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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일제치하에서 해방(1945)되고 1960년대 중반까지 한국의 초등학교(국민학교)는 대부분 졸업앨범을 만들지 못하거나 졸업생 단체사진으로 앨범을 대체했다. 그래서 그런지 1950~1960년대 앨범을 보면 50년 지기처럼 반갑고 정겹게 느껴진다.

문창초등학교 제3회 졸업앨범 표지. 학교 보관용이라 한다.
 문창초등학교 제3회 졸업앨범 표지. 학교 보관용이라 한다.
ⓒ 문창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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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은 전북 군산시 산북동에 있는 문창초등학교(교장 한상영) 제3회 졸업앨범 표지사진이다. 문창초등학교 전신은 1924년 10월 당시 일제가 '불이농촌(不二農村)'으로 이주한 일본농민들 자녀 교육을 위해 설립한 '불이공립고등소학교'이며 1945년 11월 문창국민학교로 개칭된다. 

단기(檀紀) 4281년(1948년) 6월, 가로 22cm, 세로 14cm(표지까지 13쪽)로 제작된 앨범은 두께가 초등학생 공책보다 얇지만 수많은 사연과 의미가 담겨 있을 것 같았다. 특히 누렇게 바랜 표지에 그려진 책과 꽃다발, 특히 남녀가 춤추는 그림은 당시 큰 세간의 이목을 끌었을 법하다.

아이의 귀여운 얼굴처럼 느껴졌던 태극기와 애국가
 아이의 귀여운 얼굴처럼 느껴졌던 태극기와 애국가
ⓒ 문창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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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넘기는 데 익숙해져서 그런지 앨범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넘기려니까 어색했다. 표지를 넘기니 예쁘고 앙증맞게 그려진 태극기가 먼저 눈에 들어오고, 애국가 악보 아래에 1절 가사가 적혀 있으며 2절과 3절은 별도로 적혀 있다(4절은 왜 없는지 궁금하다).

정부 출범 전이어서 그런지 태극기의 4괘 자리와 애국가 1절 가사가 요즘과 다른 부분이 많았다. '마르고 닳도록'은 '말으고 달토록'으로, '하느님'은 '하나님'으로, '보우하사'는 '보호하사'로 '삼천리'는 '삼철리'로, '보전하세'는 '보존하세'로 적혀 있었다. 오기(誤記)는 아닐 터이고 맞춤법이 지금과 달랐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공부대신 아주까리나 송진을 따러 댕겼지"

기관장 임명장을 떠오르게 하는 문창초등학교 1호 졸업장
 기관장 임명장을 떠오르게 하는 문창초등학교 1호 졸업장
ⓒ 문수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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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 말기 놋수저 하나까지 공출로 빼앗아 갔던 일제는 군산·옥구지역 지역의 초등학교 학생들에게도 집에 가면 부모에게 일본말을 가르치라고 지시를 내렸다. 또한, 일본인 농가 모심기와 방공호 파기에 동원되었고, 방공연습과 위문편지 쓰기 등으로 수업을 채웠다고 한다.

문창초등학교 1회 졸업생 문수남(81) 초대 동창회장은 "그 옛날 문창초등학교는 일본인 자녀와 일제에 협조하는 조선인 자녀만 다닐 수 있었다"며 "나도 멀리 떨어진 미룡초등학교에 다니다가 해방 후 학구제 개편으로 옮겨와 1년쯤 다니고 졸업했다"고 말했다.

문 회장은 군수 임명장 같은 졸업장을 보여주며 "공부 대신 피마자(아주까리)나 송진을 따러 댕겼고, 일본 헌병들이 타는 말에게 먹일 풀을 베러 댕겼다"며 어려웠던 시절을 회상했다. 1호로 발급된 그의 졸업장에서 당시엔 초등학교 졸업식을 6월에 치렀음을 알 수 있었다. 

격세지감 느꼈던 선생님과 졸업생 단체사진

일본식 본관 건물과 교장, 교감 선생님 사진.
 일본식 본관 건물과 교장, 교감 선생님 사진.
ⓒ 문창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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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수선했던 정국과 달리 편하게 느껴지는 선생님 단체사진
 어수선했던 정국과 달리 편하게 느껴지는 선생님 단체사진
ⓒ 문창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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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장 선생님 사진도 흥미를 끌었다. 지면이 부족해서 그랬겠지만, 교장실에서 근무하는 모습을 찍은 근엄한 사진 한 장만 들어가는 요즘과 달리 교장과 교감이 야외에서 촬영한 상반신 사진을 모교 전경과 함께 대각선으로 배치해놨기 때문이다.

현관 앞에서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 선생님들 단체사진은 누가 장난을 하느라 그랬는지 가운데 일부를 도려내서 아쉬웠다. 38선으로 한반도 허리가 잘리고, 좌우대립으로 사회가 혼란스러웠던 시국임에도 선생님들 표정과 패션이 자유 분방해 부담을 덜어준다.

사진은 전체적으로 활기가 넘쳤다. 여선생님 두 분은 파마머리에 무명 치마저고리 차림. 남자 선생님 열네 분은 양복, 노동복 등 다양하다. 앞줄 맨 오른쪽 선생님은 짧은 바지 사이로 내복이 보이고, 하이칼라 머리에 검정고무신을 신고 있어 씁쓸한 미소를 짓게 한다.

