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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날 오래된 신사 돌계단이 고즈넉하다
 비오는 날 오래된 신사 돌계단이 고즈넉하다
ⓒ 장윤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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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방에는 총 세 명이 들었다. 각자 맥주 하나씩을 손에 들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도쿄의 밤이 깊어갔다. 동대문에서 옷 장사를 하는 아가씨와 건대 입구에서 미용사를 하는 아가씨는 모두 30대 초반의 늘씬한 미녀들이다. 옷장사 아가씨는 퍽이나 재미지고 고소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냈다.

"너무 불경기가 심해요. 동대문 샵들도 다 어려워서 노점을 두 개나 운영했어요. 경기가 좋을 땐 노점도 괜찮거든요. 동료들이랑 돈 모아서 시작했는데 노점하려면 거기 조폭들한테 돈을 줘야 돼요. 걔네들이 돈 받고 나서는 전기도 끌어주고 물도 대주고 관리를 해줘요. 우린 한 달에 100만 원 줬는데, 시작하자마자 너무 장사가 안 돼서 좀 봐달라고 사정사정해서 열흘을 더 연장했어요. 그런데 그 열흘 중에 일주일이나 비가 온 거 있죠. 비 오고 며칠 장사 하고 나니까 장마가 지더라구요. 결국 손해만 왕창 보고 접었어요. 옷 장사는 이제 별로예요. 여기서 네일 관련 제품이나 입욕제 같은 걸로 갈아타 보려고 상품 조사차 왔어요."

그녀의 친구인 미용사는 가방 속에서 생리대를 꺼내 두 손 가득히 쥐어 보였다.

"미용사 일 아시죠? 하루 종일 서서 일하다보면 화장실 갈 시간을 자꾸 놓쳐요. 작년 말부터 치질이 생겼는데 지금은 너무 심해져서 이렇게 생리대를 항상 갖고 다녀야 돼요. 사실 가게 주인한테는 치질 수술한다고 해놓고 여기 온 거예요. 진짜로 수술해야 되는데…. 여름 휴가를 당겨 쓴 거라 어떻게 시간을 내야 할 지 모르겠네요."

그녀들은 일본 원전 사고 때문에 걱정이라고 하면서 여기서 먹는 물이나 음식이 괜찮을지 모르겠다고들 했다. 도쿄에서는 십수 년 뒤에는 일본에 대대적인 기형아 탄생의 시기가 온다는 둥 흉흉한 소문이 많다고 했다. 일본에서 장사 아이템을 얻어야 하는데 일본 경기도 좋지 않고 사회 분위기도 어두워서 앞으로는 일본보다는 중국에서 장사를 해봐야겠다는 말도 있었다.

모두 내가 40대 중반인데도 혼자 배낭여행을 온 것이 대단하다고들 했다. 그러나 나는 정작 내일 닛코에 혼자 갈 자신이 없어서 우물쭈물하고 있노라고 했다. 배낭도 너무 무겁고 내일 비도 온다는데, 하면서 자신없는 목소리를 내자, 당찬 옷장사 아가씨가 자신의 작은 배낭을 빌려주겠노라 하면서 한 마디 던졌다.

"꼭 가봐야 할 가치가 있는 곳이라면 꼭 가셔야죠. 누가 그러더라고요. 갈까 말까 하면 가라. 살까 말까 하면 사지 마라. 그 다음은... 응, 그렇지, 여기 메모해 놨어요. 말할까 말까 할 때는 말하지 마라. 줄까 말까 할 때는 줘라. 먹을까 말까 할 때는 먹지 마라. 멋지죠? 제 좌우명이예요."

나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그녀의 좌우명을 얼른 핸드폰에 메모하면서, 이들을 만난 것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가자. 닛코로.

갈까 말까 할 때는 가라

거대한 삼나무 숲이 있었다. 예상치 못한 숲의 장대한 규모에 나는 그만 기가 꺾이고 말았다. 가난한 영주들이 도쿠가와의 무덤을 위해 돈 대신 심었다는 삼나무가 흩뿌리는 빗속에서 근중한 모습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들이 내뿜는 무겁고도 엄숙한 숨소리에, 닛코 산나이 전체는 오묘한 영적 기운으로 살아 꿈틀대는 듯했다.

