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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은 기억박물관이다. 발전이 더딘 탓에, 사람들 관심에서 벗어난 탓에 오래된 풍물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간혹 골목을 거닐다 1960~70년대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받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낡았다' '고쳐서 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시각이 많지만 몇 백년 전 집과 길을 고스란히 간직한 유럽이나 미국의 유서 깊은 도시들을 보면서 감탄하는 우리나라 관광객들을 보면 완전히 수긍하기 힘든 측면이 있다. 좀더 애정을 갖고 바라보고 가꾸면 골목은 새롭게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오랫동안 골목을 탐험하면서 발견한 보물들을 여기에 소개한다. - 기자말

마라톤대회에서 한참 뒤처져 혼자 달리고 있는 선수. 살다 보면 이렇게 뒤처지기도 하고, 주저앉기도 한다. 이들에게 우리는 어떤 격려를 할 수 있을까.
 마라톤대회에서 한참 뒤처져 혼자 달리고 있는 선수. 살다 보면 이렇게 뒤처지기도 하고, 주저앉기도 한다. 이들에게 우리는 어떤 격려를 할 수 있을까.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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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3학년 때 고등학교 입시를 위해 체력장 시험을 치렀다. 턱걸이, 100m 달리기, 넓이뛰기와 함께 오래달리기가 있었다. 기억으론 4분 40초 이내에 들어와야 만점을 받았는데, 아슬아슬한 아이들이 몇 명 있었다. 그 가운데 한 명이 나였다. 당시 담임선생님은 모두가 오래달리기에서 만점을 받을 수 있는 묘안을 짜냈다. 전체가 줄을 맞춰서 달리는 것이었다. 제일 잘 달리는 아이가 앞장을 서고, 못달리는 아이를 가운데 뒀다.

이 방식은 두 가지를 노린 묘수였다. 우선 가운데 있는 느린 아이들은 전체와 보조를 맞추면서 힘을 낼 수 있었다. 또 하나는 시간상 이점이었다. 선두에 선 아이들만 4분 40초에 통과하면 나머지는 뭉쳐서 들어가기 때문에 몇 초쯤 늦더라도 괜찮았다. 몇몇 선생님들이 꼼수라며 눈총을 줬지만 담임선생님은 눈 하나 깜짝 하지 않았다.

운동장을 아마 다섯 바퀴 정도 돌았을 것이다. 세 바퀴 정도는 따라갔을 게다. 가운데에서 뒤로 밀려나다 네 바퀴째쯤부터는 무리에서 떨어져나갔던 것 같다. 결국 마지막 바퀴에선 나 혼자 외로이 달려야만 했다. 한 명도 낙오자를 만들지 않기 위해 선생님이 고민끝에 묘수를 만들었지만, 결국 나는 그 속에 들지 못했다. 무리와 함께 달린다는 게 버겁기만 했던 순간이었다. 그 때 그 순간은 운동장 밖에서 구경한 친구가 몇 번이나 들려줘서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 때로부터 대략 10년이 지나 체력을 기른 뒤 5km 달리기에 나섰다. 상위 10% 이내에 드는 성적을 기록했다. 대회에 참가하기 전부터 왠지 좋은 기록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무엇보다 몸이 가벼웠다. 10여년 전 그 때와는 다른 상태였다.

5km 달리기를 한 때로부터 또 대략 10년 정도가 지났다. 돌이켜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중학교 시절 1km를 4분 40초에 완주하기엔 내 체력이 너무 약했던 게 아닐까. 어쩌면 아무리 꼼수를 쓰고, 채찍질을 해도 탈락하는 사람이 반드시 나올 수밖엔 없는 게 아닐까. 탈락하는 사람이 안 나오게 만드는 것도 필요하지만, 탈락해도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기회를 주는 게 필요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골목을 누비면서 중학교 3학년 시절 나를 보게 된다. 도도한 흐름에서 탈락한 사람들, 어쩌면 애초부터 그 흐름에서 무관하게 살고자 했던 사람들. 살펴 보면 그런 이들도 꽤 많은 것 같다. 애초부터 출발선이 달라 한참 뒤에서 달려 이제서야 무리 가까이 따라붙은 사람들. 어쨌든 골목은 그런 사람들을 품었고, 골목에선 도도한 흐름에서 한 발짝 벗어난 이들의 마음을 읽게 된다.

시대 따라 달라지는 이름들, 사라지는 이름들

간판엔 시대가 녹아 있다. 한 때 동네가게들은 대부분 이름이 없었다. 언젠가부터 상회란 이름을 달더니, 다시 슈퍼가 대세가 됐다. 이젠 마트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간판엔 시대가 녹아 있다. 한 때 동네가게들은 대부분 이름이 없었다. 언젠가부터 상회란 이름을 달더니, 다시 슈퍼가 대세가 됐다. 이젠 마트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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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초등학교라 부르는 곳을 내가 다니던 시절엔 국민학교라 불렀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그 이름은 소학교였다.

