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타란 이탈리아어로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으로,  이정진과 조민수는 각각 그리스도와 마리아의 화신으로 그려져 있다.

피에타란 이탈리아어로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으로, 이정진과 조민수는 각각 그리스도와 마리아의 화신으로 그려져 있다.


구원을 향한 끝없는 인물의 변태

청계천의 한 영세한 공업사에 고리대금업자인 '강도'가 들어온다. 이제 막 사랑을 하려던 부부는 자신들이 가진 모든 것을 내놓는다. 여자는 자신의 몸까지 바치고자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고, '계약'대로 보험에 가입된 남자의 다리를 앗아간다. 절대 그들이 죽어선 안된다. 보험계약이 복잡해지기 때문이다. 강도의 노트에는 이런 채무자들의 이름이 한가득이다. 강도는 매일 그들을 찾아 길을 나선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하나의 주제에 대해서만 다루고 있다. 그것은 바로 '돈'이다. 그깟 500만원 때문에, 그깟 3000만원 때문에 그와 계약을 한 자들은 팔, 다리가 잘리는 고통을 겪는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을 그렇게 만든 강도를 저주하며 살아간다. 강도는 오히려 계약을 이행하지 않는 그들을 나무란다.

강도는 영화에서 악의 화신으로 그려진다. 계약을 통해 그들이 원하는 돈을 빌려주고, 열 배 그 이상을 가져가는 강도의 모습은 괴테의 소설 '파우스트'의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를 닮아있다.

이런 강도에게 어느 날 엄마라는 여자가 찾아온다. 강도는 그녀를 의심하지만 결국 그녀를 '엄마'로 인정하고 모정을 느끼기 시작한다. 영화의 2막이 시작된 셈이다. 연고가 없던 그에게도 '엄마'라 부르는 여자와 모자지간이라는 계약이 시작된 것이다. 가족이 생긴 그는 이제 고뇌하는 파우스트로 변태한다. 이러한 캐릭터의 변화는 '엄마'라 자칭하는 여자에게도 똑같이 나타난다. 그녀는 최초 성모 마리아의 모습에서 최후엔 파우스트의 그렌트 헨으로 변해간다. 영화는 분노에서 복수로, 복수는 동정으로, 그 동정은 다시 구원으로 끊임없이 탈피하는데 등장 인물들은 이 구원을 위해 끝없이 허물을 벗어간다.

자본주의에 자비를 베푸소서!

영화에서 강도에게 당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복수를 꿈꾸고 있다. 자신이 당한 수모를 어린 자식에게 들려주고, 어린 아이는 직접 강도를 찌른다. 불구가 된 한 남자는 강도의 보금자리까지 칼로 위협한다. 사람들은 김기덕의 영화가 잔인하다고 한다. 여자들은 기꺼이 몸을 팔고, 남자들은 마초적 폭력에, 다들 무언가에 홀려 있다. '피에타' 역시 이런 김기덕 영화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피비린내가 코를 자극하는 영상이 스크린을 지배한다. 또한 그는 사회폭로에도 일가견이 있다. 원조교제, 매춘, 인신매매 이전 작품들에서도 그는 사회부조리를 폭로하며 영화를 이끌어 가는 힘으로 구성했다.

이번 작품 역시 이전 그 어떤 작품들보다 사회 공동체의 파괴라는 무거운 주제의식이 극 전반에 깔린다. 돈 때문에 일을 하고, 돈 때문에 팔이 잘리면서도, 그곳은 이면의 설계자들에 의해 철거되어야 할 존재들, 그리고 건물에서 내려다본 청계천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다시 한번 주제의식을 공고히 한다.

김기덕 감독, 그가 직접 일을 하며 청춘을 보냈던 청계천의 실상을 대비시킴으로써 너무나도 명쾌히 자본주의와 개발주의가 속죄하기를 종용하고 있는 셈이다. 폐기물들이 널부러진 골목, 굳게 닫힌 셔터문 안에는 분명 모정과 사랑의 온기가 남아 있다. 하지만 자본사회는 끝내 그들의 셔터문마저 허락하지 않는다. 어쩌면 이러한 주제의식의 부각이 유치하다고 느껴질 때도 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현실은 영화보다도 잔인한 것을...

'할렐루야는 영원하리라'

이 영화는 결국 기독교적 낙관론으로 끝을 맺는다. 미리 말해두자면 피에타의 엔딩은 너무나도 아름답다. 종교와 예술, 철학이 지향하는 바가 같다면 피에타의 엔딩은 그 셋의 궁극점에 도달해 있다. 잔혹한 엔딩에도 그 아름다움에 박수칠 수 있는 이유다. 강도의 자기체념은 이미 앞서간 많은 성인들이 행했던 역사의 연장선에 있는 일이다.

이러한 자기체념은 비단 주인공에게만 나타나진 않는다. 남편이 불구가 되어 새벽부터 뻥튀기를 팔러 나가는 여인, 태어나는 자식의 양육비를 벌기 위해 기꺼이 팔을 잘라달라는 젊은 아빠, 모두 삶의 극단에서 자기체념을 안고 살아가는 인물이다. 때문에 자신에 의해 고통받았던 이들을 다시 돌아보는 강도의 모습에서 순례자의 모습이 엿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강도는 비로소 돈이 지배하는 야생의 차안에서 해탈의 경지인 피안에 이르게 된다.

강도의 각성 역시 모성이라는 '희생'을 맛본 후 시작되는 셈이다. 이런 각성의 과정은 지난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사마리아>, <빈집>에서와 마찬가지로 주인공의 동선과 눈을 통해 관객들에게 보여진다.

김기덕, 관객에게 길을 제시하다

어두운 곳에 갑자기 들어서면 우리는 아무것도 볼 수 없다. 하지만 시간의 경과에 따라 조금씩 주변이 보이기 시작한다. 얼마 전 김기덕 감독이 토크쇼에 출연한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변화를 위해 나왔다는 그의 모습에선 영화에서의 무거움이나 부담도 느껴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의 변화가 너무나 놀라웠다. 그의 영화가 주는 느낌은 항상 폐쇄적이다. 어딘가 삐뚤어져 있고, 모가 나 있다. 그가 제공하는 집들은 항상 외딴집이고, 주인공들은 혼자 생각한다.

하지만 그가 관객과의 소통을 포기한 적은 없었다. 투박하고 모 난 프레임 속에서도 끊임없이 폭로하고, 소통해왔다. 그의 말처럼 그는 항상 대중적이었다. 하지만 표현방식에 있어 대중들의 방법과는 큰 괴리가 있었다. 하지만 이번 영화는 분명 그런 소통의 폭을 넓히는 기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물론 잔인하기가 좀 덜 하다는 정도이지만 무엇보다 영화가 제공하는 이야기가 재미있다. 관객들이 어둠에 갇힐 때 헤매지 않도록 분명한 길을 제시해준다. 마지막에 그가 제시했던 붉은 동선은 잊혀지지 않는 영감이자, 큰 획이다. 다시 한번 그의 폭로에 찬사를 보내고 싶다.

라로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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