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8월 9일, 그 날은 새벽 5시에 일어나 훈련장으로 향하지 않아도 됐다. 결전의 날이었기 때문이다. 바르셀로나 올림픽 폐막식을 앞두고 올림픽의 꽃, 마라톤 경기가 열렸다. 아프리카 선수들의 강세로 메달을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끝까지 최선을 다해보자는 마음으로 달렸다.

손기정 선수(1936년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이후 56년 만에 한국에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을 안겨준 황영조 감독이 런던 올림픽을 9일 앞둔 18일 tvN <백지연의 피플 인사이드> 방송에서 올림픽 챔피언이 되기까지의 힘겨웠던 과정을 공개했다.

 황영조 선수가 힘들었던 선수 생활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황영조 선수가 힘들었던 선수 생활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 tvn


"(올림픽은) 완주가 목표가 아닌 상대를 이겨야 하는 승부였어요. 20km를 통과하면서 앞으로 치고 나가니 다른 선수들이 따라 오지 못했죠, 여유 있게 나간 거였는데. 이후 35km 지점에서 일본 선수가 따라 붙었습니다. 내리막길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가파른 죽음의 코스 몬주익 언덕에서 모리시타 선수와 승부가 시작됐죠."

죽음의 레이스 앞에서 '금메달 양보심' 발동

황영조 감독은 모리시타 선수와 열 번 이상 앞서거니 뒤서거니하면서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도 많았다고 고백했다.

"아무리 강한 정신력을 가진 사람도 힘이 들면 마음도 약해집니다. 솔직한 얘기로 양보심이 생기더라고요. 도저히 못 가겠더라고요. 그 전까지는 어떻게 해서든 이기겠다 생각했는데, (죽음의 코스 들어서자) 도저히 안 되겠다. 먼저 가라, 할 정도로 마음이 약해졌어요. 그런데 (모리시타 선수가) 먼저 나가더라고요. 그 시점에서 놔주면 끝나거든요. 다시 이겨야겠다는 마음으로 달렸죠."

은퇴할 때까지 일본 선수한테 진 적이 없다는 황 감독은 아프리카 선수와 승부를 벌였다면 당시 포기했을 지도 몰랐을 거라고 말했다.

"아프리카 선수들은 무표정이에요. 일반 사람들은 힘이 들면 동작도 커지고 숨소리가 거칠어지잖아요. 그런데 아프리카 선수들은 무표정으로 달리기 때문에 힘든 상황인지 아닌지 캐치를 못하죠. 저는 힘든데 이 선수는 멀쩡해 보이니까. 도저히 안되겠다 생각할 수 있는데… 일본 선수와는 서로 거친 숨을 몰아 쉬면서 치고 받았죠. '내가 힘들면 너도 힘들겠지 너라고 안 힘들겠냐'는 생각으로 위안 삼으면서 계속 달린 거죠"

 황영조 선수는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출전해 2시간 13분 23초 기록으로 금메달을 땄다.

황영조 선수는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출전해 2시간 13분 23초 기록으로 금메달을 땄다. ⓒ tvN


한 걸음 한 걸음을 숨 넘어가듯 죽을 각오로 내달려 결승선을 가장 먼저 통과했다. 그리고 그는 맥없이 쓰러져버렸다. 세레머니를 하지도 못한 채 들것에 실려나갔다. 백지연이 '태극기를 들고 운동장을 달리지 못한 아쉬움이 없냐'고 묻자 "태극기를 들 힘을 남겨놓고 골인했다면 1등을 못했을 것 같다"고 말했다. 2시간 13분 23초를 사력을 다해 달렸다. 올림픽 직전 족저근막염(근막에 염증이 생겨 발뒤꿈치로 통증이 전해지는 증상)이 발병해 완벽하지 않은 컨디션으로 얻은 결과였다.

'기적의 사나이' 황 감독이 금의환향하자 기자들은 '황영조 2연패'라는 기사를 싣기 시작했다. 선수와 인터뷰도 하지 않은 채 4년 후에 열리는 애틀란타 올림픽에 출전하라고 등을 떠민 것이다.

"제 의지와 상관없이 뛰어야 할 수밖에 없는, (다음 올림픽을) 준비해야 하는 분위기였어요. 발바닥을 수술하고 1년 쉰 뒤 히로시마 아시안게임(1994) 준비를 시작했죠."

