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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뒤꿈치를 살펴보는 채인석 시장
 발뒤꿈치를 살펴보는 채인석 시장
ⓒ 최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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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정말 일어나기 싫다. 이대로 두어 시간만 푹 자면 컨디션이 최상급으로 업그레이드 될 것 같다. 새벽 4시에 울린 핸드폰 알람 소리를 들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그대로 뭉기고 누워있으면 다들 나를 버리고 가겠지?

세수를 하고 대청으로 나왔더니 간밤에 사용한 이부자리를 개서 들고 방에서 나오는 채인석 화성시장과 마주쳤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간밤에 잘 잤느냐는 인사를 건넨다. 이부자리를 내려놓고 돌아서는 채 시장의 발뒤꿈치로 저절로 시선이 갔다. 그의 발뒤꿈치에 하얀 실이 길게 매달려 있었다.

어제 걸은 후유증이 물집으로 남았고, 채 시장은 바늘로 물집을 터뜨린 뒤 진물을 빨아내려고 그 자리에 실을 꿰어둔 것이다. 오래 걸어서 발에 물집이 잡히면 으레 하는 방법이다. 저 발로 오늘 일정을 소화하려면 꽤나 불편하고 아프고 힘들겠다, 싶었다. 하긴 내가 남 걱정을 할 때가 아니다. 내 발바닥의 물집이 그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새벽 5시, 오늘도 어김없이 채 시장은 파이팅을 목청껏 외치고 어둠이 잔뜩 웅크리고 있는 길로 나섰다. 오늘 국토대장정에 참여하는 사람은 채 시장을 포함해서 전부 3명. 나를 뺀 인원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침마다 1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채 시장과 행보를 같이 했지만 대부분 화성시로 돌아갔다. 태풍 볼라벤 때문이다.

포도를 재배하는 몇몇 사람은 강풍으로 포도가 전부 떨어지기 전에 수확을 서둘러야 한다면서 돌아갔다. 지난 2010년 태풍 곤파스 때문에 포도 농가들이 엄청난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미리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수확을 앞둔 포도들이 태풍에 전부 떨어져 엄청난 손해를 입었단다. 하우스와 비가림 시설이 전부 태풍에 날아가 버리기도 했다.

태풍을 막을 수는 없지만 손해는 줄여야 하지 않겠나. 오늘, 화성시청 공무원들이 동원돼 포도 수확을 도우면서 태풍 피해를 줄이기 위해 동분서주했다고 한다.

ⓒ 유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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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채 시장은 어젯밤 우리가 묵었던 영암군 영암읍의 녹색체험관을 출발해 나주시 청소년수련관까지 28km를 걸은 뒤, 곧바로 화성시청으로 복귀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태풍 볼라벤 때문이다. 엄청난 폭풍이 몰려오는데 자치단체장이 관내를 비우면 나중에 문제가 커질 수 있다.

그래서일까, 피로가 누적되어 다리가 묵직할 텐데 채 시장의 걸음은 어제보다 더 빨라졌다. 걸음을 옮기자마자 채 시장은 벌써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다. 그 뒤를 달리다시피 하면서 따라갔지만,  채 시장을 따라잡지 못했다.

나흘째 국토대장정 깃발을 들고 채 시장 곁을 꿋꿋하게 지켰던 박승권 화성시 새마을지도자협의회장이 채 시장 뒤를 빠른 걸음으로 쫓아가고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한진안씨가 두 사람을 놓치지 않으려고 걸음을 재게 놀리고 있는 중이었다. 나흘째 여전히 속도를 줄이지 않고 빠르게 걷는 채 시장도 대단하지만 그들 두 사람 역시 대단하다.

어제, 채 시장과 같이 걷다가 나가떨어진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 걷는 건 자신 있다고 큰 소리 치던 이들 몇이 시속 6km로 달리듯이 걷는 채 시장을 놓치지 않으려고 속력을 내다가 끝내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기도 했다. 페이스 조절에 실패한 것이다. 그래서 무리를 하면 안 된다.

발바닥에 밴드를 단단히 붙이고 양말을 신었더니 생각만큼 아프지 않았다. 하지만 시속 7km 가까운 속도로 달리듯이 걷는 채 시장을 따라잡기는 역부족. 오늘도 나는 내 페이스대로 타박타박 걷는다, 하면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채인석 시장과 일행이 힘차게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채인석 시장과 일행이 힘차게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 최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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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 시장의 국토대장정을 너무 쉽게 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늘 배낭을 짊어지고 '놀멘 놀멘' 도보여행을 다녔다. 대략 시속 4km의 속도로 걸으면서 세상 풍경을 구경하고, 길 위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거나 덕담을 건네면서 온갖 참견을 다했다. 급히 서둘러야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가끔은 동네 마실을 나간 것처럼 여유를 부렸다.

하지만 채 시장의 국토대장정은 그런 차원이 아니었다. 그가 내딛는 걸음, 걸음에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처음에는 그 의미가 쉽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가 걷는 것과 내가 걷는 것의 차이는 속도뿐이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는 시간이 흐를수록 정말 치열하게 걸었다. 걷는 속도가 늦춰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걷는 모습 역시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다.

"왜 힘들지 않겠어요. 정말 힘들어요. 근육도 아프고, 발도 아프고... 잠을 잘 자지 못해서 그게 제일 힘든데, 제가 힘든 티를 내면 다른 사람들이 더 힘들어하고 신경을 쓸 것 같아 힘들지 않은 척 하는 거죠. 저는 이 일(국토대장정)을 꼭 해내야 하는 절실한 이유가 있잖아요. 그래서 힘들어도 참고, 아파도 참는 거죠. 그래야 저를 응원하기 위해 먼 곳까지 오신 분들이 힘을 내실 것 아니겠어요?"

