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청룡기고교야구대회 결승에서 경남고는 막강 타선을 자랑하는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를 상대로 탈삼진 20개를 만들어낸다. 27개의 아웃카운트 중에 20개를 탈삼진 처리했다는 것은 어메이징한 사건이었다. 그 전에는 지역 예선전에서 삼진 20개가 나오는 경기가 몇 차례 있었지만 본선에서, 그것도 결승에서 삼진을 그렇게 많이 잡아낸 투수는 일찍이 아무도 없었다. 그가 바로 최동원이다.

금테안경에 다소 건방져 보이고, 그리 크지 않은 체격을 가지고 있던 그는 경남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특히 1975년 가을, 전국대회 4강 이상 상위팀들이 초청된 전국우수고교초청대회에서 그는 경북고와 선린상고를 상대로 전무후무한 17이닝 노히트노런 기록을 이룩해낸다. 경북고를 상대로 9회 노히트노런, 그리고 이틀 후 선린상고를 상대로 8회까지 노히트노런, 그렇게 17이닝 노히트노런 기록이 만들어진 것이다. 만화 스토리가 아니다.

놀라운 강속구와 함께 아버지가 만들어주었다는 그의 독특한 투구 동작은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야구 교범 책에도 없는 특이한 폼이었지만 그래도 그의 팔에서는 강력한 속구가 쉬지 않고 계속 만들어졌다. 그의 신화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일명 트로이카 시대를 연 김시진, 김용남, 그리고 최동원은 1976년 고교야구를 3분할하고 있었다. 그 중에 최동원은 단연 두각을 나타내었다. 그의 불같은 강속구는 일찍이 우리나라에서 볼 수 없었던 마구와 같은 구종이었다. 역동적인 폼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속구로 삼진을 잡아내는 장면은 또 다른 야구의 묘미를 만들어주었다. 그 전에는 보지 못했던 센세이션이었다.

햇병아리인 그가 그런 반향을 일으켰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보면 무슨 신화 같은 얘기지만 그 당시 그런 현상은 당연했다. 그만큼 고교야구 인기가 대단했다는 방증이었다. 아마도 그 당시 고교야구 인기가 정점이었을 것이다. 실업과 대학야구는 무료 입장을 할 정도로 인기가 없었지만 고교야구는 항상 만원이었고 라디오 중계방송을 하는 유일한 종목이었다. 이런 기현상이 결국은 수많은 인재들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단초가 되었는지 모른다.

살아 꿈틀거리는 괴물 같은 공... '인간이 어떻게 저런 공을'

조승우 <퍼펙트게임>은 대한민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투수였던 故 최동원과 선동열의 맞대결을 그린 영화이다. 고 최동원에 빙의 된 듯한 조승우와 선동열의 투구폼 연습으로 구슬땀을 흘렸던 양동근의 호연이 빛난다

영화 <퍼펙트게임>이 한 장면. 최동원 역을 맡은 배우 조승우. ⓒ 롯데엔터테인먼트


고등학교에서 혹사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연세대에 입학해서 식지 않은 강속구를 계속 뿌려댔다. 연세대에 입학한 그해 봄, 그는 대학야구 결승리그에서 성균관대를 상대로 탈삼진 16개를 잡아내며 화려하게 신고식을 한다. 그 후 그는 팀의 에이스로 수많은 대회에서 23연승을 하는 등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실력을 발휘하였으며, 국가대표에도 선발되어 각종 국제대회에 출전하여 대한민국에게 승리를 안겨주었다. 그는 한마디로 명불허전이었다.

그의 강속구는 빠르면서도 강력했다. 그가 연세대 재학시절 한양대 야구장에서 연습게임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나는 우연히 그의 투구를 바로 옆에서 지켜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나에겐 행운이었다. 그의 손끝에서 떠난 공은 굉음과 바람을 일으키며 순식간에 포수 미트로 빨려들어갔다. 마치 살아 꿈틀거리는 괴물 같았다. 빠른 것은 물론이고 한마디로 위력적이었다. 저런 공을 인간이 던질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그의 투구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모두들 탄성을 토해냈다. 역시 최동원이었다.

