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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도산 등산로 입구의 '보물' 석탑. 그러나 '천년 왕도' 경주에 있는 탓에 제 대접을 받지 못하는 비운을 겪고 있다. '소 꼬리보다 닭 대가리가 낫다'는 속담을 연상시키는 탑인 셈. 탑 오른쪽으로 문성왕릉이 보인다. 진흥왕릉과 진지왕릉은 문성왕릉 바로 뒤에 있지만 사진에서는 가려서 보이지 않는다.
 선도산 등산로 입구의 '보물' 석탑. 그러나 '천년 왕도' 경주에 있는 탓에 제 대접을 받지 못하는 비운을 겪고 있다. '소 꼬리보다 닭 대가리가 낫다'는 속담을 연상시키는 탑인 셈. 탑 오른쪽으로 문성왕릉이 보인다. 진흥왕릉과 진지왕릉은 문성왕릉 바로 뒤에 있지만 사진에서는 가려서 보이지 않는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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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열왕릉 오른편의 마을 안길을 걸어오르면 선도산 정상에 닿는다. 마을이 끝나는 지점, 등산로가 시작되는 지점에 네 분 왕의 무덤들과 보물 석탑 1기가 있다. 24대 진흥왕(540∼576 재위), 25대 진지왕(576∼579), 46대 문성왕(839∼857), 47대 헌안왕(857∼861)의 무덤 그리고 보물 65호인 '서악동 삼층석탑' 들이다.

진흥왕 앞의 '서악동 삼층석탑'은 법흥왕릉 옆에서 보고 온 효현리 삼층석탑 못지않게 신세가 처량하다. 서악동 산92-1 번지에 있는 이 석탑은 효현리 탑과 마찬가지로 당당한 보물일 뿐만 아니라, 진흥왕릉 옆을 지나 서악 정상까지 오르내리는 등산로 입구 잘 보이는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도 사람들의 눈길을 거의 받지 못한다. 국보가 수두룩한 경주에 태어난 게 잘못이다.

어디 그뿐인가. '신라의 광개토대왕'인 진흥왕의 무덤도 그가 쌓은 찬란한 역사에 견준다면 홀대를 받기는 마찬가지다.

진흥왕릉 앞에 현장학습을 온 아이들이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있다. 답사자들 뒤의 무덤은 진지왕릉. 진흥왕은 '신라의 광개토대왕'이라 불리는 개척 군주이지만 무덤은 그저 '추장' 수준이다.
 진흥왕릉 앞에 현장학습을 온 아이들이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있다. 답사자들 뒤의 무덤은 진지왕릉. 진흥왕은 '신라의 광개토대왕'이라 불리는 개척 군주이지만 무덤은 그저 '추장'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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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24대 임금 진흥왕, 540년부터 576년까지 36년 동안 왕위에 있었다. 그러나 재위 기간은 길지만 일곱 살에 즉위를 한 탓에 사망 당시 나이는 43세에 지나지 않았다. 영웅은 단명한 것인가. 18세(374년)에 임금이 되어 천하를 호령했지만 겨우 39세(412년)에 타계한  광개토대왕처럼 진흥왕도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진흥왕은 즉위 5년(544) 불교 공인 이래 사찰로는 처음 창건 공사에 들어갔던 흥륜사를 완공했다. 그리고 일반인이 출가하여 중이 되는 것을 허락하였다.

진흥왕, 일반인이 승려 되는 것을 허용

554년, 진흥왕의 신라군은 옥천 관산성 인근 구진벼루에서 백제 성왕을 사로잡아 참수했다. 당시 신라군의 지휘관은 김유신의 할아버지인 무력(신주 군주)이었다. 사진은 구진벼루 전경. 사진에서 강이 끝나보이는 가정 먼 곳에 성왕을 기리는 비가 세워져 있다.
 554년, 진흥왕의 신라군은 옥천 관산성 인근 구진벼루에서 백제 성왕을 사로잡아 참수했다. 당시 신라군의 지휘관은 김유신의 할아버지인 무력(신주 군주)이었다. 사진은 구진벼루 전경. 사진에서 강이 끝나보이는 가정 먼 곳에 성왕을 기리는 비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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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위 6년(545)에는 '국사란 임금과 신하들의 선악을 기록하여 후손들에게 보여 주는 것이니, 책을 편찬해놓지 않으면 어떻게 후손들을 가르치겠습니까?'라는 이사부의 건의를 받아 <국사>를 편찬했다. 역사서 편찬은 거칠부 등이 맡았다.

삼국사기는 '(576년 8월) 왕이 세상을 떠나 애공사 북쪽 봉우리에 장사 지냈다. 왕은 독실하게 불도를 신봉하였다. 말년에는 삭발을 하고 가사를 입은 채 생활하였으며, 스스로 법운이라는 법명을 지어 불렀다. 왕비도 왕을 본받아 중이 되어 영흥사에서 살았다'고 전한다.

진흥왕은 중국과 교역을 할 수 있고 기름진 들판이 넓어 나라의 세력을 획기적으로 도모할 수 있는 한강 일대를 고구려와 백제로부터 빼앗음으로써 신라의 통일 기반을 구축한 위대한 제왕이었다.

