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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시끄러운 요즘이다.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러 4월 11일 이후 붕괴된 '멘탈'(Mental)이 그럭저럭 수습되는가 싶었더니, 이번에는 통합진보당 사태가 그들에게 많은 지지를 보냈던 이들을 허망하게 만들고 있는 중이다. 아무리 봐도 루비콘 강을 건넌 듯하다. 아직까지도 차마 분당을 입에 올리지 못하는 그들.

물론 진보정당과 관련해 과거 소위 'NL-PD의 역사'를 아는 사람들은 터질 문제가 터졌다며 사태를 비교적 덤덤히 지켜보고 있지만, 문제는 최근에야 정치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이들이다. 아마도 그들은 이번 사태를 바라보면서 많은 혼란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도대체 뭐가 문제이고, 누가 잘못인 것인지.

진보의 위기?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진보세력의 오래되고 잘못된 관행이 마치 MB정부의 부패와 거의 동급인 것처럼 신문지면 1면에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있는 보수언론이야 원래 그랬다고 치자. 그러나 트위터 상에서는 어제의 동지였던 이들이 서로 치고 박고 있다. 상상 이상이다. 그러니 잘 모르는 이들이 보면 그 시시비비를 막론하고 진보정당 자체에 실망하고 염증을 느낄 수밖에.

도대체 왜 그들은 기존의 구태의연한 모습으로 국민들에게 좌절을 안겨주는 것일까. 아직 우리 사회에서 감동스러운 정치를 구경하는 건 무리일까. 비록 대선을 염두했기 때문이라는 폄훼도 있지만, 어쨌든 50% 지지율을 보인 안철수 원장이 5%의 지지율을 보였던 박원순 변호사에게 서울시장 후보 자리를 양보하는 모습은 감동이었다. 이제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 것일까.

이와 관련해 내 머릿속에 떠오른 일화가 있다. 지난 4월의 어느 밤의 일이었다. 산청에서 열띠게 토론이 벌어졌던 바로 그 술자리였다.

우리 모임의 이름은 '가자 산청'

막 개업한 산청의 커피 전문점
▲ 인문학 까페를 꿈꾸는 솔직한 곰 막 개업한 산청의 커피 전문점
ⓒ 오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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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결혼하기 전부터 열심히 나가던 모임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타지에서 생활하는 산청 출신 젊은이들의 모임이었다. 향우회 비스무리한, 이름은 '가자 산청'. 뭐, 이름까지 있으니 거창하게 보일 뿐, 결국 산청이라는 좁은 공간에서 형님, 아우하며 어린 시절을 함께 했던 이들 중 성향이 비슷한 이들이 모인 것이었다.

다행히 난 그들과 성향이 비슷해 어렵지 않게 그 일원이 됐고, 아이 때문에 바깥 생활에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는 아내를 대신해 오히려 더 활발히 멤버들과 우애를 나누고 있는 중이다. 판화가, 천주교 수사, 광고쟁이, 학교 선생님, 백수, 물리학 박사, 뮤지컬 작가, 회사원 등 각계 각층의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술 한 잔과 함께 세상을 논하는 모임. 그날은 학교 선생님과 전 공무원 부부가 산청 읍에 핸드드립 전문 커피점을 차려 그 개업을 축하하고자 만난 자리였다. 시각은 새벽 1시쯤.

언제나 그랬듯이 우리의 이야기는 소소한 일상에서부터 시작해서 과학, 역사, 정치, 경제까지 그야말로 널을 뛰었지만, 4월 총선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라 화두는 어느덧 총선으로 굳어졌다. 산청에서는 '여전히 어르신들이 길게 줄을 서서 1번을 찍었다'는 목격담을 시작으로 각자의 멘붕(멘탈 붕괴) 사례가 이어졌다. 이어 4월 총선 패배에 대한 분석들이 오갔다. 그동안 여러 매체를 통해 접해왔던 수많은 요인들. 미디어의 역할, 야당의 안일한 태도, 박근혜의 무서움 등등. 결국 문제는 투표율로 귀결됐는데, 대선에는 과연 투표율이 60%를 넘을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이 솓았다.

투표를 하지 않았다던 행님의 한 마디

밤늦은 까페의 풍경
▲ 치열한 토론 밤늦은 까페의 풍경
ⓒ 오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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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였다. 판화를 제작하는 화가 행님(물론 표준말은 형님이지만 아무래도 행님이 더 어울릴 듯하다)이 말문을 연 것은. 평소 정치 이야기가 오고 가더라도 묵묵히 듣고만 있어서 정치에는 관심이 없는 양반인 줄 알았기에 그의 발언은 그 자체만으로도 다른 이들에게 놀라움이었는데, 그 내용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행님이 말했다. 자신은 이번 총선에 투표를 하지 않았으며, 그 역시 명확한 의사 표현이었다고. 그가 투표를 하지 않은 이유는 분명했다. 투표라는 행위 자체가 현재 우리 사회의 이데올로기가 규정해 놓은 요식행위이기 때문에 투표로써 세상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고 선거를 통해 세우려는 사회가 어차피 근대체제 속에서 구조적으로, 역사적으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