숙소에서 굴러다니는 싸구려 비닐 우산 속에 겨우 몸을 비틀어 넣은 나는 이 나무들 사이를 뚫으며 그저 걸을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 도쿠가와의 묘가 있다는 점 외에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고 알 필요도 없었다. 그저 비장하기까지 한 삼나무들의 노래 속에서 일본 전국시대의 처참함이 식민지 조선인들의 참담함과 겹쳐졌고 그 속에서 일본을 고향으로 태어났던 아버지의 슬픈 과거를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일본 전통 복장을 한 안내원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길을 알려준다. 나는 단체 관광객과 수학여행 온 학생들 사이를 지나 천천히 본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린노지는 보수중이라 어수선했다. 오히려 절 뒤의 이끼가 낀 작은 돌탑이 더 아름다웠다. 돌탑 주변에는 소원을 적은 나무패들과 하얀 종이 매듭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닛코 신사 내의 돌탑 앞 종이매듭
 닛코 신사 내의 돌탑 앞 종이매듭
ⓒ 장윤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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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비를 피하며 벤치에 앉아 일본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지금의 이 하늘, 아버지도 보았는지 궁금해진다. 아버지는 닛코에 와 보긴 와 본 것일까. 1930년대 말, 한 식민지 소년은 이 거대한 유적 앞에서 어떤 생각을 했을지.

아버지는 철들 무렵까지도 조국인 조선을 본 적이 없다. 조선에 대해서는 그저 안 좋은 이야기들만 들었을 것이다. 가난, 파멸, 부패, 무지…. 그에 비해 실질적 고향일 일본은 몇 개의 식민지와 막강한 군대를 거느린 동아시아의 대국이라고 배우고 자랐을 것이다. 그 당시의 닛코가 지금과 같은 규모일지는 모르지만, 만약 이런 모습의 닛코를 보았더라면 아버지도 틀림없이 삼나무 숲에 압도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점심 시간이 지나서도 비는 그칠 줄을 몰랐다. 나는 잠시 쉬었다가 일어나 500엔을 더 내고 도쿠가와의 유해가 안장된 사당으로 올라갔다. 여기를 통과하기 전에는 묘하게 웃는 얼굴의 고양이 조각을 볼 수가 있다. 작은 조각상이었지만 아주 유명한지라 사진을 찍는 사람들로 붐볐다.

삼나무 숲에는 비

또, 삼나무 숲이 펼쳐진다. 나무들 사이로는 안개 섞인 빗방울을 맞고 있는 오래된 돌계단이 펼쳐지고 나는 헐떡거리며 계단을 올라갔다. 이 계단을 둘러싼 삼나무의 착 가라앉은 속삭임이 비를 뚫고 계속 나를 압박해왔다. 너는 아버지를 사랑했는지. 아버지는 너를 사랑했는데. 왜 아버지가 그리도 멀게 느껴졌는지. 아버지의 부음을 받고도 끝내 하던 일을 다 마치고 간 이유가 무엇인지.

나와 아버지의 관계는 이 빗속의 닛코의 안개처럼 모든 것이 희미하기만 했다. 아버지는 극과 극을 달릴 때가 많았다. 낙천적이고 유머러스한 면이 있었던 반면, 한 번 화가 나면 아무도 말리지 못했다. 우선 입에 담기 힘든 욕설이 시작되고, 풀어진 허리띠가 면상에 날아오는가 하면 밥상이 통째로 마루를 굴렀다. 나도, 오빠들도, 올케들까지도 몇 번씩 당하는 일이었다.

이유는 없었다. 어떤 때는 전화를 늦게 받아서였고 또 어떤 때는 아침에 학교 갈 준비를 하며 떠들었기 때문이었다. 술을 마시고 들어오는 날에는 온 식구들이 피난처를 찾아 헤매 다녔다. 나는 침대 밑이나 문 뒤에 잘 숨었다. 그러면 술 냄새가 물씬 풍기는 아버지의 숨소리가 가까이서 느껴지고, 나는 두려움에 온 몸이 사시나무 떨리 듯했다.

중학교 입학 이후에도 아버지의 그런 행동은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사업이 결정적으로 좌초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한 번 크게 성공했던 아버지는 성공만큼의 처절한 실패를 맛보았다. 가재도구를 다 차압으로 빼앗기고 난 저녁, 빚쟁이를 피해 숨어 다니던 아버지가 만취해 한밤중에 집에 들어오던 그날을 나는 잊지 못한다. 우리 형제들은 방 문고리를 잡고 오들오들 떨고 있었고, 아버지는 손에 잡히는 물건을 있는 대로 내동댕이치며 절규했었지. 망했어, 다 망해 버렸다고.

