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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싸한 내음이 비엔티안의 거리에 넘실거린다
▲ 참파꽃.. 알싸한 내음이 비엔티안의 거리에 넘실거린다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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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비엔티안에서 사흘을 보냈다. 산골 오지마을에서의 하룻밤 다음에 이어진 여행루트가 극적인 반전처럼 느껴진다. 이곳에는 라오스에 와서 우리들이 처음 만나는 것들이 수두룩하다. 백화점이나 쇼핑센터와 대형슈퍼마켓 같은 것들은 물론이고 왕복 8차선 도로와 건널목 신호등이 또한 그렇다.

아이들은 오랜만에 접하는 도시의 번화함이 낯설면서도 반가운 모양이다. 도착한 첫날부터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돌아다닌다. 쇼핑을 하고, 베이커리를 들락거리고, 카페와 레스토랑을 공략한다. 한 번도 방문한 적 없는 이 도시에서, 특히 군것질거리를 찾아내는 그들의 능력은 거의 본능적 수준에 가깝다고 해야겠다.

그런데 비엔티안에서 처음 만나는 것이 또 있다. 한글 간판이다. 아이들은 한글 간판만 보면 신기하고 반갑고 기분이 좋아진다고 말한다. 아마도 해외여행을 해본 사람이라면 첫 여행길에서 접하게 되는 한글 간판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 잘 알 것 같다. 아내와 나의 경우에는 첫 장기여행에서 삼성이나 LG의 전자제품 판매점 간판을 보면 저절로 문을 열고 들어서곤 했다. 왠지 그 안에서 한국 사람이 기다리고 있어 나의 모국어로 반겨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심정도 이와 비슷할지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날 나는 일상으로부터 멀리 떠나온 이곳 비엔티안에서 그것이 무엇이든지 삶에 있어서 정말 간절하고 소중한 어떤 것에 대해 느끼게 되는 감성을 여행학교의 아이들이 발견할 수 있다면 감사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황금사원을 비추는 황금햇살이 눈부시다
▲ 기도하는 여인.. 황금사원을 비추는 황금햇살이 눈부시다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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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들의 야유회(?) 사진 찍기
▲ 파뚝싸이.. 스님들의 야유회(?) 사진 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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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모둠별로 '비엔티안'을 탐험하기로 했다. 아내와 나는 게스트하우스에서 느지막이 나와 비엔티안에서 가장 오래 되었다는 사원 하나를 돌아보고 점심을 먹기 위해 버스터미널 근처 쇼핑센터로 갔다. 그곳 3층에 우리나라처럼 푸드 코트가 있고, 다양한 라오스 요리와 함께 한국분식 코너가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상훈이와 하영이와 수경이와 도솔이와 서희를 만났다. 이제 그들은 가이드북에 나와 있지 않는 곳도 척척 잘 찾아다닌다. 반가운 마음에 내가 시침을 뚝 떼고 장난을 걸어본다.

"어…, 한국에서 오신 분들이신가 봐요?"

서희가 무슨 상황인가 싶어 눈을 끔벅이는 사이에 눈치를 알아차린 도솔이와 수경이가 얼른 장난을 받는다.

"그쪽도 한국분이신가 보네요. 두 분이서 오셨나 봐요? 여기 한국 음식 맛있나요?"

다시 아내가 장난을 이어간다.

"네…, 라오스 음식들도 맛있어요. 그럼… 우린 바빠서, 또 인연이 있으면 만납시다. 여행 재미있게들 하세요."
"인연? 흐흐흐…. 네~, 그쪽도 여행 잘 하세요."

수더분한 수도의 거리 풍경
▲ 길거리의 코코넛.. 수더분한 수도의 거리 풍경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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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아이들과 헤어지고 인터넷 카페에 들렀다. 라오스 여행 17일 만에 처음으로 메일을 확인했다. 원고 청탁이 하나 들어와 있고, 출판사로부터 첫 번째 책의 '날개 글'을 수정했으면 한다는 메일이 와있었다. 답글을 보내고, 블로그와 미니홈피를 둘러보다가 제주도 한
지인의 안부 글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라오스 어때요? 제주도는 지금 '개' 추워요. 대박 부러워요."

