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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시절의 흐름은 축령산의 얼굴과 피부를 연한 초록으로 곱게 단장시켜 놓았다. 따사로운 우주의 빛과 생명의 기운은 산을 군데군데 노랗고 하얀 연지곤지 꽃들이 피어나도록 장식해 놓았다.

오랜만에, 다소곳이 조신한 모습으로 수줍어하는 축령산을 마주하며 문득 그가 마치 초례청의 순진한 색시처럼 어여쁘게 여겨지는 생각이 드는 건 지나친 상상의 산물일까? 연둣빛 쪽머리 하얀 이마를 살짝 드러낸 축령산을 마주하며 느끼는 설렘이 있었다. 좁디좁은 인간의 '깜냥'으로는 도무지 헤아릴 수 없는 무한히 순환하는 자연의 세계, 우주의 섭리에 대해 감히 구차한 수사가 더 필요한 것일까?

축령산 숲에는 일제시대 부터 조림이 시작되었다고 하는 아름드리 잣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 하늘을 향한 곧은 직립 축령산 숲에는 일제시대 부터 조림이 시작되었다고 하는 아름드리 잣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 윤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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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령산과 서리산 사이에 '절골'로 오르는 제법 경사가 급한 오르막이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르막에 지쳐 헐떡이는 부실한 심장을 위로하는 잣나무 숲 그늘이 있었다. 숲 속 그늘의 쉼터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무심코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로 향해 곧게 뻗은 키다리 잣나무 군락의 평화로운 직립이 있었다. 진초록 바늘잎의 무성한 가지가 온통 사방으로 거만하지 않게 뻗어 청명한 하늘빛의 호수를 만들어 놓았다. 하늘이 바람에 가볍게 출렁이며 옅은 흰구름을 섞어 놓으니 그건 바로 고요의 바다였다.

사람들아, 나를 밟고 걸으라...

아름드리 잣나무가 가득한 호젓한 숲 속에 착한 길이 있었다. 소임을 다하고 쇠락한 낙엽들은 가루로 썩고 분해되어 나무와 숲을 구하는 부엽토로 소생하였다. 그리고는 숲에 뿌려져, 길에 흩어져 또 다른 그들만의 소임을 새롭게 감당하고 있었다. 자신을 던지고 내려놓아 만물을 살리는 생명의 공양... 숲 속 길에서 그들이 이르기를, '사람들아 나를 밟고 고요히 걸으라'하며 길을 내주었다.

축령산 잣나무 숲은 평화로운 치유의 숲이었다.
▲ 사람들아, 나를 밟고 걸으라... 축령산 잣나무 숲은 평화로운 치유의 숲이었다.
ⓒ 윤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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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속에 난 길을 따라 바람이 되어 걸었다. 사랑을 나누는 뭇 산새들의 지저귐은 영롱한 치유의 음향으로 숲 속에 청아하게 울리고 있었다. 그 소리는 뭉친 가슴을 억누르던 고뇌를 녹이는 약이었고, 맑은 위로였다. 무거움을 느낄 수 없는 가벼움으로 걸음이 내딛어졌다. 마음과 몸을 괴롭히던 무수한 삼라만상의 사슬들이 저절로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양쪽 가슴에 답답하게 갇혀있던 묵은 숨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카타르시스 꼭 그런 느낌이었다.  

잣나무 숲 흙길 임도를 따라 걷는 내내 왜 그렇게 행복했는지 모르겠다. 말이 필요 없는 자유로운 숲의 평화... 사람들과 허물없이 나누는 이야기 속에는 잔잔한 미소가 양념처럼 있었다. 바라다 보이는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숲의 너그러운 모성을 느끼게 했다. 잣나무 사이를 그네처럼 타고 흐르는 시원한 바람은 이마에 땀을 식혀주는 차가운 수건이었고, 휘날리는 송화가루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는 연둣빛 안개가 되었다. 