한 사람 한 사람에 이름을 적어 넣은 졸업생 단체사진.
 한 사람 한 사람에 이름을 적어 넣은 졸업생 단체사진.
ⓒ 문창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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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창회 명단에는 3회 졸업생이 59명으로 기록돼 있다. 그런데 몇몇은 모내기 철이어서 못줄을 잡아주느라 빠졌는지 55명(남 44명·여 11명) 얼굴만 보인다. 남녀학생이 함께 수업하는 광경과 자치회 하는 사진을 한 면에 담은 것을 보면 졸업생이 한 학급 규모였던 모양이다.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의 농촌 학교임에도 차림새와 표정이 궁색하지 않아 마음의 여유가 느껴진다. 65년 전 사진이니 지금쯤은 팔순을 넘긴 노인이 됐을 학생도 있을 터. 이름을 사진에 일일이 적어놓아 당시엔 어떤 이름이 유행했는지 확인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단체사진 뒤로 화단의 나무와 교실, 창문 등이 보이는데, 판자를 생선 비늘처럼 켜켜이 덧댄 판자벽은 일본식 건물임을 확인해주는 듯하다.

다정했던 급우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배움의 동무'라고 설명하고 있어 시대변화를 실감 나게 한다. '동무'는 1950년대 초등학교 1학년 교과서에 나올 정도로 정겹고 친근한 낱말로 통용됐으나 1961년 박정희가 5·16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후 어느 날 바람처럼 사라졌다.

졸업생들 수업광경(아래)과 자치회 모습(위)
 졸업생들 수업광경(아래)과 자치회 모습(위)
ⓒ 문창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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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 수업광경과 자치회 사진은 칠판의 메모를 통해 단기 4281년 4월 16일에 찍혔음을 알 수 있었다. '배움은 우리의 힘으로'라고 적어놔 학생들이 자습, 아니면 복습하는 모습을 촬영한 모양인데, 중학생도 풀기 어려운 '방정식'을 풀고 있어 놀라웠다.

일제가 이상향으로 꿈꿨던 농촌의 일본인 자녀들이 다닌 학교여서 그런지 넓직한 교실에는 난로가 놓여 있고, 벽에는 안내방송용 스피커도 달려 있다. 1950~1960년대 콩나물 교실에서 고생하며 공부했던 필자에게 넉넉한 책걸상은 질투심을 느낄 정도로 풍족하게 보였다.

학생들 클럽활동과 교내 행사를 소개하는 난에 가을운동회 사진은 없었다. 아직 체계가 잡히지 않은 탓도 있겠으나 3·1 만세운동(1919) 이후 조선인이 수백수천 명씩 모여서 치르는 학교 운동회는 물론 일반 체육행사도 일제가 적극 말렸기 때문으로 추측한다.

지금은 사라진 정원과 부속 교사(校舍)
 지금은 사라진 정원과 부속 교사(校舍)
ⓒ 문창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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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풍날 풍경. 간척지 제방으로 보였다.
 소풍날 풍경. 간척지 제방으로 보였다.
ⓒ 문창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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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으로 드넓은 들녘만 보였던 문창초등학교 학생들은 소풍을 간척지 제방이나 설림산 부근 은적사(隱寂寺), 큰수원지(월명호수) 등으로 다녔다고 한다. 월명호수는 일제가 군산 시민 식수 공급을 위해 연인원 10만 명을 동원해서 1912년에 착공, 1915년 준공된 저수지.

앨범을 보여준 한상영 교장은 "지금도 이 학교를 다녔던 일본인이 가끔 방문하고 있으며 1960년대까지만 해도 본관 건물 뒤편에 일인들이 조성한 정원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며 "규모는 작지만, 잔디가 좋아 학생은 물론 주민들 쉼터로 사용되다가 건물을 중축하면서 사라졌다"고 아쉬워했다.

광복절에 일제가 설립한 초등학교 총동창회 체육대회를 개최한다고 해서 구경 갔다가 우연히 손에 쥔 65년 전 초등학교 앨범을 뒤적이면서 한글 맞춤법 변화와 해방정국의 초등학교 실태, 일제강점기 치욕의 현대사를 되돌아볼 수 있었던 것은 큰 수확이었다.

아침조회 광경, 옛날 학교 근처는 모두 논이었다 한다.
 아침조회 광경, 옛날 학교 근처는 모두 논이었다 한다.
ⓒ 문창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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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이농촌'은 무엇?
불이농촌은 1919년 옥구군(군산시)에 농장을 설립한 일제가 영구 소작권 보장과 소작료 3년 면제라는 사탕발림식 광고를 내고 조선농민 3000여 명을 모집해 대규모 간척사업(1920~1924)을 벌여 농경지 2500ha(약 750만 평)를 개간, 본국에서 330여 가구를 이주시켜 조성한 마을이름이다. 공사에 참여하고도 빈농으로 전락한 조선 농민들이 사는 마을은 '옥구농촌'으로 불리었다.

일제는 불이농촌을 제2의 일본(新日本理想村)으로 만들기 위해 '불이공립고등소학교' 부설로 불이공립실과여학교(2년제)와 불이척식농사학교(2년제)를 세우고 일본인 자녀만 다니게 했다. 마을 이름도 이주민들 출신지 이름을 따서 히로시마촌, 야마가다촌, 나라촌, 사가촌 등으로 지었다.

또한 일제는 농촌을 윤택하게 한다는 미명하에 일본인 이주자들에게 무상으로 기와집을 지어주고, 쌀창고 수십 개를 짓는 등 온갖 특혜를 베풀었다. 열대자마을 부근에는 자전거포, 농기구상회 등 간척지대에 기초수요를 공급하는 시설을 집중적으로 설치한다. 불이농촌이 번창할수록 조선농민은 궁핍해져 초근목피로 주린 배를 채워야 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문창초등학교, #졸업앨범, #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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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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