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게릴라칼럼은 시민기자들이 쓰는 총·대선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조어도(A)의 위치. B는 대만, C는 오키나와, D는 중국, E는 일본.
 조어도(A)의 위치. B는 대만, C는 오키나와, D는 중국, E는 일본.
ⓒ 중국 <최신세계지도집>

관련사진보기

일본은 한국을 상대로 "다케시마는 우리 땅"이라며 시비를 걸다가도(제1모드), 어느 순간이 되면 러시아를 상대로 "사할린주 쿠릴열도는 우리 땅인데"라며 울분을 토하고(제2모드), 또 어느 순간이 되면 중국·대만을 상대로 "센카쿠(조어도)는 우리 땅"이라며 결사적 태도를 취한다(제3모드).

이번에 전 세계가 목격한 것은 일본의 제3모드다. 이렇게 홀로 이웃나라들을 상대로 시비도 걸고 울분도 토하고 결사적 태도도 취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개인적인 느낌이기는 하지만 일본이 연기력도 훌륭하지만 체력도 참 대단한 나라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대만에서 북동쪽으로 약 190킬로미터, 오키나와에서 서남쪽으로 약 400킬로미터. 중국에서는 조어도, 대만에서는 흔히 조어대, 일본에서는 센카쿠라 부르는 곳. 이곳은 5개의 섬과 3개의 암초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에 대한 일본의 대응은 독도나 사할린에 대한 것과는 사뭇 다르다. 독도나 사할린은 남의 손에 있지만 조어도는 자신들의 수중에 있기 때문에, 조어도 문제에 관한 한 일본은 결사적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다. 남의 것을 빼앗으려 할 때보다는 자기 수중의 것을 지키려 할 때 좀더 전투적이 되기 마련 아닌가.

조어도 논란, 일본이 불리한 이유

그러나 일본이 아무리 맹렬히 싸운다 해도, 장기적으로 볼 때 불리한 쪽은 일본이다. 지금은 일본이 조어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지만, 이런 상태를 장기간 유지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렇게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지난 170년간 조어도를 둘러싸고 전개된 역사적 흐름 속에 있다. 

1840년 아편전쟁 때부터 중국을 직접 공략하던 서양열강은 1860년대 들어 전략을 수정했다. 중국 민중의 저항운동인 태평천국운동(1851~1864년)에 당황한 서양열강은 중국에 대한 직접 공략에 치중하기보다는, 중국의 주변을 공략하여 중국을 약화시키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이에 따라, 1860년대부터 중국을 둘러싼 티베트-미얀마-베트남-대만-오키나와-조선이 서양열강의 집중 공세에 노출되었다. 중국의 서쪽·남쪽·동쪽에 있는 이 지역들을 쭉 이으면 활 모양의 선이 된다. 편의상 이 선을 A라인이라 부르기로 한다. 1866년에 프랑스가 병인양요를, 1871년에 미국이 신미양요를 일으킨 것은, A라인에 대한 서구열강의 집중 공세 속에 이루어진 일이다.

이때 서양열강의 전략에 편승하여 동아시아 침략에 뒤늦게 나선 나라가 바로 일본이다.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전열을 정비한 일본은 1870년대부터 A라인에 대한 공략에 나섰다. 정확히 말하면, A라인 중에서도 동아시아 해역 쪽인 대만-오키나와-조선에 대한 침략에 나섰다.

일본이 1874년에 대만을 침공하고 1875년에 강화도 사건을 일으키고 1879년에 오키나와왕국을 강점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 생긴 일이다. 이 중에서 대만은 1894년 청일전쟁을 계기로 일본에 넘어갔다.

공중에서 바라본 조어도.
 공중에서 바라본 조어도.
ⓒ 위키피디아 백과사전 일본판

관련사진보기


A라인에 대한 일본의 관심은 동아시아 해역의 섬들에 대한 관심으로 구체화되었다. 일본이 조어도나 독도에 대해 본격적인 관심을 가진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일본은 오키나와에 거주하는 자국 국민이 1884년부터 조어도에 출입했다는 점을 근거로 청일전쟁 중인 1895년 1월에 조어도를 오키나와현에 편입시켰다. 당시 청나라는 청일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진 뒤였기 때문에, 일본의 조치를 문제 삼을 여력이 없었다. 

한편, 1696년 이래 독도 출입이 금지된 일본 어민들은 1883년부터 독도 출입을 재개했고 일본은 이를 명분으로 1905년에 독도를 자국령으로 편입했다. 중국이 힘이 없을 때 조어도를 편입한 것과 마찬가지로, 일본은 조선이 힘이 없을 때 독도를 자국 땅으로 만들었다.

이처럼 조어도를 포함한 동아시아 해양 지역이 일본의 수중에 넘어간 것은, 서구열강의 공세로 동아시아가 약해진 틈을 타서 일본이 이 지역을 집중 공략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아시아 국가들이 기운을 회복한 1945년 이후에는 이들 지역이 일본의 지배에서 해방되는 게 마땅했다. 한국·대만이 일본의 지배를 벗어나고 독도가 한국에 돌아온 것은 그런 흐름에 따른 것이었다.

