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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모르겠는데예…."

 

지난 11일 경남 창원에서 만난 황영식(50)씨는 '진보정당을 아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같이 답했다. 옆에 있던 누군가가 "최근에 뉴스에 많이 나오고 있다"고 하자, 황씨는 그제야 "선거 부정 때문에 싸우는 당이지예?"라고 반문했다. 그러면서도 당 이름을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

 

황씨는 지금껏 경남의 여러 조선소에서 하청업체 노동자로 일해 왔다. 용접 부위를 매끄럽게 다듬는 사상 작업이 그의 일이다. 황씨는 건설현장의 '십장(작업반장)'처럼, 그가 데려온 10여 명의 동료들과 함께 조선소 하청업체에 소속돼 일했다. 하지만 최근 회사는 노동자 86명의 임금 2억2000만 원을 체불한 채 문을 닫았다.

 

황씨의 작업반도 임금 2100만 원을 받지 못했다. 동료들에 대한 체불임금은 온전히 그의 몫이다. 그는 지난해 9월에도 다른 조선소의 하청업체에서 일하다 2800만 원의 임금을 떼인 적이 있다. 수천만 원의 빚이 아직도 쌓여있다.

 

황씨는 "조선산업 경기가 좋지 못해, 경남의 중소 조선소 하청노동자 10명 중의 6~7명은 임금체불을 경험할 정도로 상황이 심각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역 사회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 진보정당도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황씨가 "선거 때만 표를 구걸하는 새누리당과 진보정당의 차이를 모르겠다"고 말하는 이유다.

 

통합진보당·진보신당으로 대표되는 진보정당은 지금껏 노동자를 대변하는 정당이라고 자부해왔다.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유권자에게 한 표를 호소했다. 하지만 지난 4·11 총선에서 진보정당은 울산과 경남 창원·거제를 잇는 노동자벨트에서 단 한 명의 국회의원도 탄생시키지 못했다.

 

정치평론가들은 "진보정당의 분열 때문에 졌다"고 평했다. 하지만 이는 피상적인 평가라는 지적이 나온다. 경남의 한 비정규직 활동가는 "노동자 벨트의 진보정당은 노동자를 대변하지 못했다"며 "정규직 노조에 끌려 다니느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귀담아듣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진보정당에게 노동자란? "표와 돈"

 

진보정당에게 노동자는 어떤 의미일까? 한 비정규직 활동가는 "표와 돈"이라고 말했다. 조직된 정규직 노동조합을 기반하고 있는 민주노동당이 2008년 분당된 후, 민노당 후신인 통합진보당과 진보신당이 정규직 노동자들의 표와 정치후원금을 놓고 경쟁에만 몰두했다는 것이다.

 

결국 그 과정에서 진보정당은 정규직 노조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정규직 노조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활동을 방해해도, 진보정당은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한 활동가는 "관료화된 정규직 노조가 비정규직 노동자보다는 회사에 더 가깝다"며 "진보정당은 이러한 노조의 꽁무니만 쫓아다닌다"고 전했다.

 

경남 지역 대기업의 비정규직 해고자인 강병재씨는 "진보정당 생각하면 암담하다"고 말했다. 강씨는 비정규직 조직화 사업을 하다가 2009년 3월 회사에서 쫓겨났다. 그는 이후 정규직 노조의 도움을 받지 못하자, 결국 당시 민노당 한 지역위원회에 문을 두드렸다. 강씨는 비정규직이라는 상징성 탓에 주목을 받았다.

 

강씨는 민노당 지역위원회 비정규직 위원장을 맡았고, 2010년 지방선거에서는 민노당 경남도의원 후보로 출마했다. 하지만 당 내에서 비정규직을 바라보는 시선이 싸늘했다. 강씨는 "매월 비정규직 소식지 1만2000부를 만들어 출근 시간 때 통근버스와 출입구에서 나눠줬다"며 "당시 단 한 명의 당원도 도와주지 않았다"며 씁쓸해했다.

 

그는 또한 "소식지를 조선소 구내식당에 비치해놓을 수 있도록 정규직 노조에 요청했지만 묵살당했다, 당은 이를 바로잡으려 하지 않았다"며 "진보정당 활동에 대한 희망을 잃었다"고 말했다. 그는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해 2011년 3월 송전탑에 올랐다. 하지만 지역 사회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같은 해 6월 88일 만에 내려왔다.

 

강씨는 그해 10월 탈당했다. 그는 당시 "노동자계급을 배신한 민주노동당을 탈당하며"라는 제목의 글에서 "(민노당은) 비정규직 조직화에 연대하지 않았다"며 "그러면서 선거 때만 되면 비정규직에게 민노당에 투표하라는 이중성을 아무렇지 않게 선전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몰염치한 정치집단이 아닐 수 없다"고 비판했다.

 

경남 창원의 한 비정규직 노동자는 4·11 총선 직전 진보정당을 탈당했다. 그는 "오래 전에 입당했지만, 연락 한 번 없다가 총선 직전에 '지지해 달라'는 문자 한 통이 왔다"며 "탈당계에 '당비 내는 것조차 아깝다'고 써서 당에 보냈다"고 말했다.

 

비정규직 노동자 앞에서 마이크조차 잡지 못한 이정희

 

4·11 총선 선거운동 시작 전날인 3월 28일 이정희 당시 통합진보당 대표가 울산을 찾았다. 그는 이날 현대자동차 공장 앞에서 열리는 비정규직 노조의 수요 집회에 참석해 지지연설을 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이정희 대표의 집회 참여와 연설을 거부했다. 오히려 이 대표를 규탄하는 피켓 시위가 계획되기도 했다. 그만큼 진보정당에 대한 불신이 컸다. 이러한 불신은 지난 2010년 11월 시작됐다.

 

당시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 550여 명이 차별 시정을 요구하며 울산1공장을 점거했다. 점거 파업이 장기화되자, 당시 이정희(민노당)·조승수(진보신당) 의원 등이 포함된 야4당 중재단이 "먼저 파업을 푼 후에, 회사와 협상을 하라"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압박했다. 결국 이들은 점거 25일 만에 스스로 공장 밖으로 나왔다.

 

이후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회사의 보복을 감내해야 했다. 104명이 해고되고, 파업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1092명이 징계를 받았다. 또한 200억 원에 달한 손해배상 청구소송도 제기됐다. 한 비정규직 노동자는 "중재단이 정규직 노동조합의 입장에 따라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압박을 했다"며 "진보정당은 더 이상 비정규직 노동자를 대변하지 못함이 드러났다"고 지적했다.

 

박점규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 집행위원은 "진보정당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투표장으로 끌어들이지 못했다"며 "앞으로도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대변하지 못하는 진보정당이라면, 그 존재 이유가 없다"고 지적했다.


태그:#통합진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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