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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롯데리아 구영점, 전남 농협은행, 경상북도 청소년지원센터, 대구혜화여자고등학교, 경남 진영신문, 동래 제일교회, 한국전력공사, 연합뉴스 편집부 등의 명함을 현재 가지고 있거나 전에 지녔던 사람들 사이에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그런데 갑자기 그들에게 같은 명함이 생겼다. 문인의 명함이다. 시인, 시조시인, 동시인, 소설가, 수필가, 극작가... 살아온 여정이 다르고 직업도 제각각인 10명의 '문학청년'들이 본격적인 문학 창작의 길에 들어섰다.

'문학예술의 지방화, 그리고 대중화'를 주창하는 계간 <영남문학> 2012년 봄호를 통해 10명의 전문 문학인들이 탄생했다(수상자는 지난 4월 1일 발표). 시의 김근열, 배지수, 시조의 김창석, 동시의 이강순, 수필의 김진호, 박원철, 장정동, 소설의 이영희, 홍혜자, 희곡의 김종해 신인들이다.

김근열 시인과 심사평 일부
 김근열 시인과 심사평 일부
ⓒ 영남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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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밭에 앉아
파를 가만히 바라보면
파 음계가 튀어나올 것만 같다
손가락으로 툭 튕기면 파
바람이 휙 지나가도 파
비가 내리쳐도 파
소리가 날 것만 같다

파 끝을 모두 잘라내고
잘라낸 대롱 끝에 입을 오므려
후-욱 불면
파파파파파파파
파 소리가 파도처럼 밀려올 것만 같다

우울하고 슬픈 날엔
파밭에 앉아
그가 꼿꼿이 서서 하라는 대로
파-아
하고 큰 목소리로 한번 내질러봐라
콧등이 매캐해질 것이다

김근열의 신작 중 <파밭> 전문이다. <파밭>은 언어의 음악성을 최대한 품격있게 살려내는 것이 시인 본연의 임무임을 작가가 익히 알고 있다는 사실을 잘 증언해준다. 이태수 심사위원(시인)은 김근열의 시에 대해 "언어 감각과 시적 감상이 첨예하게 반짝이고 있다"고 평했다.

배지수 시인과 심사평 일부
 배지수 시인과 심사평 일부
ⓒ 영남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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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신비와 그에 대한 경외심을 절제된 언어로 형상화한 배지수의 <입춘 즈음에> 등도 작가 자신에게 시인의 명함을 만들어줬다. '활어처럼 싱싱한 시가/ 내 안에서 펄떡거려/ 세상 밖으로 뛰쳐나올 그 날을/ 오늘도 꿈꾼다'는 배지수의 신작들은 "동심처럼 순수하고 투명한 마음자리'를 바탕으로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맑고 그윽한 삶에의 꿈을 자연의 섭리와 포개 아름답게 길어올린다"는 평가를 받았다(이태수 심사위원). <입춘 즈음에>를 감상해보자.

베란다 구석진 자리
눈길 손길 뜸했던 수선화 화분
작년 봄
줄기만 웃자라더니
맺었던 여섯 몽우리 쭉정이로 말라 버렸지
노란 꽃잎 환하게 터뜨릴 날 함께 기다리다가
나도 저처럼 메말랐던가

오십오 년만에 찾아온 한파
강한 베고니아조차 얼어서
서걱거리며 내려앉던 날
화분 속 굳은 흙더미 헤치고
파란 새순 가만가만 드러내놓는다

김창석 시조시인과 심사평 일부
 김창석 시조시인과 심사평 일부
ⓒ 영남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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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작으로 자유시 80여 편과 정형시 250여 편 이상의 습작 활동을 하고 있다"고 토로하는 김창석은 '민족시' '겨레시' '전통시' 등의 영예로운 이름을 가진 시조를 발표하며 문단에 등단했다. 전남 강진 출신인 김창석은 당선소감에서 "겁도 없이 뛰어들었지만 특히 남도 지방의 시조에 관한 많은 공부를 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아래는 그의 <고로쇠> 전문이다.

겨울을 빗겨서니 햇볕은 난만해도
새싹은 아직 멀어 동면에 취했는데
뿌리는
잠에서 깨어
새벽을 열고 있다.

