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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살이가 힘들고 지칠 때입니다. 탐욕과 허울을 명예와 안락으로 여기던 착각에서 깨어나면서 줄 곳 느껴오던 것이죠. 수단이자 도구로 여기던 도시 모든 것으로부터 무관심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미쳐가는 존재를 지켜보려는 방어기제라고나 할까요? 모든 게 건성이고 어느 것 하나 눈에 찰 리 없죠. 그 서울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정겹고 팔딱거리는 생명으로. 티베트 고원 어딘가에 있다는 샹그릴라, 타지마할의 사랑이 깃든 갠지스 강 어디의 '딜쿠샤'가 되어서요.

세 번째 성곽여행은 가마 솥 더위가 채 가시지 않은 지난 11일 정오에 시작됐습니다. 소문이 좀 났는지, 참가 여행자가 늘었습니다. 초등학생부터 중년의 나이까지 열여덟이 창의문 아래 윤동주 시인 기념관 건너편 광장에 모였습니다. 동행자를 확인하고 늑장 부리는 이 뒷담화도 좀 하고 '시인의 언덕'을 오릅니다.

거대도시에서 횡재는 늘 예상 밖입니다. '시간 죽이기'로 덕수궁 돌담길을 걷다 서울미술관 '르네 특별전'을 발견하고, 전시회에 빠져들었던 때의 희열이라고 해둘까요. 여행 출발지인 '시인의 언덕' 모퉁이에 2주전 윤동주문학관이 문을 열었다는 겁니다. 화장실을 갔던 한 분이 가져온 정보였죠.

"여기 안 들어가요?"

처음엔 시집이나 유품 정도 진열한 그렇고 그런 전시관인 줄 알았습니다. 유작 시를 읽고 있는데, 직원 한 분이 전시실 끝에 폐쇄돼 보이는 육중한 쇠문을 열면서 영상 다큐실이 있다고 손짓합니다. '거기가 뭐, 볼 게 있겠냐?' 싶었는지 몇이 눈치를 보며 머뭇거립니다. 문화역사여행인데 왜 구경거리를 마다하리까? 느림보 여행이 준 '좋은 선택'이죠.

느림보여행 '횡재', 윤동주문학관

 8월 둘째 주 토요일. 세 번째 서울성곽여행을 시작했습니다. ‘노을빛이 곱다’는 자하문(창의문) 아래 열여덟이 모여 600년 전 건축한 한양도성 인왕산 구간을 탐방했습니다. 서울 속 나와 이웃을 알아보려고 나선 여행길입니다.
8월 둘째 주 토요일. 세 번째 서울성곽여행을 시작했습니다. ‘노을빛이 곱다’는 자하문(창의문) 아래 열여덟이 모여 600년 전 건축한 한양도성 인왕산 구간을 탐방했습니다. 서울 속 나와 이웃을 알아보려고 나선 여행길입니다. ⓒ 이규호 제공

 인왕산 꼭대기가 마주보이는 중턱에서 일행은 땀을 식혔습니다. 중종 내외의 애달픈 사연을 담은 치마바위가 지척인 곳에서 바리바리 싸온 오이, 방울토마토 등 과일을 꺼내 나눠먹으며 서울살이의 애환을 나눴습니다.
인왕산 꼭대기가 마주보이는 중턱에서 일행은 땀을 식혔습니다. 중종 내외의 애달픈 사연을 담은 치마바위가 지척인 곳에서 바리바리 싸온 오이, 방울토마토 등 과일을 꺼내 나눠먹으며 서울살이의 애환을 나눴습니다. ⓒ 이규호 제공

용도 폐기한 청운수도가압장과 물탱크를 개조해 만든 두 개의 전시실. 하나는 천정을 개방했고 또 하나는 폐쇄한 공간입니다. 시 '자화상'에 등장하는 '우물'을 형상화한 것이랍니다. '열린 우물'은 시간의 흐름과 기억의 퇴적을, '닫힌 우물'은 침묵하고 사색하는 공간으로 조성했다네요. 시인의 일생을 담은 10분짜리 다큐 영상도 볼만했습니다.