축령산 치유의 숲에서 만난 산목련
▲ 산목련 축령산 치유의 숲에서 만난 산목련
ⓒ 윤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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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속에는 수많은 들풀과 나무들이 살고 있었다. 길가에는 초록의 쇠뜨기가 줄을 이었고, 쑥대밭이었으며, 미나리아제비 노란꽃은 어쩜 그렇게 예뻤는지 모른다. 산방꽃차례로 가지마다 층층이 하얗게 피어난 '층층나무'가 있었고, 부끄러워 고개 숙인 하얀 산목련꽃의 애틋한 자태가 있었으며, 때죽나무와 팥배나무, 그리고 그들을 아우르며 품고 있는 장대한 숲의 병정 아름드리 잣나무가 있었다. 그 아름다운 숲을 통해 시각과 청각, 후각, 공감각적으로 전해져 오는 그림과 노래, 향기와 촉감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한 편의 공연이었고, 희열과 감동을 자아내는 창조적인 조화로움이었다.

숲 속의 아리아가 울려 퍼지고...

사람들과 숲에서 노래했다. 한시를 조아리며 읊었다. 숲 속 바다에 일렁이는 맑고 고운 목소리는 산새소리와 어우러져 숲 속의 아리아가 되었고, 넌지시 읊어대는 한 토막 한시는 절로 이백의 '파주문월'이 되었다.

지금 사람 옛 달을 보지 못하였으나
지금 달 일찍이 옛사람 비추어 왔네
옛 사람이나 지금 사람이나 모두 흐르는 물과 같아서
밝은 달 보는 것이 이와 같았지
바라노니 술 마시고 노래할 동안이라도
달빛은 오래도록 술잔을 비추기를...

축령산 잣나무 숲에서 나누었던 노래와 시, 유쾌한 이야기와 맛난 음식은 그렇게 모두에게 참을 수 없는 충만함과 잔잔한 행복을 가져다주고 있었다.

산새 소리와 어우러져 울리는 노래소리는 숲 속의 아리아였다.
▲ 숲 속의 작은 음악회 산새 소리와 어우러져 울리는 노래소리는 숲 속의 아리아였다.
ⓒ 윤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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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 있는 구름다리를 건넜고, 올챙이 떼가 꼬물꼬물 바글거리는 아담한 호수를 지났다. 길을 걸으며 향기로운 피톤치드로 목욕을 했고, 소박한 길 위에서 깨소금처럼 달콤한 낮잠도 짧게 누릴 수 있었다. 걸어가다가 쉬었고, 쉬면서 걸어갔다. 꼬리치며 안내하는 길의 끝자락을 따라 사람들이 소곤소곤 길을 걸었다.

축령산 잣나무 숲에서 만나 교감하며 체험했던 그 모든 것들에 의해 사람들은 스스로를 치유하고 있었다. 스스로를 위로하는 마음, 아픔과 상처를 다독이며 보듬는 마음, 갈등과 증오를 버리고 덜어내는 자기만의 평온한 치유...숲은 만인에게 벗이었고, 자애로운 의사였다. 그렇게 우리는 숲을, 길을 누리며 향유했다.

잣나무 가득한 축령산 치유의 숲을 사람들과 걸었다.
▲ 치유의 숲 잣나무 가득한 축령산 치유의 숲을 사람들과 걸었다.
ⓒ 윤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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잣나무 숲 둘레길을 가로질러 놓인 나무계단을 걸어 내려왔고, 물레방아 도는 너와집 쉼터를 지나며 맑디맑은 숲의 공기를 흠뻑 마셔 취했다. 피곤한 정수리를 차갑게 적셔 흘러 순간적으로 정신을 차리게 만드는 한 줄기 소나기처럼 치유의 숲은 상쾌했다. 그 아름다운 숲에서 사람들은 수많은 초록의 들풀들과 이야기 하고, 가슴으로 나무를 안아 보듬으며 자연과 동화되어 가고 있었다.

햇빛 맑았던 어느 초 여름날, 축령산 치유의 숲에서 함께 동행 하며 길을 걸었던 사람들의 표정에는 발그레하게 염화시중의 미소가 은은하고 향기롭게 피어나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 지난 6월 2일 <고양올레>에서 축령산 잣나무 숲 둘레길을 걷고 와서 쓴 글입니다.
도보 구간 : 축령산 매표소~잔디광장~절골~잣나무 숲 서쪽 임도~구름다리~너와집~잣나무 숲 동쪽 임도~호수~너와집~행현리까지 약 12.5km



태그:#축령산, #축령산 잣나무 숲, #고양올레, #치유의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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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시에 걷기 좋은 길을 개척하기 위한 모임으로 다음 카페 <고양올레>를 운영하는 카페지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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