연세대 시절과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하기 전까지 그는 모든 타자의 공공의 적이었다. 그 당시 대학 야구에는 기라성 같은 선수들이 즐비했다. 장차 프로야구를 이끌어 갈 고수들이 한창 주가를 오르던 시기였다. 더구나 실업에서 잘나가던 선수들도 대학에 진학하여 대학야구는 야구의 중심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김봉연, 박해종, 김일권, 장효조, 이만수, 김한근, 김성한, 조종규, 박종훈, 이광은, 김시진, 김용남, 임호균 등 새 시대를 열 스타급 선수들이 즐비했다. 그 중에 최동원이 있었으며 군계일학이었다. 그들은 최동원의 공을 쳐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특히 1977년 최동원이 1학년 때 연세대는 대학 각종 대회 4개를 쓸어 담는다. 그 당시 연세대에는 복학생 김봉연, 기업은행에서 온 박해종, 이광은, 신언호 등의 좋은 선수들이 있었지만 최동원이 없었으면 4관왕은 감히 엄두를 못 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양대라는 막강한 팀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한양대는 불행했다. 김시진, 김용남, 장효조, 이만수, 김한근, 김일권, 허규옥, 오대석 등 화려한 맴버 구성은 전관왕을 하여도 모자랄 팀이었지만 불행하게도 최동원이 버틴 연세대에는 기를 쓰지 못했다. 아마도 최동원이 대학에 가지 않았다면 그해 대학야구는 분명 한양대가 평정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당시엔 실업팀과 대학팀이 함께 출전하는 백호기 대회가 있었다. 원래는 실업야구 대회였는데 인기가 너무 없어 고육책으로 성인대회라는 미명하에 대학팀을 참가시키고 있었다. 1977년 그해 백호기 1회전에서 연세대는 실업야구의 최강팀인 한국화장품과 1회전에서 맞붙는다. 

당대 최고의 팀이 맞붙은 것이다. 대학의 최강 연세대와 실업의 최고수 한국화장품, 그리고 그 팀에는 최동원과 그해 타격 7관왕에 빛나는 김재박이 중심에 있었다. 김재박이 누구인가. 유격수면서 구원투수였고, 타격 또한 동방불패 당할 자가 없는 전천후 슈퍼스타였다. 한마디로 괴물이었다. 그런 김재박과 최동원이 드디어 승부를 하는 초유의 경기가 벌어지는 것이다.

결과는 연세대가 4-6으로 패한다. 대학야구에서 연투하느라 지쳐 있던 그는 제 실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최동원은 김재박과 두 번째 대결까지는 완승을 하지만, 3번째 대결에선 아쉽게도 적시 2루타를 맞는다. 최동원은 4실점 후 7회 투아웃까지 잡고 이광은으로 교체된다. 두 선수의 대결은 무승부 정도는 되지만, 팀은 7회에 구원 등판한 이광은이 9회말에 김재박한테 굿바이 투런홈런을 맞고 패했다.

살인적인 등판기록 '연간 264이닝'... 한국야구의 수치

 프로야구 롯데 대 해태 경기에 선발등판한 최동원과 선동열 투수./본사자료
//1987.5.18(부산=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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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롯데 대 해태 경기에 선발등판한 최동원과 선동열. 1987년 5월 18일. ⓒ 연합뉴스


그럼 최동원의 활약상과 기록을 간단히 집고 넘어가겠다. 1978년의 그의 투구는 더욱 빛을 발한다. 먼저 백호기대회에서 연세대는 결승에 올라 박철순이 버티고 있는 공군에게 패하여 2위를 한다. 물론 최동원은 연투를 한다. 상업은행을 이긴 후, 준준결승에서 한일은행을 상대로 탈삼진 13개를 잡으며 완투를 하고, 준결승에서는 최강 경리단을 맞아 1안타 완봉승을 따내고, 결승에선 0-2 완투패로 분루를 삼킨다.

놀라운 연투는 계속 이어진다. 그해 대통령기쟁탈 전국야구선수권대회에서 그는 4경기, 그러니까 전 경기를 지배한다. 당연히 팀은 우승한다. 간단히 기록만 옮겨 놓겠다.

영남대 - 6회, 투구수 78, 피안타 1, 사사구 1, 탈삼진 7, 자책점 0
동국대 - 9회 투구수 126, 피안타 3, 사사구 4, 탈삼진 9, 자책점 0
동아대 - 18회, 투구수 216, 피안타 5, 사사구 2, 탈삼진 19, 자책점 0
성균관대 - 9회, 투구수 159, 피안타 7, 사사구 2, 탈삼진 13, 자책점 2

동아대와 준결승에서 18회까지 가는 혈투 끝에 1-0으로 이긴 후, 다음 날 성균관대를 상대로 3-2로 이긴다. 모두 최동원이 완투를 했다. 이게 가능한가? 일설에 의하면 결승이 끝난 후 그는 탈진하여 병원으로 실려갔다고 전한다.

그리고 최동원은 국가대표로 세계선수권에 출전하여 작게는 1~2닝, 길게는 완투를 하며 거의 전 경기에 등판하였고, 결국은 마지막 니카라과전에서는 3실점 16탈삼진의 성적으로 완투승까지 한다. 국가대표에서도 그는 당연한 에이스였다.