성곽길에 왜 '윤동주 시인의 언덕길'이 조성됐는지 궁금했는데, 연희전문 재학시절 이곳 누상동에 사는 소설가 김송 집에서 하숙하며 인왕산에 올라 시정을 다듬곤 한 흔적을 종로구가 발굴해 놓은 것이랍니다. 시인은 거기 하숙하며 '별 헤는 밤', '자화상', '쉽게 씌워진 詩' 등을 썼다죠.

좋아하는 싯귀 하나 떠올랐습니다. "가슴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헤는 것은/ 쉬이 아츰이 오는 까닭이오/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오/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하나에 어머니, 어머니..."(별헤는 밤 중에서)

인왕산 산행을 시작하고 10분이나 됐을까요. 참여자 한 분이 못 가겠다고 합니다. 몸이 안 좋다는 핑계였죠. 친구 따라왔는데, 고민하다 그냥 따라나서긴 했는데 힘들어서 더는 못 오르겠답니다. "초등학생도 있는데 너무하는 것 아니냐"며 반강제로 설득해 힘겹게 올랐습니다.

40여분 쯤 지났을 겁니다. 서울 도심과 한북정맥을 잇는 북악산 줄기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더위에 지친 일행 가운데서 탄성이 터져 나오고, 일행은 잠시 땀을 식히기로 했습니다. 인왕산 정상이 코앞이고, 서북쪽으로 기차바위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 오이에 과일 등 바리바리 싸온 음식을 하나 둘 꺼내놓으니 잔칫상이 따로 없습니다.

치마바위, 그 슬픈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중종반정으로 폐비가 된 신씨. 임금이 쫓겨난 신씨를 그리워한다는 소식에 폐비는 궁궐에서 입던 빨간 치마를 아침마다 경복궁에서 올려다보이는 인왕산 능선 바위에 걸쳐뒀다고 합니다. 반정공신들의 등쌀에 보고픈 왕비·지아비를 그리워하면서도 서로 만나지 못했을 임금과 폐비의 애처로움이 전해옵니다.

별 하나에 사랑과 쓸쓸함과...

 인왕산 정상에서 바라본 서대문쪽 곡장 성곽. 저 아름다움에 반해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고, 저산 넘어 서대문 쪽에 궁궐을 짓자고 했답니다. 그래선지 산 넘어 국사당이 자리산 신비한 계곡엔 수많은 토속신앙인들이 모여 있답니다.
인왕산 정상에서 바라본 서대문쪽 곡장 성곽. 저 아름다움에 반해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고, 저산 넘어 서대문 쪽에 궁궐을 짓자고 했답니다. 그래선지 산 넘어 국사당이 자리산 신비한 계곡엔 수많은 토속신앙인들이 모여 있답니다. ⓒ 이규호 제공

 우백호 인왕산. 주산인 북안산에 2미터 낮은 서산. 조선왕조시절에도 민주화된 지금에도 권력안위를 위해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곳입니다. 감히 임금을 내려다본다해 절을 폐쇄하고 통행을 금했던 조선. 신분의 귀천이 사라진 지금도 거기는 권력을 지키는 보루로 일반인에게 발길을 쉬 내주지 않습니다. 궁궐, 이젠 신무문 밖 청와대를 보호한다면서.
우백호 인왕산. 주산인 북안산에 2미터 낮은 서산. 조선왕조시절에도 민주화된 지금에도 권력안위를 위해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곳입니다. 감히 임금을 내려다본다해 절을 폐쇄하고 통행을 금했던 조선. 신분의 귀천이 사라진 지금도 거기는 권력을 지키는 보루로 일반인에게 발길을 쉬 내주지 않습니다. 궁궐, 이젠 신무문 밖 청와대를 보호한다면서. ⓒ 이규호 제공

조금 더, 조금만 더, 부추겨 마침내 오른 인왕산 꼭대기. 한양도성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북악, 인왕, 낙산 그리고 남산을 잇는 한성. 아늑하게 자리한 서울(한양). 무학대사와 정도전이 계룡산을 마다하고 이리로 달려온 이유를 첫눈에 느낄 수 있었습니다.