우린 더운데, 지금. 다른 이는 부럽단다, '개' 추워서. 재미있다. 누구는 추워서 부럽고, 누구는 더워서 웃기다. 그래서 삶이란 건 생각하기 나름인가 보다. '개' 추운 계절에 한 달 동안이나 여름날을 살고 있는 나는 그것만으로도 행복하다…? 기분이 슬며시 좋아진다. 집안 대청소하다가 오백 원짜리 동전 몇 개를 한꺼번에 발견한 기분이다.

산뜻해진 마음으로 라오스의 개선문 '파뚝싸이'에 갔는데, 푸드 코트에서 만난 아이들을 또 만났다. 이번에는 녀석들이 먼저 장난을 친다.

"아유~! 한국에서 오신 분들 또 만났네요."
"그러게요."
"우리 인연인데, 사진이나 함께 찍으실래요?"

그렇게 또 하나의 놀이가 만들어진다. 이름을 짓자면 '외국에서 처음 만난 한국사람 놀이'다. 그런데 아이들은 재주도 좋다. 어디에서 찾아냈는지 즉석 스티커 사진을 찍은 모양이다. 녀석들이 자랑삼아 보여주지만, 나는 딴청을 피운다. 

"야, 화질이 엉망이잖아."
"그래도 괜찮아요. 여긴 라오스고, 기념이니까. 흥, 그럼, 인연이 있으면 또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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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금사원에서 ...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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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찍는 풍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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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우리들은 인연이 닿아 다시 만났다. 물론 약속된 인연으로서, 야간 침대 버스를 타고 라오스 남부지역 '참파삭'으로 이동하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픽업트럭을 타고 버스터미널로 가는 길. 노랗고 큰 보름달이 떠올랐다. 한 나라의 수도라면 거대한 빌딩 숲이기 쉬운 점을 생각하면 쉽게 보기 힘든 풍경이다. 보름달은 비엔티안의 밤거리를 저공비행하며 우리 트럭을 따라왔다. 가끔 도시의 키 작은 그림자와 만나 상현달이 되고 초승달이 되면서도 멀리 달아나지는 않는다.

아이들에게 우리를 쫒아오는 저 보름달을 보고 소원을 빌면 이루어질 것이라 했더니, 유진은 두 손을 모으고, 정호는 그때서야 '어디어디' 하면서 보름달을 찾는다. 귀여운 녀석들. 그렇게 트럭 위에서 보름달을 보며 아이들에게 비엔티안을 떠나는 마당인데, 이 도시가 어땠냐고 물어보았다. 열여덟 살 희경이의 대답이다.

"차들이 빵빵 거리지 않아서 좋아요."

한 살 어린 성호가 맞장구를 친다.

"우린 매일 무단횡단을 하는 데도요."

맞는 지적이다. 그런데, 이건 뭐지, 이 느낌은…. 언제부터 희경이와 성호, 이 두 녀석의 장단이 이리 잘 맞았나? 게다가 둘이 순간적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좀…. 낮에 둘 사이를 눈 여겨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희경이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
▲ 라오스의 풍경을 담은 기념품.. ...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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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촌, 오늘 한국식당의 아주머니가, 우리 더러 몇 살이냐고 물어보시잖아요. 그래서 열네 살, 열다섯 살, 열일곱 살, 열여덟 살이라고 대답했거든요. 그런데 조금 있다가 또 오셔가지고 여행이 힘들지 않으냐고 물어보시더니, 음료수를 공짜로 주셨어요. 히히."

그 한국인 이민자 분의 마음을 알 것 같다. 어린 친구들이 자기들끼리 여행을 왔다고 생각하니, 놀랍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했을 것이다. 나도 맞장구를 쳐준다.

"음료수가 공짜라서 더 맛있든?"
"네!!!"

그러자 다른 모둠의 녀석들이 질세라 이야기한다.