오키나와와 운명을 함께한 섬

그런데 처음에는 이런 흐름의 영향을 받는 듯하다가 결국 받지 않은 곳이 있다. 조어도가 바로 그곳이다. 조어도의 동북쪽에 있는 오키나와도 마찬가지다. 이후 조어도는 오키나와와 똑같은 운명의 길을 걸었다. 

조어도는 일본의 패망과 함께 미국의 점령지가 되었다. 이곳은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의해 미국령에 편입되었다. 그런데 1967년 6월, 조어도 주변에 석유자원이 매장되어 있다는 보도가 나온 뒤부터 이곳에 대한 국제적 관심이 다시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중국·대만·일본이 이곳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하고 나왔다.

대만은 이곳이 대만섬의 부속 도서라는 점을 근거로, 중국은 조어도를 포함한 대만이 청나라 복건성(푸젠성) 관할이었다는 점을 근거로, 일본은 조어도가 자국령 오키나와현에 속했었다는 점을 근거로 영유권을 주장했다.

조어도 영유권을 미국에서 일본으로 넘긴 주역인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과 사토 에이사쿠 일본 총리.
 조어도 영유권을 미국에서 일본으로 넘긴 주역인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과 사토 에이사쿠 일본 총리.
ⓒ 위키피디아 백과사전 일본판

관련사진보기

이런 상황에서 1971년 6월 미·일 간에 오키나와 반환협정이 체결되었다. 이에 따라 이듬해인 1972년에 조어도가 오키나와와 더불어 일본에 다시 편입되었다. 중국·대만·일본이 영유권을 주장하는 상황 속에서 미국이 일본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대만에게 줄 수 있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이 시기에 이미 미국이 대만을 배반할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71년 10월에 대만이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지위를 박탈당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시기의 미국은 그 전처럼 대만을 중시하지 않았다. 

당시의 국제정세 하에서는 조어도를 일본에게 주는 것이 미국에 더 유리했다. 탈냉전으로 인해 세계 각지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약화되던 1970년대 초반에, 미국은 조어도와 오키나와를 일본에 넘겨줌으로써 일본의 충성심을 확보하고 동아시아 패권을 그럭저럭 지켜낼 수 있었다. 대만보다는 일본이 훨씬 더 안정적인 파트너라고 판단한 셈이다. 

미국은 안보리 상임이사국 문제로 대만을 실망시켰지만, 조어도·오키나와 양도를 통해 일본을 기쁘게 했다. 미국 입장에서는 대만을 실망시킴으로써 생기는 손실보다는 일본을 기쁘게 함으로써 생기는 이익이 더 크다고 판단한 것이다. 만약 미국이 아니었다면, 이 섬은 몇 십 년 전에 중국이나 대만의 수중에 들어갔을 가능성이 높다. 

지난 170년간의 흐름을 살펴보면, 조어도에 대한 일본의 실효적 지배와 관련하여 두 가지 판단을 도출할 수 있다.

첫째, 조어도에 대한 일본의 지배는 제국주의 침략의 일환으로 일어난 일이고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청산작업이 1945년 이래로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일본의 조어도 지배는 이런 흐름과 모순된다는 점이다. 일본이 1945년 이전의 식민지를 거의 다 상실한 점을 고려하면, 조어도와 오키나와를 여전히 점유하는 것은 좀 자연스럽지 않은 일이다. 

둘째, 1945년에 조어도를 내준 일본이 1972년에 다시 확보한 것은 일본의 자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미국의 지원에 힘입은 것이기 때문에, 일본이 조어도를 지키느냐 여부는 일본보다는 미국의 힘에 달려 있다는 점이다.

미국의 패권이 미치는 영향

이렇게 진작 내놓았어야 할 조어도를 미국의 힘에 의존하여 붙들고 있기 때문에, 미국의 패권이 약해지면 약해질수록 조어도에 대한 일본의 지배는 계속해서 흔들릴 수밖에 없다.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패권이 소멸하는 날에는 일본이 단독으로 조어도를 지켜야 하기 때문에 일본으로서는 훨씬 더 힘든 싸움을 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적어도 미국의 패권이 존재하는 한은 일본의 영유권이 비교적 안전할 것이라는 말이다. 중국이 일본의 조어도 영유권을 공격하는 것은 비단 일본만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미국까지도 공격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은 미국과의 전쟁에 자신감이 생기지 않은 한은 조어도 문제를 극단으로 몰고 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분위기를 유지하고자 주기적으로 이 문제를 이슈화하려 할 가능성이 높다.

한편, 미국은 일본이 중국을 지나치게 자극하지 않도록 조정하는 데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조어도 문제로 전쟁이 발발하면 자칫 그것을 계기로 미국의 동아시아 패권이 와해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이 점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이번에 미국이 중·일 양국을 조정한 데서도 잘 드러난다.

따라서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패권이 존재하는 한은 중·일 양국은 조어도라는 링에서 글러브를 끼고 경기를 할 것이다. 하지만, 미국이 동아시아를 떠나는 순간, 이 경기는 글러브 없이 맨주먹으로 치러지게 될 것이고 중국보다는 일본에 불리한 게임이 될 수밖에 없다. 


태그:#조어도, #센카쿠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