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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S 드라마 <넝쿨째 굴러온 당신>
ⓒ KBS

추석을 앞두고 아내가 시어머니, 그러니까 내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 토요일 아침에 10시까지 가면 되죠?"
"아니, 10시는 너무 늦고... 일어나는 대로 와라. 여기 와서 아침 같이 먹자. 장은 벌써 대충 봐놨으니까 일은 천천히 하면 돼."
"아침은 저희끼리 대충 먹으면 되는데..."
"그래도 일찍 와. 아침 같이 먹자."
"네... 어머니 그럼 10시 전에 갈게요."

내 아내와 내 어머니 사이의 대화는 가끔 이렇게 아슬아슬하다. 사실 아침 10시보다 더 일찍 가야 할 이유는 없다. 그래도 내 어머니는 내 아내에게 일찍 오라고 다그친다. 여기서 대화는 한 번 꼬인다. 아내 입장에서는 일찍 가서 시댁에서 아침을 먹느니, 차라리 아침을 굶거나 간단히 때우더라도 10시쯤 가는 편이 낫다. 게다가 장도 미리 봐두었다니 더더욱 서두를 이유가 없다. 그러니 내 어머니는 내 아내의 말대로 그냥 10시까지 오라고 하시면 될 일이다.

아내도 어머니가 일찍 와서 같이 아침을 먹자고 하시면, 그냥 그러면 될 일이다. 굳이 아침식사까지 차려주시겠다는데 안 먹겠다고 버틸 필요는 없다. 여기서 대화는 한 번 더 꼬인다. 어쨌든 내 어머니의 뜻을 거스르지 못한 내 아내는 결국 9시도 아니고 9시 반도 아닌, 그냥 '10시 전'이란 애매한 말로 타협을 제안한다.

만일 내 어머니가 여기서 '10시 전'이라는 타협안이 마음에 안 들어 다시 '9시'라는 구체적인 시간을 제안했다면 아마도 결론과 상관없이 두 사람은 전화를 끊고서도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것이다.

내 아내와 내 어머니의 관계를 지켜보는 나는 그래서 가끔 이렇게 조마조마하다.

아내의 임신, 남편과 아들 사이에서 갈등에 빠지다

최근 또 하나의 변수가 생겼다. 아내가 임신을 한 것이다. 결혼한 지 5년이 넘어 생긴 아이라 아내도 어느덧 노산 임산부로 분류되는 시기에 들어섰다. 하필 추석 명절 기간이 막 임신 11주째를 넘어서는 때다. 아직은 다소 불안정한 시기인 셈이다.

그래서 추석을 앞두고 나는 아내에게 이번 명절에는 친정에 가서 쉬겠다고 하면 아마 내 어머니가 허락해주실 거라고 먼저 말을 꺼냈다. 어머니가 먼저 얘길 꺼내실 지도 모른다는 근거 없는 말을 하기도 했다. 아내는 내 어머니가 절대 그럴 리가 없다며 시큰둥해하면서도 '그렇게만 된다'면 하고 바라는 눈치였다. 당연히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나의 순진한 생각이었다. 내 어머니는 오늘 내 아내가 먼저 전화를 걸어 '업무 시작 시간'을 잡을 때까지 아무 연락이 없으셨고, 10시까지 가겠다는 아내의 말에 조금 더 일찍 오라고까지 하셨다. 내 어머니에 대해 나보다 내 아내가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던 셈이다.

이제 내 아내는 추석 차례를 지내고 손님들이 모두 돌아갈 때까지 내 부모님의 집에서 꼼짝 없이 며느리 노릇을 해야 한다. 그것도 임신한 몸으로. 마음 같아서는 내 아내와 뱃속의 아이를 위해 연휴 내내 친정에 가서 쉬게 해주고 싶지만, 그러자니 이번엔 내 늙으신 어머니가 더 힘들어진다는 데에 생각이 미친다. 차마 아들 된 도리로 그럴 수가 없다.

이렇듯 세상의 모든 아들이자 남편들은 평생 사랑하는 두 여인, 어머니와 아내 모두의 가슴에 서운함을 안기며 남몰래 눈물을 흘려야 하는 슬픈 운명을 타고 난 존재다.

세상의 모든 딸이자 아내들, 처가만 가면...

 MBC에서 방영중인 드라마 <그대없인못살아> 한 장면. 극 중 민도역을 맡은 박유환(오른쪽)은 결혼과 함께 처가로 들어가 살게 된다. 자신을 못마땅해 하던 장모와 갈등을 보이기도 한다.
ⓒ MBC

그렇다면 세상의 모든 딸이자 아내들은 어떨까. 그녀들도 자신의 어머니(또는 아버지)와 남편 사이에서 갈등을 겪을까. 내가 보기엔 별로 그렇지가 않다.