그즈음 아버지는 사업 실패의 충격으로 한쪽 팔이 마비되었고 백내장도 앓았다. 꽤 튼실한 목재공장을 운영했던 아버지. 아버지는 당신이 망하게 된 계기가 일본으로의 무리한 수출 때문이라고 했다. 대기업과의 경쟁에서 자꾸 밀리면서 사업을 확장하다가 빚을 못 갚게 된 것이라고. 그래도 평화의 댐 공사에도 납품을 했었다며, 국책사업에 참여했던 기억을 자랑스럽게 늘어놓았던 아버지였다.

닛코 경내의 돌탑. 이끼가 아름답다.
 닛코 경내의 돌탑. 이끼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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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버지와 결정적으로 멀어지게 된 계기는 대학에 들어가 학생회 일과 학생운동에 관여하게 되면서였다. 사업 실패 후 재기에 성공하지 못한 아버지는 집안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며 점점 '파자마맨'이 되어갔다. 엄마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었고, 내가 하는 일에는 사사건건 어른으로서의 훈계를 주려했지만, 나는 아버지의 모든 말들이 그저 보수 반공 세력의 논리와 이해를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것으로 밖에는 보지 않았다. 점점 아버지가 우스워졌고 만만해졌다.

아버지가 무식하다 생각했고 당최 말이 통하지 않는데도 권위를 내세우는 것으로 보였다. 아버지의 일본 책들을 보며 대놓고 친일파 아니냐고 힐난했으며 88올림픽에 열광하는 모습에 코웃음을 치다가 따귀를 얻어맞기도 했다. 총학생회 선거와 삼당합당 반대를 위해 드디어 집을 나왔을 때, 아버지는 기어이 학교 문 앞에까지 찾아와 나를 기다렸지만 나는 끝내 아버지를 피해만 다녔다. 통일운동, 광주항쟁 추모제 등을 계기로 나는 몇 번의 대충돌을 거쳐 결국 아버지와의 소통을 거의 완전히 포기했다.

아버지가 마루에 나오면 방으로 들어갔고 되도록 TV 뉴스를 같이 보지 않으려 애썼다. 밥도 일부러 혼자 먹었다. 나뿐만이 아니었다. '파자마맨'이 된 이후 아버지는 식구들에게서 점점 뒤돌려지게 된 반면, 엄마의 권위는 하루가 다르게 높아졌다. 아버지의 욱하는 성질 때문에 크고 작은 상처가 몇 개씩 있었던 식구들은, 나처럼 심하게는 아닐지라도 아버지를 조금씩은 피해 다니고, 홑으로 보고 있었다. 아버지의 존재는 자꾸 작아졌다.

아버지와 내가 만들어낸 세월들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 나는 진심으로 아버지를 이해하고 나의 과거를 설명해내고 싶었다. 나는 비가 억수같이 퍼붓는 도쿠가와의 묘 앞에서 부모와 자식의 운명적 만남과 우리가 만들어낸 세월들을 떠올렸다.

아버지가 그렇게 좋아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다. 도쿠가와는 전국시대를 통일하고, 에도시대를 열고 수세기가 흘러도 이렇게 살아있는데, 가난한 식민지 출신의 소년은 고생 끝에 사업에 실패하고 노후에는 병마에 시달리다가 세상을 떴다. 아마도 아버지는 도쿠가와를 닮고 싶었는지도 모르나, 아버지의 생과 도쿠가와의 생은 너무나 큰 차이가 있었다. 그렇게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생각하니 갑자기 인생이 허무하게 느껴져 견딜 수가 없었다.

다시 계단을 내려와 닛코의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건물인 도쇼궁을 지나 천장에 큰 검은 용이 그려진 다른 건물로 들어갔다. 일본의 전통적 미를 가장 잘 체현하고 있다는 이 도쇼궁과 신사들은 그림, 조각 그리고 화려한 금박의 장식들로 멋지게 차려입고 있다.

보통 때 같으면 이런 대공사를 하기 위해 민중들의 피를 얼마나 쥐어짰을까를 생각하거나, 일본의 문화유산에서 작은 티라도 하나 더 발견하고 싶어 안달이 났을 테지만, 오늘은 그저 이름없이 살다가는 초라한 중생들의 삶을 기억하며 눅진히 젖어오는 서글픔에 몸을 맡기고 싶을 뿐이었다.

이제 오후로 접어들면서 날이 어두워졌다. 다리쉼을 하며 녹차와 떡꼬치를 먹었다. 이제 신오쿠보로 돌아가면 몇 시나 될까. 옷장사와 미용사는 도쿄 도심으로 장삿거리를 찾아갔을 테지. 비가 더 세차게 내린다.


태그:#일본여행, #닛코, #추억, #아버지,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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