당연히 수많은 반론이 튀어나왔다. 술도 한 잔 했으니 아무리 행님의 의견이라도 거침 없었다. 우선 왜 세상이 변하지 않느냐는 항변. 투표를 잘해 사람이 바뀌면 세상이 좀 더 나아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최근 박원순 시장을 통해 보고 있지 않은가. 또한 그렇게 해서 투표를 하지 않으면 더 나쁜 놈들이 집권해 세상이 더 힘들어질 것인데, 투표를 하지 않고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결국 우리가 먼저 해야 할 것은 각 계급의 사람들이 그 계급에 맞는 투표를 할 수 있도록 교육하는 것 아니던가.

그러나 행님은 이와 같은 반론들에 대해 우리들이 잊고 있었던, 혹은 차마 꺼내지 못했던 한 단어를 꺼냈다.

"혁명."

나부터 변해야 한다


행님이 선물한 우리 부부 청첩장 : 실제로 보면 엄청 크다
▲ 이칠효 작 행님이 선물한 우리 부부 청첩장 : 실제로 보면 엄청 크다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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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혹에 접어드는 행님은 "혁명은 일상에서부터 시작돼야 한다"고 운을 띄웠다. 선거 결과에 일희일비하는 소위 '입 진보'보다는 자신의 일상을 바꿔 삶의 태도에 많은 이들이 감응하게 된다면 그것이 더 근본적인 개혁이고 혁명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직까지 예술을 한다는 행님.

물론 행님의 이와 같은 발언에 대해서는 그 뒤로도 몇 시간 동안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아무리 그래도 현실적으로는 투표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 만약에 혁명을 해야 한다면 그 수단은 무엇이냐 등 여러가지 이야기가 오갔다. 그리고 늘 그렇듯 술자리는 결론 없이 훗날만 기약한 채 끝났다.

그러나 술이 깨고 나서 곰곰이 떠올려보는 행님의 발언은 다시금 나를 뒤돌아 보게 만들었다. 내가 너무 현실의 구조 속에 갇혀 새로운 상상을 못하는 것은 아닌지. 세상의 모든 체제는 결국 언젠가 변하기 마련인데, 역사를 공부했다는 내가 현대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체제에 너무 매몰돼 있는 것은 아닌지.

행님의 말처럼 내가 원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투표가 아닌 나의 삶을 우선 바꿔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탈핵을 추구하고자 한다면 나부터 전기를 아껴야 할 것이고, 친환경을 주장하려면 나부터가 소비의 패턴을 바꿔야 한다. 도시 빈민 주제에 농촌보다는 도시에서의 삶을 고집하는 나의 모습은, 계급에 맞지 않는 투표를 하고 있는 시골의 촌로와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난 내 스스로를 '입 진보'가 아니라고 자신할 수 있을까. 누릴 건 다 누리면서 투표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건 결국 비겁한 자위가 아닐까. 행님의 말대로 변화란 궁극적으로 내 자신으로부터 시작되고, 내 삶이 타인에게 감응을 줄 수 있다면 그것이 곧 혁명 아닐까.

괴물과 싸우다 괴물이 되지 않길

창에 비친 산청과 창에 비친 행님 작품
▲ 까페의 창 창에 비친 산청과 창에 비친 행님 작품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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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맥락으로 최근 벌어지고 있는 통합진보당 사태를 바라본다. 스스로의 혁명 보다는 정치공학에 매몰돼 아귀다툼을 벌이는 이들. 2012년의 시대정신이 그들이 괴물과 싸우면서 괴물이 돼가는 것을 원치 않는다. 부디 스스로를 냉철하게 다시 바라보길 바란다.

끝으로 혁명을 논했던 행님의 술 깬 다음 날 올린 수줍은 고백을 옮겨본다.

어느날
걸개그림이 걷히고
굿소리가 잦아드는 때가 되어
그림 그리는 일이 혁명의 소소한 기술이 되거나
하다못해 실존의 그림자를 논하는 주술 정도는 되리라 믿었던
가련하고도 어렸던 미술학도는
어느날 또다시 불혹이 되어
예술은 기술도 주술도 아니고
어느날에는 그냥 술이란 걸 알게 되었다오
그러니 벗들이여 용서하시라
그리하여 '민주'가 창궐하고 '과학'이 만연하니
나는 술이 과하고 살날은 아직 불혹만하다
까부는 거 용서하시라

-  이칠효

덧붙이는 글 | 난상토론의 공간을 제공한 곳은 산청읍 소재의 까페 '솔직한 곰'입니다. 동네분들에게 맛있는 커피를 대접해 드리고, 많은 이들의 아지트로서 인문학 까페를 꿈꾸는 이곳 이야기는 추후에 가끔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태그:#혁명, #총선, #솔직한 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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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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