북악을 주산으로 하느냐, 인왕을 주산(서대문 쪽에 궁전이 들어설 뻔)으로 하느냐를 두고 정도전과 무학대사가 벌였다는 논쟁. 정도전이 이겨 한양도성이 세워진 까닭도 쉬 확인할 수 있고요. 무학대사는 '득수'(得水, 궁궐 아래 한수 확보) 이점을 봤지만, 도성을 차릴 공간이 협소했던 걸 간과했든 것입니다.

성곽여행 세 번째, 볼거리 최고라는 말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왔습니다. 궁궐(경복궁)을 중심으로 한 서울 중심부가 한눈에 들어오고, 주변 내사산과 그 사이 협곡 넘어 이어지는 부도심이 일목요연하게 파악됩니다. 물 흐름, 산 이어짐 모두가 오묘합니다.

여행자들은 자기 사는 곳과 이웃마을 그리고 여기저기를 살피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호들갑입니다. '저기 어디야?', '저게 광화문이야', '아니, 그럼 저긴 숭례문?', '애고, 우리 동네는 뵈지도 않네.' 서울 구석구석을 머릿속에 담은 여행자들은 하산을 시작합니다.

독립문 쪽으로 이어진 곡장(曲墻, 구불구불한 성곽). 넋 놓고 한참을 응시했습니다. 그 너머 신비한 계곡. 국사당과 선바위·얼굴바위·모자바위·해골바위 등 범상치 않은 모습들을 보며, 토속 신앙인들이 모여 사는 이유를 알아챘습니다. 남산의 '목멱신사'가 일제강점기 '조선신궁'에 자리를 내주고 이 골짜기로 강제 이주당한 역사가 애처롭습니다.

서대문 쪽으로 내려가는 성곽 바깥 길. 옥잠화, 싸리나무, 소나무, 회화나무 등이 빼곡한 도심 숲길을 걸으며 여행자들은 감탄사를 연발했습니다.

"세상에 서울에 이런 길도 있네."

성곽여행에 나선 즐거움 중 하나. 사직터널 위까지 이어진 한적한 길, 시골 어디선가 한 번 지나친 듯 '기시감'을 부르는 길...

권율장군 집터와 그가 심었다는 은행나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도왔다는 이유로 옥살이에 강제 추방된 UPI통신사 한국특파원의 집 '딜쿠샤'(이상향, 힌두어), '울밑에 선 봉선화'로 유명한 작곡가 홍난파 가옥을 돌다 여행자들은 문득 허기를 느낍니다. 오전 11시에 시작해 오후 2시를 넘기고 있었으니까요.

'치마바위' 슬픔 절절한 인왕산

 인왕산을 내려와 무악동 어딘가 성곽 바깥으로 난 길. 여행자를 감탄케 한 아늑한 숲길입니다. 도심에 어울리지 않게 자연의 생명이 살아 숨쉬고 있었거든요. 꼭 어디선가 본 듯한 ‘기시감’에 사로잡혀 일행은 고된 줄도 모르고 걸었습니다.
인왕산을 내려와 무악동 어딘가 성곽 바깥으로 난 길. 여행자를 감탄케 한 아늑한 숲길입니다. 도심에 어울리지 않게 자연의 생명이 살아 숨쉬고 있었거든요. 꼭 어디선가 본 듯한 ‘기시감’에 사로잡혀 일행은 고된 줄도 모르고 걸었습니다. ⓒ 이규호 제공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몰래 지원했다는 이유로 옥살이를 하고 결국에는 추방당한 UPI통신사 한국특파원이 살았던 집. 그는 이 곳을 ‘딜쿠샤’(이상향, 힌두어)라 불렀답니다. 진실을 알리고 공정보도의 꿈을 키웠을 외국 언론인의 낡은 집을 보며 기자는 부끄러워 낯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몰래 지원했다는 이유로 옥살이를 하고 결국에는 추방당한 UPI통신사 한국특파원이 살았던 집. 그는 이 곳을 ‘딜쿠샤’(이상향, 힌두어)라 불렀답니다. 진실을 알리고 공정보도의 꿈을 키웠을 외국 언론인의 낡은 집을 보며 기자는 부끄러워 낯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 이규호 제공