시대가 바뀌니 학교 이름이 달라진다. 고등학교 이름 또한 시대와 함께 옷을 갈아입었다. 상업고등학교와 공업고등학교, 농업고등학교와 같은 곳들이 눈에 띄게 사라지는 중이다. 대신 인터넷고, 로봇고, 사이버고, 정보산업고와 같은 이름들이 옛 이름을 대신한다.

국가가 주도하는 곳들이야 이렇게 한꺼번에 이름을 바꾸지만 민간이 주도하는 곳은 다르다. 지역에 따라 더 빠르거나 더 느려진다. 골목은 느린 쪽에 속한다. 변화란 대로에서부터 시작되니 좁은 길로 이뤄진 골목에선 가장 더디게 변화가 다가온다.

어린 시절을 보낸 70년대 동네엔 간판이 없는 가게가 많았다. 어느 순간 상회란 이름이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여럿이 함께 장사를 하는 상업조합이란 뜻이니 상회란 꽤 거창한 이름이지만 동네 구멍가게들은 쉽게 상회란 이름을 달았다. 1920년대 우리나라 신문에 벌써 '상회'란 이름을 단 가게가 광고를 했으니 그 역사가 오래 됐다.

대서소란 이름은 거의 사라졌지만 그 역할은 고스란히 살아남았다. 이름과 역할이 동시에 사라지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이름만 바뀌는 경우도 있다.
 대서소란 이름은 거의 사라졌지만 그 역할은 고스란히 살아남았다. 이름과 역할이 동시에 사라지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이름만 바뀌는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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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재벌 또한 초창기 상회 형태에서 출발했으니 상회란 거대기업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골목을 다니면서 꽤 많은 상회란 이름을 봤다. 축복상회(서울), 현상회(강화), 헐타상회(부산), 신풍상회(삼척), 함안상회(마산) 등 골목이 있는 곳에선 아직도 상회를 어렵지 않게 발견했다.

읍이나 면 등 도시가 되지 못한 곳에서도 상회 간판을 쉽게 찾았다. 골목이 도시의 뒷길 또는 변두리에 해당한다면 읍이나 면 또한 도시와 비교하면 골목에 해당하는 곳이다. 도시 골목에서 보는 풍경들을 읍이나 면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건 우연이 아니다.

연쇄점이란 이름도 도시 골목이나 읍이나 면 단위에서 종종 보게 된다. 1970년 농협이 처음 만든 연쇄점은 당시로선 놀라운 체인형 가게였다. 농협이란 큰 금융기관이 주도했으니 동네 가게로선 화들짝 놀랄 만한 경쟁상대였다. 실제 동네 작은 가게들은 농협이 동네 상권 집어삼킨다며 크게 반발했다.

1980년에 이르면 전국에 1445개나 되는 연쇄점이 생길 정도로 번창한다. 1983년 연쇄점은 단일유통기구로선 매출이 국내 최대를 기록한다. 과연 1990년대 적자를 기록하며 몰락할 줄 그 당시 사람들은 알았을까.

지금 골목에서 보게 되는 연쇄점 간판에선 한껏 덩치를 키우며 달리다 갑자기 무림고수의 북풍한설 기술을 맞아 박제가 된 사내를 보게 된다.

초라하게 흔적만 남은 곳이 있는가 하면 대서소처럼 이름을 바꾸면서 성형에 성공한 곳도 있다. 지금 법무사나 공인행정사가 일하는 곳이 과거 대서소란 사실을 과연 얼마나 알까. 골목을 누비다 보면 그렇게 이름들이 사라지고, 때론 박제가 되고, 때론 영악하게 바꾼 모습들을 보게 된다.

기름집, 얼음집, 연탄집... 시대흐름에 밀려 사라진 이름들

참기름을 짜먹는 게 흔하던 시절 기름집은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가게였다. 이제 공장제 기름이 대세가 되면서 기름집은 가장 보기 힘든 가게가 됐다.
 참기름을 짜먹는 게 흔하던 시절 기름집은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가게였다. 이제 공장제 기름이 대세가 되면서 기름집은 가장 보기 힘든 가게가 됐다.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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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서소처럼 성격은 그대로인 채 이름만 바뀌는 경우도 있지만, 새로운 흐름에 밀려 아예 사라지는 경우도 있다.

