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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22일)은 더위가 절정에 달했음을 알리는 대서(大暑). 글자 그대로 아침부터 찜통더위가 시작되었다. 어제는 마음이 우울해지는 문자를 받았다. 중·고등학교 동창 채규평이 갑자기 사망했다는 내용이었다. 명복을 빌면서도 내 차례가 좀 더 가까워지는 것 같아 씁쓸했다.

 

 

초복(初伏)이었던 지난 수요일(18일)은 1996년에 돌아가신 어머님 제삿날이었다. 서울에서 내려온 딸과 아내는 제사음식 준비하러 일찍 형님댁으로 갔고, 나는 동창회에 들르느라 저녁 8시가 되어 도착했다. 장마철에 초복 치레하느라 그랬는지 날씨가 무척 더웠다.

 

형님댁에 도착하니 쓸쓸하게 느껴질 정도로 조용했다. 평일이어서 조카들이 서울에서 내려오지 못한 모양이었다. 쓸쓸함 속에서도 외사촌 누님과 반가운 인사를 나누었다. 팔순을 바라보는 외사촌 누님은 "갑자기 고모님(어머니)이 생각나 사진이라도 보고 싶어 왔다"고 했다.

 

형님은 놀라운 소식을 전해주었다. 형님은 "등산을 즐기면서 건강을 자신했던 60년 지기 진철이가 얼마 전 뇌졸중으로 죽었다. 임종도 하고, 장지에도 다녀왔다"고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었다. 형수도 "아까운 나이에 돌아가셨다"며 안타까워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자주 뵙던 멋쟁이 선배여서 충격이 더했다.  

 

우리 형제는 모두 7남매. 그중 3형제 부부와 몸이 불편한 셋째 누님 얼굴만 보였다. 세월이 갈수록 부모 제사에 참석하는 형제가 하나씩 줄어 안타깝다. 큰누님과 매형 세 분은 이미 돌아가셨고, 누님 두 분은 투병 중이어서 마음이 더욱 아팠다. 

 

형님 내외는 동갑내기로 올해 칠순을 맞이한다. 형수는 형님과 혼인을 보름쯤 남겨둔 1966년 12월 중순께 세상을 뜬 아버지 시신 앞에서 눈물의 결혼식을 올렸으며, 그 후 시아버지 제사는 46년째, 시어머니 제사는 16년째 정성 들여 모셔오고 있다. 형님이 몸 생각해서 1년에 한 번으로 합해 지내자고 해도 막무가내다.

 

"당신은 제사 끝날 때까지 방에서 나오지 마세요!"

 

제사상 차리기는 언제나 셋째 누님 몫. 저녁 9시가 되자 셋째 누님이 제기(祭器)에 부침개며 떡이며 음식을 놀려놓기 시작한다. 지켜보던 제수씨가 다가가 거들었다. 셋째 누님은 "제사떡은 시금자(검정깨)와 콩고물을 뿌려서 쪄야 허는디, 떡집에서 해온 거라 쫌 거시기 허네!"라며 아쉬움을 표했다.

 

제사상 차리기에 앞서 형수는 남편이자 이날의 제주(祭主)인 형님을 향해 폭탄발언(?)을 했다.

 

"당신은 진철이 양반 임종도 하고 산에도 다녀왔으니까, 어머니·아버지 사진이랑 제사음식은 절대 쳐다보지 말고 안방으로 들어가세요. 빨리요. 그리고 제사 끝날 때까지 밖으로 나오지 마세요. 절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요!"

"알았어, 알았다니까···."

 

옛날 어른들은 더러운 몸으로 제사지내면 부정을 타거나 동티가 난다고 했다. 해서 제사를 앞두고는 상가에 문상 가는 것조차 금했다. 어머니는 아버지나 형님이 상가에 다녀오면 대문에 발을 들여놓기 전에 소금을 뿌리는 것으로 부정을 막았는데, 형수는 더한 것 같았다.

 

우리 집 제사는 언제나 큰아들인 형님이 향을 피우고, 술을 따라 올리고, 재배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럼에도 형님에게 안방으로 들어가서 끝날 때까지 나오지 말라니, 충격발언이 아닐 수 없었다. 두말 못하고 안방으로 쫓겨나는 형님을 보니 뜻 모를 미소가 지어졌다.

 

 

형수는 제사상 앞에 단정히 앉아 향을 피우고, 제사 음식을 정돈한 다음 메(밥)를 지어 올렸다. 음식을 차리면서는 "어머니, 제사를 해마다 받아 드시고 싶으면 저를 안 아프게 해주세요"라고 간곡히 당부하듯 말했다. 잠시 뒤에는 경건한 자세로 절도 했다.

 

제사 때마다 '성주상'을 먼저 차리는 형수. 전통 유교방식에 어긋나지만, 모두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관습이다. 제사 음식을 이웃들과 나눠 먹는 것까지 어머니를 닮았다. 형수가 제사 지내는 모습은 돌아가신 어머니·아버지와 교감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진지하고 생생하다.

 

형님은 친구 임종 지켜본 걸 후회할까? 

 

 

이날 제사는 새벽 1시쯤이나 철상(撤床)하던 다른 때와 달리 자정 이전에 끝났다. 형님이 제사에 참여하지 못한 이유도 있겠지만, 밤사이에 7호 태풍 '카눈'이 군산쪽으로 북상할 것이라는 기상청 태풍경보와 갑자기 우박처럼 쏟아지는 폭우가 식구들 마음을 조급하게 했다.

 

형수는 셋째 누님과 동생 부부, 조카에게도 과일과 부침개, 떡, 홍어찜 등을 싸주었다. 음식이 쉬 상하는 계절이어서 제삿날 먹을 만큼만 했을 터인데도 남기지 않고 싸주는 손길이 어머니를 떠오르게 했다. '살아서도 부모 덕, 죽어서도 부모 덕'이라는 말과 함께.

 

부모 제삿날은 천리만리 떨어져 사는 형제도 달려와 영혼 앞에 음식을 바치면서 추모하는 중요한 날이다. 그럼에도 형님은 제삿날 안방으로 쫓겨났다. 집으로 오는 차 안에서도 형님은 편한 마음으로 쉬었을까? 아니면 친구 임종을 지켜본 걸 후회했을까? 모두가 궁금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어머니 제사, #형수, # 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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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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