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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진미륵불. 국가 지정 보물이다.
 은진미륵불. 국가 지정 보물이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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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의 불상들은 갓을 쓰지 않았다. 산꼭대기의 갓 쓴 석불로 유명한 대구 팔공산의 '갓바위 부처'도 신라 시대의 작품이므로 당연히 처음에는 관이 없었다. 그러다가 고려로 들어오면서 사람들이 갓을 얹은 것으로 추정된다.
갓을 쓴 부처로 팔공산 갓바위 못지 않게 유명한 것이 논산 관촉사의 은진미륵불이다. 고려시대의 작품이니 아마도 태어날 때부터 갓을 쓰고 탄생했을 것이다. 갓바위부처와 은진미륵불은 둘 다 국가 지정 보물이다.

야외에 있는 불상에 갓을 씌운 까닭은 무엇일까. 사람이 모자를 쓰면 키가 더 커보이듯 석불도 관을 얹으면 규모가 더 웅장해 보인다. 그렇게 해석하는 견해는 옛날 사람들이 석불에 관을 얹으면서 그것을 탑으로 생각했다고 본다. 탑이 본래 사찰보다도 먼저 생겨난 신앙의 대상인 바, 민간 불자들의 간절한 신앙심이 석불 위에 모자를 얹게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다.

석불들이 모자를 쓰게 된 것을 불자들의 독실한 신앙심의 결과로 본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이지만, 좀 더 소박한 견해도 있다. 북풍한설 몰아치는 한데서 하루도 빠짐없이 비바람에 시달리는 부처님을 뵙기가 민망하여 갓을 씌웠다는 해석이다. 우산이 없는 상황에서 갑자기 비를 만나면 사람도 모자를 쓰거나, 정 안 되면 가방이라도 머리 위에 얹지 않느냐는 논리이다.

불상인가 장승인가... 익산 고도리 '갓 쓴 부처'

고도리 석불. 불상이라고 하지만 그보다는 장승처럼 느껴진다.
 고도리 석불. 불상이라고 하지만 그보다는 장승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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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바위부처나 은진미륵불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역시 국가 지정 보물인 '갓 쓴 부처'가 전북 익산 금마면 고도리에 버티고 있다. 마을 이름이 고도(古都)인 것으로 근처에 '왕궁리 유적 전시관'이 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고도리 석불은 금마네거리에서 우회전하여 왕궁리유적전시관으로 접어들면 금세 오른쪽 들판 가운데에 서 있다. 하지만 마치 장승처럼 보여 멀리서는 불상인 줄 가늠하기가 어렵다.
고도리 석불은 몸체가 마치 길다란 기둥처럼 생겼다. 갓바위부처는 앉아 있고, 은진미륵불은 엄청나게 큰 머리에 몸체도 퉁퉁하여 결코 그런 인상을 주지 않지만 이곳 석불은 딱 장승의 형상이다. 얼굴도 불상처럼 온화한 원형이 아니라 네모꼴이고, 입술은 연한 웃음을 띠고 있지만 눈은 찢어졌다. 화려한 법의를 걸친 것이 아니라 두루마기를 입고 있다. 장승 그 자체라는 말이다.

불상 옆에 세워져 있는 <석불중건기>를 읽으면 고도리 석불이 왜 장승 모양인지 약간 헤아려진다. 뜻 중심으로 헤아리면 대략 '금마는 삼면이 산으로 가로막혀 있는데 유독 남쪽만 터져 있어 물이 다 흘러나가는 형상이기 때문에 수문의 허를 막기 위해 세웠다'로 읽힌다. 거의 종교적인 냄새가 나지 않는다. 또 '금마의 주산인 금마산의 모습이 말처럼 생겼으므로 마부가 필요할 듯하여 인석(人石)을 세웠다'고도 쓰여 있다. 이 역시 마찬가지다. 건립 사유가 석불보다 장승에 더 가까우니 모습도 당연히 그렇게 만들어졌던 것이다.

고도리 석불이 물을 막기 위한 상징적 조치로 세워졌다는 해석을 뒷받침해주는 증거물이 있다. 수문을 세우려면 기둥이 둘 필요하다. 고도리 석불 자체가 바로 그 증거물이라는 이야기다. 고도리 석불은 쌍인데, 둘이 약 200m 거리를 두고 떨어져 서 있다. 그냥 쌍불이라면 나란히 세우면 될 일이지만, 들판의 수문장 역할을 맡겨야 하니 그렇게 둘을 떨어져 세울 수밖에 없었다.

섣달 돼지날 자정... 옥룡천을 건너는 석불  

무덤 위에 올라앉은 것 같은 고도리 석불
 무덤 위에 올라앉은 것 같은 고도리 석불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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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한 석불은 남자이고, 다른 석불은 여자다. 석불 사이에는 옥룡천이라는 시내가 흐른다. 둘은 만날 수 없다. 이는 <공무도하가>가 잘 말해준다. 강을 건너려면 물이 얼어야 한다. 섣달, 맹추위가 몰려오면 모든 것이 얼어붙어 물 위로 길이 생겨난다.

옛날 사람들은 날짜에도 12지를 넣었다. 쥐날, 소날, 호랑이날, 토끼날, 용날, 뱀날, 말날, 양날, 원숭이날, 닭날, 개날, 돼지날 식이다. 남녀 석불은 물이 얼어 길이 생겨나는 섣달, 풍요를 상징하는 돼지날 자정 무렵에 옥룡천 얼음 위를 걸어 1년 만의 만남을 이룬다. 그토록 헤어져 있었던 애틋함에 몸부림치며 둘은 서로 얼싸안고 사랑을 나눈다. 그러다가 이윽고 닭이 울면 제 자리로 돌아간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둘은, 섣달 돼지날이 되어도 만나지 못했다. 옥룡천이 얼어 길이 생겨도 모두 허사였다. 세월과 비바람의 풍상에 겨워 쓰러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참된 사랑도 변함없이 이루어지려면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한 법이다.

1858년(철종 9) 최종석이 익산군수로 부임해 왔다. 신임군수는 관내를 시찰하던 중 석불이 넘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해마다 섣달 해일(亥日, 돼지날) 자시(子時, 자정 전후)가 되면 두 석불이 1년에 한 번 만나 사랑을 나눈다는 말을 이미 들은 그였다. 어찌 그냥 지나칠 것인가. 민간신앙을 허투루 보는 자는 진정한 지도자가 못 된다. 그는 당장 두 석불을 일으켜 세우고, 그 옆에 석불이 창건된 사연을 기록한 <석불 중건기> 비석도 마련했다.

그 이후, 두 남녀 석불은 해마다 섣달 돼지날 자정이 되면 옥룡천을 건너 1년만의 애잔한 사랑을 다시 나눌 수 있게 되었다. 다만 현대인의 눈에는 그것이 보이지 않았을 뿐.

고도리 석불이 쌍불이듯이, 수문은 두 개의 기둥을 필요로 한다. 삼한시대 저수지로 알려진 김제 벽골제에도 지금껏 그런 모양의 수문 2조가 남아 있다. 사진은 장생거.
 고도리 석불이 쌍불이듯이, 수문은 두 개의 기둥을 필요로 한다. 삼한시대 저수지로 알려진 김제 벽골제에도 지금껏 그런 모양의 수문 2조가 남아 있다. 사진은 장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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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6월 22일에 다녀왔습니다.



태그:#고도리석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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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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