물론 아내들은 시댁에서 며느리라는 고된 역할을 맡아 눈물 없이는 보낼 수 없는 시간들을 보낸다. 인정한다. 그리고 그런 아내의 모습을 남편은 안타깝게 지켜본다. 다시 얘기하지만 남편과 아들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하지만 아내들은 일단 시댁을 벗어나 친정에 가게 되면 그저 딸일 뿐이다. 아내로서 남편을 배려하려는 마음은 찾아보기 어렵다는 뜻이다.

남편들에게 무슨 배려가 필요하냐고 물을지 모르겠다. 아내들이 생각하기에 남편들, 그러니까 사위들은 처가에 가면 손가락 하나 까닥하기는커녕 오히려 씨암탉이나 받아먹으며 호강한다고 여길 테니까. 더구나 자신들이 시댁에서 며느리로서 어떤 대접을 받는지를 떠올리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이해한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다.

사실 사위들도 처가가 불편하긴 마찬가지다. 피붙이들끼리 오랜만에 만나 왁자하게 떠들며 어울리는 자리에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생물학적 타인이 아무렇지도 않게 끼어들어 함께 어울리기란 쉽지 않다. 나처럼 점잖고 말 수가 적은 사위인 경우 더더욱 그렇다.

술을 마신다 해도 시원하게 넘어가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마음 편히 흐트러지도록 마실 수도 없는 노릇이다. 마음 맞는 동서나 처남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그마저도 없거나 나이 차이가 많이 나면 마땅한 얘깃거리를 찾기도 어렵다. 거기다 나처럼 별로 내세울 것 없는 사위들은 씨암탉도 잘 안 넘어간다.

대개 남자들은 유전적으로 여자들에 비해 관계 맺기에 서툴다. 그렇게 타고 나지 않았더라도 우리 사회는 남자에게 관계 맺기보다는 다른 가치들에 더 몰두할 것을 요구한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그런 경향이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딸만 일곱인 집안에 사위 일곱이 모여 서로 존댓말을 써가며 내내 TV만 본다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영화 <가족의 탄생>(2006)에서도 새롭게 가족의 연을 맺고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온통 여자들뿐이지 않은가.

그러나 딸들은 이런 남편을 신경 쓰지 않는다. 그저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가 어머니 품에 안겨 온갖 어리광과 투정을 부리며 모처럼의 여유를 즐길 뿐이다. 여기에 더해 어울리지 못하는 남편을 구박하기까지 한다. 왜 그렇게 말이 없냐고, 남자가 왜 그렇게 처가 식구들하고 못 어울리냐고 말이다. 정작 자신이 시댁 식구들과 어떻게 지내는지는 생각도 안 하고 남편만 또 '못난 남자'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평소보다 배려가 필요한 명절

명절은 평소에 잊고 지냈던 결혼이라는 제도의 가려진 면을 드러내는 때다. 우리 사회에서 결혼은 엄연히 가족과 가족의 결합이라는 사실 말이다. 자신에게는 더 없이 편한 가족이 다른 이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일은 별로 어렵지 않다. 자신을 돌아보면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가족을 나의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일은 누구에게든 말처럼 쉽지 않으니까.

얼마 전에 끝난 KBS 드라마 <넝쿨째 굴러온 당신>을 보면서 나는 내 아내에게 '넌 저런 거 모르지'라며 행복한 줄 알라는 투로 아내를 놀리곤 했다. 물론 아내는 그럴 때마다 '며느리와 시어머니 사이는 다 똑같다'며 모르는 소리 하지 말라고 맞받아치곤 했다. 농담처럼 나눈 이야기들이지만, 정말 가족이라는 공동체 속으로 뛰어들어야 하는 명절에는 서로에게 조금 더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다. 남편에게도, 아내에게도, 또 며느리와 사위에게도 일일이 말로 털어놓기 힘든 불편함과 어려움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번 추석에는 남편은 아내의 표정을, 아내는 남편의 표정을 조금 더 주의 깊게 관찰해보는 건 어떨까. 아마 지금껏 모른 채 넘어갔던 미묘한 감정 변화와 바람들을 읽어냄으로써 서로가 서로를 조금 더 배려하는 따뜻한 추석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부디 서로가 서로를 조금 더 이해하는 추석이 되길 기대한다.


태그:#추석, #처가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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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옆 앞 '기찻길옆골목책방' 책방지기. 서울에서 태어나 줄곧 수도권에서 살다가 2022년 2월 전라북도 익산으로 이사해 지방 소멸의 해법을 찾고 있다. <로컬꽃이 피었습니다>(2021), <슬기로운 뉴 로컬 생활>(2020), <줄리엣과 도시 광부는 어떻게 마을과 사회를 바꿀까>(2019), <나는 시민기자다>(2013)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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