살인적인 연투, 그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는다. 1979년은 그에게 불행과 행운이 겹쳐지는 한해였다. 봄철 대학리그 중 복학생 박철순에게 일명 '빳다사건'이 일어났다. 그 당시에는 선배한테 매를 맞는 것은 일상이었기 때문에 팀이나 사회적으로 문제시 되지 않았지만, 그 사건은 최동원의 증언에 의하면 정도가 조금 심했다고 한다. 하여 최동원은 팀을 이탈하여 몇 개월 태업을 한다. 연세대와 야구계는 발칵 뒤집혔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그는 몇 개월 후 팀에 합류한다.

그 사건으로 인해 최동원은 그해 경기에 등판하는 기회가 거의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이 그의 어깨를 조금이나마 보호하는 계기가 되었다. 뜻하지 않은 태업은 정신적으론 힘들었지만 육체적으론 달콤한 휴식이었다.

1980년은 정치 사회적으로 매우 혼란한 시기였다. 잠시 휴교령 등으로 대회에 차질이 있었지만 그래도 경기는 이루어졌다. 그 해에도 최동원은 꾸준히 각종 대회에 등판하여 완봉과 완투와 탈삼진 등을 낚았다. 1978년의 살인적인 연투는 없었지만 그래도 타 팀의 에이스 보다는 많은 경기에 등판을 했다. 봄철 대학야구대회에서 방어율상을 받았고, 백호기대회 1회전에서 당대의 최강팀 상무를 맞아 1대0 완봉승을 이루었고, 가을 대학야구선수권에서도 결승전에서 성균관대를 상대로 3-0 완봉승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세계선수권대회와 한미대학야구선수권에도 출전하여 활약을 했다. 국가대표에는 그 당시 국민적 에이스였던 이선희가 대단한 활약을 하고 있었고, 대학대표에서는 같은 4학년생 김시진과 김용남이 뒤늦게 좋은 피칭을 하였던 관계로 상대적으로 최동원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 사실 그때부터 그는 지쳐가고 있었다.

그렇게 최동원의 고교와 대학에서의 선수생활을 마감한다. 잠시 여기서 그의 기록을 총 정리해보겠다.

경남고 재학 32경기 19승 9패 66사사구 306탈삼진 34자책점 방어율 1.04
연세대 재학 134경기 70승 25패 190사사구 909탈삼진, 143자책점 방어율 1.62

연세대 시절 기록을 잠깐 분석해 보면, 이닝은 약 794이고, 3학년 때의 몇 경기는 없는 것으로 볼 때 연간 평균 44게임에 등판하여 게임당 평균 약 6이닝을 소화했고, 이닝당 탈삼진 비율은 1.14개이다. 그리고 게임당 사사구도 2개밖에 안 될 정도로 제구력이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방어율만 보더라도 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야구선수는 남는 게 기록인데, 하지만 이런 등판기록은 야구팬으로서 사실 좀 난감하고 수치스럽기까지 하다. 특히 국제대회까지 합했을 때의 등판 횟수는 살인적이 아닐 수 없다. 이게 가능한 기록일까. 연간 264이닝.

불꽃처럼 보낸 선수생활... 이제 신화가 되어 우리의 기억에

고 최동원 감독 추모 묵념 14일 오후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두산베어스 대 LG트윈스의 경기 직전 선수들이 故 최동원 감독을 추모하며 묵념을 하고 있다.

2011년 9월 14일 오후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두산 베어스 대 LG 트윈스의 경기 직전 선수들이 故 최동원 감독을 추모하며 묵념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드디어 야만의 1981년이 온다. 그해는 프로야구 출범을 위한 마지막 아마추어 시절이었다. 따라서 시험운영 차원에서 실업대회는 프로야구 리그 시스템으로 치루어졌다. 전기리그와 후기리그로 나누었고, 각 리그 우승 팀이 최종 코리안시리즈를 벌이는 시스템이었다. 1982년 원년 프로리그 시스템과 거의 동일했던 것이다.

그해 최동원은 우여곡절 끝에 롯데에 입단한다. 롯데는 1975년에 창단되어 세미프로라는 형식으로 운영되었던 팀이었고 당연히 다음 해에 프로야구 원년 부산을 연고지로 하는 팀으로 예약을 해놓고 있었다. 그래서 롯데는 부산이 낳은 최동원을 간절히 원했다.

하여튼 그는 전기리그부터 눈부신 활약을 한다. 그 결과 롯데는 13승 2패로 1위를 하여 코리안시리즈에 직행한다. 기록을 보자.

놀랍게도 최동원은 혼자 전기리그에 12승, 후기리그엔 봐줘서 5승을 책임진다. 팀이 소화한 324이닝 중에 그가 206이닝을 던진다. 60% 이상을 한 선수가 던진 것이다. 그리고 후기리그 1위 팀인 상무와 5전3승제의 코리안시리즈를 벌인다. 이 또한 기록을 보자.