참기름을 짜먹는 게 흔하던 시절 기름집은 가장 많은 가게 가운데 하나였다. 1973년 신경림이 쓴 농무란 시에서도 기름집은 꽤 친숙하게 다가온다.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1991년 대기업인 미원 두산 오뚜기식품 동원산업 등이 참기름시장에 진출하면서 기름집은 구시대 흐름이 된다. 시골 골목에서 간혹 기름집 간판을 보게 되지만 대부분 빈 곳들이다. 대기업이 끌고 온 변화바람은 너무 빨랐고 강했다. 일개 기름집들이 그 흐름에 맞서기엔 버거웠을 것이다.

얼음집 또한 1970년대까진 꽤 인기가 있었다. 조선시대까진 왕이나 일부 귀족들이 먹을 수 있는 귀한 재료가 얼음이었다. 근대에 들어서면서 보통 사람들도 여름 한 철 돈을 내고서 이따금씩 사먹을 수 있는 재료가 됐다.

1960년대 서민들은 얼음집에서도 얼음을 샀지만 길가에서 얼음을 파는 아이한테 얼음을 사기도 했다. 신문이나 잡지처럼 얼음을 팔던 시절이었다. 여름철이 되면 극장과 함께 여름피서지로 인기가 높던 곳 또한 얼음집이었다. 얼음을 팔던 사람들 콧대는 당연히 높았다.

냉장고가 귀해서 가능했던 일이었다. 1968년 국내에 보급된 냉장고 대수는 겨우 5만대였다. 냉장고 성능은 형편없었고, 그마저 서민들은 엄두도 못낼 정도로 비쌌다. 차라리 필요할 때마다 얼음을 사서 먹는 게 나았다.

대기업은 꾸준히 냉장고 성능을 높였고, 1980년대에 이르자 사람들이 만족할 만한 성능과 가격대의 냉장고를 만들어낸다. 1987년 냉장고 보유대수가 100가구당 85.5대에 이르렀고, 마침내 얼음집 시대도 막을 내린다.

여름철이 되면 비닐봉지를 들고 얼음가게 앞에 길게 줄을 서던 주부들은 이제 안방에서 편하게 얼음을 얼려먹었다.  우리집에 냉장고가 들어온 시기도 대략 그쯤이었다.

변화는 거의 한꺼번에 오는 듯하다. 기름집, 얼음집이 사라지던 시기 연탄집도 같이 내리막길을 걸었다. 동시에 대기업의 시대가 시작되면서 똑같은 상품들을 가정에서 똑같이 소비하게 됐다.
 변화는 거의 한꺼번에 오는 듯하다. 기름집, 얼음집이 사라지던 시기 연탄집도 같이 내리막길을 걸었다. 동시에 대기업의 시대가 시작되면서 똑같은 상품들을 가정에서 똑같이 소비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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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란 거의 비슷한 시기에 동시에 오는 듯하다. 연탄집이 사라진 것도 그 때쯤이었고, 다방이 커피숍에 밀리기 시작한 것도 그때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정미소와 방앗간이 사라진 것도, 양복점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도 그 때쯤이었던 것 같다.

사라지는 게 굳이 슬픈 일은 아니나 너무 빨리 사라지거나 채 준비도 못한 채로 사라지는 건 당혹스런 일이다. 제 발로 사라지지 못하고 떠밀려 사라지는 것 또한 치욕스런 일이다. 요즘 세상 모습이 그러해서 사라진 이들만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런 안타까움을 골목을 돌면서 많이 달랠 수 있었다. 세상의 정신없이 빨리 흘러가는 흐름과 달리 골목에선 시간이 더디 흘러갔다. 더딘 시간이 속 터지는 이들은 골목을 떠났고, 세상의 빠른 시간이 버거운 이들은 골목으로 기어들어왔다. 그렇게 세상은 대로와 골목이라는 두 개의 세상이 공존하며 굴러갔다.

양 세계가 서로를 침범하지 않고, 자유롭게 넘나들수만 있다면 그만큼 좋은 게 어디 있을까 싶다. 언제부턴가 골목세상이 부지런히 사라지는 중이다. 대로와 똑같은 세상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대로에서 한참 들어간 곳에서도 비슷한 길과 풍경, 얼굴 표정을 보게 된다.

아무리 채찍질을 해도 늦게 출발하고 싶은 사람, 빨리 뛰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는 법이다. 그런 사람들도 쉬고 놀 곳이 필요하지 않은가 싶다. 골목을 돌면서 중학교 시절 1km 달리기에서 홀로 떨어진 나를 발견했다. 그 시절 나는 1km 달리기에 실패했지만 한참 세월이 흘러 1km 정도는 거뜬히 뛴다. 세상에 사는 방식은 다 다른 법이다.


태그:#기름집, #얼음집, #연탄집, #대서소, #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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