"우리는요 파탓루앙(황금사원)에 갔잖아요, 한 여자 대학생을 만났는데 한국말 배우는 중이라면서 팔찌를 그냥 줬어요."
"그래? 음료수도 대접받고 팔찌도 얻고, 너희들이 이모랑 삼촌보다 낫네!"
"진짜요?"
"그래, 이제 '하산'해도 되겠다!"

윤미만 없는 사진
▲ 윤미네 모둠에서.. 윤미만 없는 사진
ⓒ 서윤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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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다. 아이들은 이제 뚝뚝도 잘 잡아타고, 구경도 잘 하고, 밥은 더 잘 챙겨 먹는다. 이래저래 우리 부부보다 낫다. 그들은 점점 더 여행에 몰입해가고 있다. 숙소를 구하는 것도, 식당을 찾아 헤매는 것도, 볼거리를 가려내는 것도 그들에게는 모두 '놀이'가 되었다. 여행을 즐기는 자기만의 노하우도 조금씩 쌓아가고 있는 중이다.

비엔티안에서의 요 며칠 이들 꼬마여행자들을 보고 있으면, 비로소 주어진 여행 프로그램에 참가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여행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두 번째 방문인 우리 부부가 발견하지 못한 것을 찾아내고, 우리 부부가 해보지 못한 것에 아이들은 뛰어들어 도전한다.

우리가 흔히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래서 더 모르는 것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이 때문인 모양이다. 여행이든 삶이든 너무 잘 알아서 보지 못하고, 너무 많이 겪어서 느끼지 못하는 역설의 이치를 나는 지금 아이들로부터 배우고 있는 중이다.

<아이들의 엽서>-신수경(열네 살)
아빠! 엄마! 효경아! 나는 바로바로 수경이랍니다. 하하핫!!!
정말 오랜만이지??!! 다들 나 보고 싶어 안달이 났을 거야…… 날 많이 걱정하고 있겠지만 정말 잘 살고 있어 ㅠㅠ.

여긴 먹을 곳도 정말 많아 ㅠㅠ. 그런데 여기 특징은 향신료가 많아서 내 입맛에 안 맞는 게 많지만 한국음식점이 의외로 많아서 너무 행복해 ^^

그리고 우리가 직접 숙소 구하는 것도 재미있고 내가 직접 돈 관리를 해서 책임감도 넘쳐나는 것 같아 ㅎㅎㅎ. 여행 오면서 얻고 가는 것이 너무 많아서 내가 한국에 오면 그땐! 중1 신수경이 아닌 성장한 중2 신수경이 될 것이야!! 기대해……

여행가기 전에 걱정했던 일이 정말 많았지만 라오스 사람들은 너무 소박하고 순수해. 그래서 라오스에서 좋은 인연을 갖고 남은 일정을 잘 보내고 한국 갈게~.

From Laos, Vientiane. 

덧붙이는 글 | 본 연재 기사는 <제민일보>에도 연재되고 있습니다. 기사 내용은 김향미 & 양학용 여행작가 부부가 지난 겨울 중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2학년까지 11명의 청소년과 2명의 대학생과 함께 라오스로 한 달 동안 여행한 이야기입니다.

이들의 저서로는 967일 동안의 세계여행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이야기를 묶은 <길은 사람사이로 흐른다>(예담)와 라오스 여행이야기를 담은 <시속 4킬로미터의 행복>(좋은생각) 등이 있습니다.



태그:#라오스, #비엔티안, #여행학교, #꼬마여행자, #배낭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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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섬 제주에서 살고 있다. 나이 마흔이 넘어 초등교사가 되었고, 가끔 여행학교를 운영하고, 자주 먼 곳으로 길을 떠난다. 아내와 함께 한 967일 동안의 여행 이야기를 묶어 낸 <길은 사람 사이로 흐른다> 이후, <시속 4킬로미터의 행복>, <아이들, 길을 떠나 날다>, <여행자의 유혹>(공저), <라오스가 좋아>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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