서울 북한산, 함경남도 함주군 황초령, 함경남도 이원군 마운령, 경남 창녕 등지에서 진흥왕이 영토를 개척하고 지방을 순시한 뒤 세운 기념 비석들이 발견되었다. 왕은 비석에 '태왕'이라 썼다. 그 이전의 신라 임금들은 누구도 그런 호칭을 사용하지 않았다. 진흥왕도 광개토'태왕'처럼 진흥'태왕'을 자부했던 것이다.

그러나 진흥'태왕'의 무덤은 간소하다 못해 초라하다. 빼앗긴 땅 만주 있는 광개토'태왕'의 무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다. 세월이 진흥왕을 잊은 것인가. 넓은 땅도 아닌 비좁은 산비탈에 웅크린 듯 나무로 에워싸인 '태왕'의 무덤은 보는 이의 마음을 안쓰럽게 한다.

백제보다 세지고, 대가야 멸망시키고
낙동강과 회천을 경계로 신라와 대립했던 대가야는 사다함을 선봉장으로 한 신라의 공격에 무너진다. 사진은 대가야 땅 개경포가 내려다보이는 낙동강의  풍경이다.
 낙동강과 회천을 경계로 신라와 대립했던 대가야는 사다함을 선봉장으로 한 신라의 공격에 무너진다. 사진은 대가야 땅 개경포가 내려다보이는 낙동강의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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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왕 이후 신라는 백제보다 강국이 된다. 성왕을 전사시키고, 대가야를 무너뜨린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진흥왕은 재위 15년(554), 관산성을 공격해온 백제 성왕을 전사시켰다. 이 싸움에서 백제는 좌평 네 사람과 장병 2만 9천6백 명을 잃었다.

삼국사기는 '백제군은 말 한 필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했다.'고 기록한다. 당시 백제의 좌평(지금의 장관)은 모두 8명이었으니 그 중 4명이 한 전쟁터에서 한꺼번에 죽었다는 것은 그만큼 관산성 일대 싸움에서 백제가 얼마나 큰 타격을 입었는지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이 싸움의 지휘관은 김유신의 할아버지 김무력이었다. 23년(562)에는 이사부를 시켜 대가야를 멸망시켰다. 선봉장은 사다함이었다. 왕은 1등공신 사다함에게 좋은 밭과 포로 2백 명을 상으로 주었다.

세 번이나 상을 사양하던 사다함은 밭은 군사들에게 나눠주고 포로들은 풀어 주어 양민이 되게 했다. 37년(576), 처음으로 원화(源花) 제도를 두었다. 원화는 화랑의 초기 형태로 두 명의 여성 지도자가 무리를 이끌었다. 그 해 8월, 진흥왕이 죽었다.


진흥왕릉, 기대보다 훨씬 작고 초라해

진흥왕릉 근처에 있는 진지왕, 문성왕, 헌안왕의 무덤들도 허술하기는 진흥왕릉과 다를 바 없다. 표석만 없으면 도저히 왕릉으로 여겨지지 않을 그런 규모다. 네 왕릉 모두 둘레가 45∼60m 정도밖에 안 된다. 무열왕릉이 100m, 그 뒤편의 서악 고분군 4기가 각각 100∼186m 둘레의 무덤인 것에 견주면 실제 규모는 1/4에 불과하다.

진지왕과 헌안왕은 불과 3∼4년 왕위에 있어 별다른 업적을 남기지 못했고, 문성왕은 18년간 재위했지만 장보고의 반란을 제압하고 청해진을 없앤 것 외에는 뚜렷하게 한 일이 없다. 그나마 청해진을 없앤 일은 그 이후 우리 역사에서 해양 진출의 기세가 수그러든 것을 볼 때 잘한 일이라고 평가할 수도 없다. 그래서 무덤들이 이토록 작은 것인가.

현장학습을 온 선생님과 다른 아이들이 진흥왕릉 앞에서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듣는 동안, 일부 아이들은 대열을 이탈해 진지왕릉 앞에서 고무줄 놀이를 하고 있다.
 현장학습을 온 선생님과 다른 아이들이 진흥왕릉 앞에서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듣는 동안, 일부 아이들은 대열을 이탈해 진지왕릉 앞에서 고무줄 놀이를 하고 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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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아니다. 진흥왕릉까지 너무도 왜소한 것을 보면 말이다. 안내판에는 이곳의 무덤 4기를 진흥왕 등의 것으로 '추정'한 사람이 추사 김정희 선생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른 왕릉에서는 이런 표현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 무덤이 진흥왕릉이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지증왕에 견주면 진지왕, 문성왕, 헌안왕은 그래도 운이 좋은 편이다. 신라에 우경(牛耕)을 처음 도입하고, 순장(殉葬)을 금지하였으며, 우산국(울릉도)를 국토에 편입시키고, 나라의 이름을 '신라'로 확정하는 등 혁혁한 업적을 남긴 지증왕(500∼512 재위)은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 진흥왕은 성에 차지 않겠지만 진지왕, 문성왕, 헌안왕들이야 무슨 불만이 있을까.

진흥왕릉에 고개 숙여 예의를 표시하고 드디어 선도산 정상을 향해 발을 옮긴다.


태그:#진흥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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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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