채 시장 일행은 어느 사이엔가 어둠 사이로 사라져 버리고 길 위에는 나 홀로 남았다. 4차선 도로의 갓길로 바짝 붙어 서서 걸었다. 이따금 차량들이 빠른 속도로 나를 지나쳐 갔다. 어느 정도 걸으니 발바닥의 통증은 사라지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통증도 익숙해지면 쾌감이 된다더니, 그런 걸까?

하늘의 변화가 심상치 않았다.
 하늘의 변화가 심상치 않았다.
ⓒ 유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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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5시부터 기운차게 길 위로 나섰지만, 결국 나는 걷기를 포기했다. 걷다가 이렇게 포기하기는 또 처음이다. 어제보다 더 빠른 속도로 걷는 채 시장과 거리가 너무 벌어지면 낙오자 신세가 되어 채 시장이 화성시청으로 떠나는 것을 보지 못할 것 같았다. 그 때문에 얼른 지원차량에 타라는 '강요'를 못이기는 체 하면서 받아들였던 것이다.

졸지에 참여자에서 관찰자로 입장이 바뀌었다. 오늘 하루만이라는 단서를 달았다. 물론 걷지 않은 것에 대한 변명이다.

채 시장은 태풍 볼라벤에 쫓기고 있었다. 볼라벤보다 앞서서 화성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의지가 작용한 탓일까. 오전 5시부터 걷기 시작한 채 시장이 아침식사를 하려고 걸음을 멈춘 건 8시 30분 즈음이었다. 그 때까지 그가 걸은 거리는 20km 남짓.

땀을 뚝뚝 흘리면서 아침식사가 마련된 장소로 들어선 채 시장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아침식사를 하는 채인석 시장 일행
 아침식사를 하는 채인석 시장 일행
ⓒ 유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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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식사는 국토대장정 첫날부터 냉동탑차 안에 온갖 부식거리와 취사도구를 챙겨온 윤통일 한국농업경영인 화성시연합회장이 직접 준비했다. 윤 회장은 채 시장 일행에게 먹이려고 직접 밥을 하고 동태찌개를 끓였다. 반찬은 김치와 김자반이 전부였지만, 꿀맛이었다. 고작 30분 남짓 걸은 나도 이런데, 20km를 걸은 이들은 오죽하겠나.

이제 남은 거리는 8km 남짓. 채 시장은 1시간 30분 정도면 그 거리를 다 걸을 것이 분명했다. 9시 30분, 다시 걸으려고 길을 나서는 채 시장은 마음을 다 잡으려는 듯 힘차게 파이팅을 외쳤다.

사위가 밝아올 때만 해도 태풍의 징조가 보이지 않았는데, 시간이 갈수록 하늘에 잿빛 구름이 늘어났다. 하늘을 뒤덮은 구름은 납작하게 엎드린 채 비가 되어 쏟아질 준비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바람이 조금씩 세게 불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졌다. 태풍이 올라오긴 오는가보다, 싶어졌다.

지원차량을 이용해서 나주시로 들어가 채 시장이 지나는 길목에서 기다렸다. 후텁지근한 바람이 불었다. 이윽고 저 멀리서 깃발을 든 박 회장과 채 시장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곳을 지나던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걸음을 멈추고 채 시장 일행을 바라본다. 채 시장의 걸음은 이곳에서도 조금도 늦춰지지 않았다.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는 내 앞을 빠른 속도로 지나친 채 시장은 어느 사이엔가 뒷모습을 보이면서 멀어져 가고 있었다.

나주시로 들어선 채인석 시장 일행
 나주시로 들어선 채인석 시장 일행
ⓒ 최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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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채 시장은 오전 11시가 채 되기 전에 일정을 전부 소화해냈다. 오전 11시를 2분 앞둔 시각에 나주시 청소년수련관 앞에 도착했던 것이다. 28km를 다 걸었다. 마무리 체조로 일정을 완전하게 마무리 한 채 시장의 얼굴에서는 끊임없이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태풍 볼라벤은 28일 오후 2시경에 화성시를 통과할 예정이라고 했다. 화성시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에 비상이 걸린 상황이다. 이런 때 자치단체장이 자리를 비운다면 나중에 문제가 될 수 있다. 채 시장은 "태풍이 별다른 피해를 주지 않고 물러나기를 바란다"며 "일단 화성시로 철수한다"고 밝혔다.

채 시장은 "태풍이 큰 피해를 입히지 않고 물러간다면 하루나 이틀 정도 화성시에 머물며 피해상황을 확인한 뒤, 다시 나주시로 내려와 국토대장정 일정을 이어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채 시장이 화성시로 돌아가면 채 시장과 함께 걸었던 박승권 회장과 한진안씨가 남아 국토대장정의 남은 일정을 이어갈 예정이다. 채 시장은 "다시 돌아오면 오늘의 목적지였던 나주시 청소년수련관부터 걸어서 먼저 출발한 이들을 따라 잡겠다"는 의사를 확실하게 밝혔다.

그리고 채 시장은 곧바로 화성시를 향해 떠났다. 현재 태풍 볼라벤은 일본 오키나와를 강타한 뒤 북상하고 있다. 나 역시, 철수했다. 현재 서울이다.

[국토대장정 ①] 8월 24일, 화성 원님, 522km 걷는 '개고생' 왜 선택했나
[국토대장정 ②] 8월 25일, 이게 무슨 국토대장정이야... 볼멘 소리 왜?
[국토대장정 ③] 8월 26일, 송산 포도 송이채 들고 따 먹으며 걷는 맛, 일품이네


태그:#채인석, #국토대장정, #볼라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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