다르고 그 욕망을 그때그때 자기만족감으로 채워냄으로써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하지만, 만약 그렇지 못하면 건강하고 행복한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데에 문제가 생긴다고 지적한다.

즉, 사람은 나이에 따라서 하고 싶은 것들이 각기 다른데, 그것을 미래를 위해 유예하고 또 유예하는 사이에 내부로부터는 불만과 불행의 씨앗이 싹트게 된다는 뜻이리라. 말하자면, 결국 미루고 눌러온 욕망을 더 이상 억압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우린 그때서야 지나온 길을 돌아보고 길을 잃곤 한다.

하루가 저물어 가는 섬의 풍경
 하루가 저물어 가는 섬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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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랬다. 서른다섯의 나이에, 한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생산성이 높아야 할 그 나이에, 도무지 현실을 현실로 살아갈 수가 없어 길을 잃고 세상과 세상 밖 그 사이 어디쯤에서 부유하고 방황했다. 그 방황의 끝에서 발견한 깨달음이 '오늘을 살자'는 것이었다.

미래의 행복이란 것도 오늘의 행복에다 또 다른 오늘의 행복을 쌓아가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그 평범한 사실을 절반의 인생을 살아온 나이에야 알게 된 것이다.

그날 밤에 오랜만에 조장모임을 했다. 열여덟 살짜리 두 명에 스무 살짜리 두 명. 그들은 동생들이 진짜 돌아가기 싫어한다고 '증언'했다. 그들 역시도 돌아갈 날이 가까워 오는 것이 불안하다고 했다.

"돌아가면 고3이에요."

대한민국의 고3. 희경이와 윤미 이야기다. 아이들답게 자신의 싱싱한 삶을 기쁨으로 누리기에 우리 사회가 그들 어깨에 지운 짐이 너무 커 보였다.

나는, 궁금하다. 아이들이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고 행복하게 지내는 것이 동시에 미래를 위한 준비가 될 수는 없는 걸까? 삶이 그렇게 단순해서는 안 되는 걸까? 그런 걸까?

………여행을 떠나온 지 20일째가 되던 그날. 대한민국의 아이들은 여행의 현실과 한국에 두고 온 또 다른 현실 모두를 인식하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본 연재 기사는 <제민일보>에도 연재되고 있습니다. 기사 내용은 김향미&양학용 여행작가 부부가 지난 겨울 중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2학년까지 11명의 청소년과 2명의 대학생과 함께 라오스로 한 달 동안 여행한 이야기입니다.

이들의 저서로는 967일 동안의 세계여행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이야기를 묶은 <길은 사람사이로 흐른다>(예담)와 라오스 여행이야기를 담은 <시속 4킬로미터의 행복>(좋은생각) 등이 있습니다.



태그:#라오스, #여행학교, #시판돈, #돈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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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섬 제주에서 살고 있다. 나이 마흔이 넘어 초등교사가 되었고, 가끔 여행학교를 운영하고, 자주 먼 곳으로 길을 떠난다. 아내와 함께 한 967일 동안의 여행 이야기를 묶어 낸 <길은 사람 사이로 흐른다> 이후, <시속 4킬로미터의 행복>, <아이들, 길을 떠나 날다>, <여행자의 유혹>(공저), <라오스가 좋아>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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