그는 바르셀로나 올림픽만 바라보고 달려왔다.

"저에게 마라톤은 너무 가혹한 스포츠였어요. '언제 내 인생에서 달리지 않는 날이 올까' 늘 생각했죠. 매일 5시에 일어나서 훈련했어요. 아침에 눈 뜰 때가 가장 힘들었어요. 뜨는 순간 뛰어야 하니까. 저에게 마라톤은 즐기기에는 너무 가혹했어요. 92년 이거(바르셀로나 올림픽) 뛰고 끝낸다고 생각했죠."

훈련 당시, 사육 당하는 동물 같은 느낌이었다

황 감독은 선수로 훈련할 때 매일이 지옥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선수니까 경기에 모든 승부를 걸어야 한다는 생각에 힘든 고통을 참아내면서 훈련했다.

"제 훈련 일지를 보면, 훈련소를 '창살 없는 감옥'으로 표현했어요. 먹고, 자고, 뛰고. 사람이라기보다는 사육 당한다는 느낌, 동물 같은 느낌이었어요. 마라톤 선수로 성공하려면 인간이기를 포기해야 해요. 내가 동물화 되어 있을 때 최고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고자 하는 것을 빨리 이루고 접는 게 목표가 돼 버렸어요. 이 힘든 훈련을 10년, 20년 하자고 생각을 못한 거죠."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 리스트인 황영조 선수는 현재 국민체육진흥공단 감독이 돼 선수들을 지도 중이다.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 리스트인 황영조 선수는 현재 국민체육진흥공단 감독이 돼 선수들을 지도 중이다. ⓒ tvN


2000년부터 국민체육진흥공단 마라톤 부를 지도하고 있는 황 감독은 선수들의 정신력이 많이 나약해졌다고 지적했다.

"훈련 여건은 상당히 좋아졌는데 환경은 어려워진 것 같아요. 마라톤은 자신과 싸우는 운동이거든요. 그러면 선수들이 운동에 전념할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하는데, 선수들은 인터넷과 전화기를 들고 삽니다. 자야 할 때, 자다가도 전화가 오니까요. 한국 마라톤이 다시 좋아지려면, 섬에다가 선수촌을 만들어서 외인구단처럼 훈련을 시켜야 해요. 오직 훈련만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줘야 하는 거예요."

2012 런던 올림픽 마라톤 종목에 출전하는 선수 중 2시간 3분대를 기록하는 경쟁자들이 수두룩한데 한국 국가대표 선수들은 2시간 11분, 14분대 기록을 가지고 올림픽에 참가한다. 황 감독은 "선수들이 끝까지 최선을 다 하는 마음으로 준비해야 하는데 참가에 만족하고 있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고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요즘 선수들은 하고 싶은 걸 다 하면서 잘 하려고 해요. 이것 저것 다 하면서 다른 것도 잘 하려고 하면 이룰 수가 없죠. 오직 이거 아니면 죽는다는 생각으로, 그럴 때 되는 거죠. 하고 싶은 거, 관심 있는 거 다 하면 운동은 언제 하나요. 뛰는 시간만이 운동이 아니라 쉬는 시간에 자기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운동으로 연결 시키는 것까지 훈련이죠. 그러니까 24시간이 운동이라고 생각하고 행동해야지, 친구 만나고 놀다가 들어와서는 집중이 되겠습니까."

 자신의 꿈에 대해 이야기 하며 밝은 표정을 짓고 있는 황영조 선수

자신의 꿈에 대해 이야기 하며 밝은 표정을 짓고 있는 황영조 선수 ⓒ tvN


한국 마라톤 부흥을 위하여 제자들에게 쓴 소리를 아끼지 않은 황 감독은 자신의 또 다른 꿈을 이야기하며 인터뷰를 마쳤다.

"제가 지도하고 있는 우리 선수들이 저를 통해서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고 저를 통해서 자신의 꿈을 이뤄나갈 수 있는 그런 선수가 됐음 좋겠습니다. 제 선수뿐 아니라 마라톤을 통해서 우리 국민들이 건강해졌으면 하는 생각도 갖고 있습니다."

황영조 백지연 백지연의 피플인사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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