서울교육청 담(성곽)을 돌아 나와 바로 음식점을 찾아들었습니다. 시원한 물부터 찾는데, '목을 축이는 덴 막걸리가 제격'이라며 장수막걸리 주문소리가 우렁찹니다. 시원한 냉면이나 콩국수 주문이 다수일 줄 알았는데, 비빔밥·국밥·찌개더군요. 그렇지, 이열치열.

강북삼성병원 마당 한가운데 포위된 경교장. 김구 선생이 해방 뒤 4년여를 머물다 안두희 총탄에 쓰러진 현장. 돌보는 이 없어, 담배 피고 커피 마시는 의사 휴게실로 전락했다. 최근 역사유적으로 재단장을 하고 있다니. 역사바로세우기는 말만 요란했던 모양입니다.

흔적조차 찾을 길 없는 '돈의문'. 그냥 '여기 있었다'는 설명말고 덧붙일 게 없어 멍하니 한참을 서 있다 정동길로 들어섭니다. 태종 때 폐쇄했다가 세종 때 다시 문을 열어 '신문'·'새문'으로 불렸던 서대문. 일제가 1914년 파괴해버린 뒤 터조차 알길 없이 오늘에 이른 세월이 야속하기만 합니다.

미국과 영국을 등에 업고 친일내각을 앞세운 일본제국의 횡포를 피해 고종 황제가 아들 순종을 데리고 1년여 피난(아관파천, 결과 러시아 횡포에 시달림) 왔던 구러시아공사관. 일제가 사주한 깡패들에게 아내이자 어머니인 명성황후를 잃고 이 좁고 낯선 곳에 숨죽여 가슴 아파 했을 고종·순종 부자의 눈물이 그려집니다.

곁의 중명전. 덕수궁에서 잘려 독립가옥처럼 느껴지는 을사늑약의 아픔을 간직한 곳. 궁궐 도서관 수옥헌(漱玉軒)으로 건립됐으나 화재로 정궁이 불타 이를 대신해야 했던 전각. 야수 같은 일제의 총칼 앞에 군대해산령을 내리고 국권을 넘겨줘야 했던 황제 고종의 통곡소리가 서려 있습니다.

거기선 해설사 도움을 받았습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들어서는 여행자가 안쓰러웠을까요? 마감 시간을 넘겼는데도, 이방 저방 옮겨 가며 역사이야기를 정성스럽게 들려줬습니다. 전시대 속 '을사늑약' 협정서에선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지친 일행은 마지막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이화학당, 배제학당, 서울미술관(경성재판소에 이은 대법원을 거쳐), 정동극장(국립극장 분원), 정동교회. 근대역사유물을 살피고, 흔적조차 없는 소의문(소덕문, 서소문) 자리 어딘가를 거쳐, 중앙일보 앞길로 숭례문까지 걸었습니다.

돈의문·소의문 찾을 길 없는 곳

 중명전. 덕수궁이었건만 이제는 따로 떨어져버린, 을사늑약의 아픔을 간직한 전각. 일제의 총칼앞에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하고 주권을 넘기지 않을 수 없었던 고종의 통곡소리가 들리는 곳. 애초 이름은 구슬을 닦는 다는 수옥헌(?玉軒). 덕수궁의 부속 도서관이었습니다.
중명전. 덕수궁이었건만 이제는 따로 떨어져버린, 을사늑약의 아픔을 간직한 전각. 일제의 총칼앞에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하고 주권을 넘기지 않을 수 없었던 고종의 통곡소리가 들리는 곳. 애초 이름은 구슬을 닦는 다는 수옥헌(?玉軒). 덕수궁의 부속 도서관이었습니다. ⓒ 이규호 제공