10월 25일 1차전 9이닝 3실점 0-3
10월 26일 2차전 7이닝 무실점 4-5
10월 27일 3차전 6이닝 3실점 6-6
10월 29일 4차전 7이닝 3실점 7-4
10월 30일 5차전 3이닝 무실점 5-3
10월 31일 6차전 9이닝 4실점 6-4

6전 3승 2패 1무의 전적으로 롯데가 처음이자 마지막인 실업야구 코리안시리즈에서 우승을 했다. 그리고 당연히 최동원은 전 게임에 등판했고 결국은 마지막 게임에선 완투까지 한다. 얄궂게도 신은 3차전을 무승부로 만들어 한 게임을 더 등판하게 만들었다. 그게 그의 운명인지 모른다. 사나운 팔자가 아닐 수 없다. 참고로 그 당시 롯데 감독은 박영길이었다.

사실 1981년의 실업야구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프로리그의 전초전격이었기 때문에 그냥 워밍업 정도로 경기를 하더라도 책임을 묻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리그에서 우승을 하더라도 야구사에 중요한 기록을 남기는 것도 아니었다. 마지막 아마추어 시즌 우승이 무슨 명예가 있겠는가. 야구 광팬들에게도 1981년은 존재성이 미약하다. 

하지만 무슨 연유인지 롯데는 최동원에게 연투를 원했다. 오직 승리를 위해, 공장에서 과자를 생산하듯 최동원을 등판시키고 승리를 따낸다. 그는 팀이 원하는 대로 역투와 연투를 하며 팀의 승리에 자신을 불사른다. 자신의 어깨가 파괴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는 던지고 또 던졌다. 과연 누구를 위해 던지는지, 자신을 위해선지 팀을 위해선지, 그는 승리를 위해 자신을 장렬히 산화시켰다. 그런 현상을 우리는 혹사라고 한다.

롯데는 잔인했다. 그해뿐만 아니라 프로리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승리를 위한 욕망은 마치 기업의 포식성처럼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 승리의 욕망에 최동원은 결국 무너졌다. 팀은 선수를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 선수는 몸이 생명이기 때문에 혹사를 시키면 인간적 도덕적으로 용서받을 수 없다.

최동원은 한참 후 인터뷰에서 그 당시에는 그런 연투가 당연했노라고 담담히 받아주었지만, 객관적으로 볼 때 그런 살인적인 연투는 인간적인 면에서 결코 용납이 되지 않는다. 한마디로 인간적인 냄새가 안 난다. 그런 비인간적인 선수 기용의 최대 희생자가 바로 최동원이다. 롯데도 미치고, 최동원도 미쳤다. 광기의 시대였다.       

식자들이 말하기를 최동원의 전성시대는 1975년부터 1981년까지라고 한다. 프로야구에서 뛴 8년은 덤으로 얻은 결과물이라고도 말한다. 특히 선수회 사건으로 왕따를 당한 마지막 3년을 뺀, 1983년~1987년 롯데에서의 5년 기록(89승, 5년 연속 200이닝, 903탈삼진 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레전드급 성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에 가기 전의 그를 더 높이 평가하는 것은 그가 얼마나 뛰어난 투수였는지를 말해준다. 아마추어 마지막 시절과 프로의 태동기에 그가 야구계를 지배를 했고, 그가 있음으로 해서 야구는 존재했다.

그리고 식자들은 또 이렇게 가정을 한다. 최동원이 10년만 늦게 태어났어도, 우리나라 프로야구 지평은 현재의 모습이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박찬호의 위에 최동원이 있었을 것이고, 선동열의 위에 최동원이 존재했을 것이다. 또한 250승은 물론이고 300승을 한 전설의 주인공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제 그는 전설로 남았다. 불꽃처럼 선수생활을 했던 그는 이제 신화가 되어 우리의 기억에 저 하늘의 별처럼 자리를 잡았다. 한때 대단한 야구선수가 있었노라고 후대에게 말해줄 신화를 그는 우리에게 선사했다. 그래, 그는 진정한 이닝이터이며, 파이어볼러였다. 한 경기와 한 시대를 지배했던 진정한 파이어볼러였음을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동시대를 함께 한 나는 행복했노라고 그에게 말해주고 싶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에 쓰인 기록자료는 <동아일보>, 블로그 '약사의 야구 이야기(blog.naver.com/lalala5546)', 인터넷 카페 '비앤조이(cafe.daum.net/bnjoy)'에서 따왔습니다.
* 이 글은 필자의 블로그(jingi8816.tistory.com)에도 있습니다.
최동원 화이어볼러 이닝이터 강속구 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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