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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에서 두 대의 선풍기로 말리는 빨간 고추
 거실에서 두 대의 선풍기로 말리는 빨간 고추
ⓒ 정현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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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란다에서 말리는 빨간고추
 베란다에서 말리는 빨간고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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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고추를 거실에서 말리시네요."
"네 요즘 날씨가 날씨인지라."

우리 집 거실에 잔뜩 널려 있는 빨간 고추를 보고 컴퓨터 AS를 온 기사가 눈이 휘둥그레져 하는 말이다. 총각인 듯하니 놀랄만도 하지.

날씨가 이렇게 나빠지기 전 어느날이었다. 퇴근하는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어 나 밭에 거진 다왔는데 바쁘지 않으면시원한 물 가지고 고추따러 올 수 있어?" "그럼 당연히 가야지" 하곤 시원한 얼음물과 약간의 간식거리를 챙겨서 밭으로 갔다. 오후 6시가 넘었으니 빨리 고추를 따야했다.

폭염의 여름도 가는 세월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는지라 해가 짧아진 것을 알 수 있었다. 남편이 정성껏 가꾼 고추밭을 보니 탄성이 절로 나왔다. 나도 왔다 간 지 얼마 안되었는데 그새 고추가 저렇게 탐스럽게 익어가다니.

남편은 시원한 물 한잔을 마시자마자 "빨리 시작하자, 요즘 해가 금세 넘어가" 한다. "알았어. 그런데 가위를 가지고 올 것을 그랬나봐? 이거 일일이 손으로 어떻게 따지?" 사실 난 고추를 처음 따보는 것이었다. 남편은 "그냥 편하게 따" 한다. "고추나무 꺾어져도 괜찮은가?" "괜찮지는 않지만 할 수 없지. 처음 따보는 사람이 어쩌겠어?" 한다. 난 성심껏, 될 수있으면 고추나무가 다치지 않게 따기 시작했다.

탐스럽게 익은 고추들, "일일이 손으로 어떻게 따지?"

남편이 정성껏 가꾼, 빨갛게 익은 고추밭
 남편이 정성껏 가꾼, 빨갛게 익은 고추밭
ⓒ 정현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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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를 따면서 정말 이 세상에는 쉬운 일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새삼 실감했다. 남편은 저만치 갔는데 난 절반도 따지를 못했다. 그러면서도 어찌나 힘이 드는지. 하지만 열심히 하는 남편을 보니 나도 꾀를 부릴 수가 없었다. 나름 열심히 땄다. 그래도 역부족이었다.

"내가 딴 고추, 자루에 담을게. 자기는 계속 따." "그래 차라리 그게 빠르겠다." 하여 분업을 통해 일이 이루어졌다. 어느새 해는 서산으로 넘어갔고 어둠이 찾아왔다. 고추따기에 열중하다 보니 해가 넘어가는 것은 안중에 없었다.

평소 어쩌다 남편이 캄캄한 밤에 집에 오곤한다. 그럴 때마다 밭에서 시간을 보내고 온 것을 알고 있는 나는 "이렇게 컴컴한데 뭐가 보여?" 묻곤했었다. 막상 내가 그 시간에 그곳에 있어보니 남편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컴컴해진 주변은 보이지 않았지만 앞에 있는 채소들은 훤하게 보이고 있었으니.

탁자 위에도 소파 위에서도 말리는 빨간고추
 탁자 위에도 소파 위에서도 말리는 빨간고추
ⓒ 정현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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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를 집에 들여놓자 마자 돗자리를 펴고 그곳에 널었다. "내일 날씨가 좋았으면 좋겠다. 힘들게 농사 지은건데…" 그런 내말을 듣고 있던 남편이 기분이 좋은지 슬며시 웃는다. 하지만 무슨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다음 날부터 하늘은 흐리고 비는 오락가락했다. 도저히 밖에 널 수 있는 형편이 안되었다.

집안 구석구석 빈자리에는 모두 고추를 널어놓았다. 베란다, 새 장 위, 탁자 위 등. 어디든지 조금이라도 빈 공간이 있는 자리에는. 그렇게 널고 베란다 문은 아침부터 하루종일 활짝 열어 놓고 두 대의 선풍기를 교대로 돌렸다. 그래서인가 조금씩 말라 가는 느낌이 들었다.

선풍기 틀고 햇볕 쫓아다니며, 고군 분투 '고추 말리기'

1차 성공한 완전 태양초
 1차 성공한 완전 태양초
ⓒ 정현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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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에서도 처음 따온 고추는 성공적으로 말랐다. 그것도 꼭지를 따고 반으로 갈라 햇볕이 조금만 나도 그 햇볕을 따라 다닌 결과였다. 주말농장은 올해로 수 년째. 조금은 요령이 생긴 것이다. 남편에게 초록의 풋고추는 우리 먹을만큼 아주 조금만 따고 그대로 놔두라고 한 결과이기도 하다.그렇게 한 일주일 동안은 선풍기로 실내에서 고추와 씨름을 했었다. 마음속으로는 '제발 오늘은 해 좀 나라' 하며 중얼거리기도 일쑤였다.

실내에서 말린 탓에 가끔 상한 것도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버릴 수가 없어 함께 모아 오려서 많이 상한 것은 버리고 덜 상한 것은 다시 말리기도 했다. 이제 진정 농부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26일 햇볕과 바람이 좋은 날 아파트 앞마당에 널어놓은 빨간고추
 26일 햇볕과 바람이 좋은 날 아파트 앞마당에 널어놓은 빨간고추
ⓒ 정현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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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지난 일요일(26일) 간간히 햇볕이 났다. 한걸음도 바쁘게 아파트 앞마당으로 고추를 옮겨 널었다. 햇볕과 적당한 바람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가끔씩 나가 고추을 뒤척이기도 하고 햇볕을 쫓아다녔다. 그런 결과 고추가 많이 말랐다. 그러나 28일부터 태풍이 온다는 일기예보가 며칠 전부터 신문방송을 통해 예고되고 있었다 .

27일 월요일에도 잠시 널었지만 들락 거리면서 하늘만 쳐다보았다. 하늘이 조금만 컴컴해지면 비가 오려나, 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오면 비가 내리나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바람만 거칠게 불었고 비는 오지 않았다.

28일 드디어 태풍이 우리나라에도 상륙을 했다는 소식. "일요일같은 날씨가 이틀만 계속 되었어도 잘 말릴 수 있었을텐데' 아쉬웠다. 다시 거실과 베란다. 빈 공간에 고추가 널려있다. '만약 이 많은 것이 잘 안마르면 어쩌지?' 나도 건조기를 하나 사야하나?


태그:#빨간고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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