 여행자들은 자취를 감춰버린 돈의문(서대문, 새문, 신문)자리 앞에서 한참을 넋 놓고 있었습니다. 병원 의사들의 끽연휴게실로 사용돼 온 경교장을 나와 흔적조차 찾을 길 없는 도성 4대문 중 곳에서 일제의 야만을 되새겼습니다.
여행자들은 자취를 감춰버린 돈의문(서대문, 새문, 신문)자리 앞에서 한참을 넋 놓고 있었습니다. 병원 의사들의 끽연휴게실로 사용돼 온 경교장을 나와 흔적조차 찾을 길 없는 도성 4대문 중 곳에서 일제의 야만을 되새겼습니다. ⓒ 이규호 제공

일본제국의 황태자가 문 아래로 식민지 조선에 들어갈 수는 없다고 해 성문만 남겨두고 주변성곽을 모두 헐어버린 파괴의 현장. 친일 MB정부 드러남은 한양도성의 정문마저 불타 사라져버린 거기 숭례문 곁에 서 있자니, 통곡소리에 귀가 먹먹해지는 듯합니다.

서울성곽여행 세 번째는 거기서 그쳤습니다. 남대문시장 골목 어느 선술집에서 막걸리 한 잔 따라놓고 수다를 떨며 곤한 여정을 마쳤습니다. 8월 땡볕이 조금 누그러진 어느 토요일 한적한 오후는 그렇게 지나갔습니다.

그간 쭉 여행에 참여하다 이번에 불참한 프랑스인 다비드. 시골출장으로 못 온다던 그가 이틀 전 보낸 이메일을 뒤늦게 봤습니다.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고 파리에서 정치연구소를 운영했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 도쿄 중앙정치권 자문을 했다는 그는 2년 전 일본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에 왔습니다.

한국에 딱 한 번 와보고 바로 짐을 쌓다고 했습니다. '그래 이거야', 감흥을 가졌다더군요. 기자와 몇 번 만나 한국 음식과 막걸리를 먹으며 '최고'를 연발했던 게 수사가 아님을 조금은 알겠습니다. 그가 찾은 곳은 샹그릴라도, 딜쿠샤도 아니었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한국이었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한국을 찾았다"

그는 메일에서 "최고의 기억 하나를 남겼다"고 언급했습니다. 인사동의 한 음식점에서 저녁을 먹고 임순례 감독이 운영하는 술집 '여자만' 2층 다락(1층이 내려다보이는)에서 막걸리 한잔 마신 뒤 헤어졌는데, "고맙다"며 감흥을 표현했더군요. 일본에선 아무런 느낌을 갖지 못하다 한국에 와서 그 감흥이 살아났는데, 오래전 일본문화를 공부할 때 좋아했다던 인물 이름 하나를 써놨습니다.

오즈 야스지로(小津 安二郞). 지난 63년 60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서민영화'라는 새 장르를 개척한 일본인 영화감독입니다. 주위를 둘러보지 않고 무작정 달리는 산업화·핵가족화시대. 무한경쟁에 빠져 삶의 가치를 상실한 현대인. 모두가 환상과 일탈로 탈출구를 찾을 때, 삶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려 애썼던 예술인. 줌인·줌아웃 기법을 삼가고 고정된 시선으로 관심을 끌었던 <강원도의 힘> 홍상수, <오발탄>의 유현목, <고양이를 부탁해>의 정재은을 생각하면 좀 쉬울 듯. 그가 시대의 균열과 이해 그리고 치유를 그린 가족풍경화, '도쿄이야기'는 꼭 한 번 봐야겠습니다. 2012년 여름, 서울에 사는 나와 가족 그리고 이웃을 다시 한 번 생각하면서요.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인터넷저널에도 게재됩니다.



#서울성곽여행#인왕산#창의문#돈의문#여행생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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