물 긷는 중노동에 온몸은 심란하고
죄 없이 죄를 짓는 태생의 한이 되어
혼미한
정신을 차려
뿌리에 힘을 준다.

제 몸의 혈관 찾아 사지에 링거 꽂고
뽑아낸 핏물들은 가슴에 고이는데
빈혈의
어지럼증은
어디쯤 내려둘까.

김창석은 신인다운 패기를 보여준다. 그가 이번에 발표한 <고로쇠> <일몰> <겨울 보리밭> 세 편은 모두 초장과 중장은 1행으로 돼 있지만, 종장만은 한결같이 3행으로 줄갈이를 하고 있다. 형식의 실험성을 보여준 것이다. 이에 대해 이태수 심사위원은 "시조의 전통적인 형식을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현대시가 가지는 특징과 장점들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고 호평했다.

이강순 동시인과 심사평 일부
 이강순 동시인과 심사평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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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큼 털털
막걸리 냄새 나면
할아버지 방귀

보들보들
고소한 두부 냄새 나면
할머니 방귀

까슬까슬
매캐한 땀 냄새 나면
아빠 방귀

침, 꼴깍
고슬고슬한 밥 냄새 나면
엄마 방귀

긁적긁적
꼬질꼬질
콧구멍 냄새 나면
사랑 가득 받고 사는
내 방귀

이강순의 동시 <방귀 가족> 전문이다. 읽는 동안 저절로 입가에 저절로 밝은 웃음이 일어나게 함으로써 독자의 마음을 환하고 건전한 세계로 이끌어가는 동시의 본령을 잘 드러낸 수작이다. 권영세 심사위원은 <방귀 가족>을 두고 "가족 구성원들의 개별적인 생활 방식과 신체적인 특징을 식구들의 방귀 냄새로 구별하여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 매우 독창적"인 작품이라고 호평했다.

김진호 수필가와 심사평 일부
 김진호 수필가와 심사평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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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철 수필가와 심사평 일부
 박원철 수필가와 심사평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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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동 수필가와 심사평 일부
 장정동 수필가와 심사평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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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에도 대구혜화여고 교사 김진호 씨는 작품 <경계와 절제>로, 경남 <진영신문> 대표 박원철 씨는 작품 <아내의 무기>로, 한국전력공사 처장 출신의 장정동 씨는 작품 <그리움의 바다>로 '수필가' 명함을 받아들었다. 세 분의 수필은 서로 경향을 판이하지만 각각 하나같이 수준작들이다. 길이 때문에 전문을 독자에게 보여드릴 수는 없고, 그렇다고 축약을 하여 '이본'을 소개하는 것도 작가에 대한 예의가 아닐 터, 그것이 다만 안타까울 뿐이다.

소설로 등단한 두 분과 보기 드물게 희곡으로 문학 활동을 시작하는 다른 한 분에 대한 소개를 이어가자. 수필보다도 훨씬 더 장문인 세 글의 성격상 전문을 싣지는 못했다. 다만 현직 전도사인 이영희 씨의 소설 <배꽃 이울다>와 전직 기자인 홍혜자 씨의 소설 <함창역>, 그리고 연출가인 김종해의 희곡 <면회>가 문학잡지 <영남문학>에 신인상 수상작으로 게재된 것은 상당한 의미를 지닌 사건이라는 말만은 꼭 해두고 싶다.

면적 대비 12%에 불과한 수도권에 인구 49%, 금융 67%, 대기업 본사 88%, 제조업 56%가 몰려 있는 우리나라의 특성에 견줘볼 때, 지방에서 정기적으로 문학잡지를 발간하는 것은 그 자체만도 정말 어려운 일이지만, 특히 필자가 거의 없는 상황에 소설과 희곡을 게재하는 것은 좀처럼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영희 소설가와 심사평 일부
 이영희 소설가와 심사평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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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혜자 소설가와 심사평 일부
 홍혜자 소설가와 심사평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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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해 극작가와 심사평 일부
 김종해 극작가와 심사평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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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를 나온 이들은 나라 곳곳에 세워져 잇는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는 붉은 간판에 자긍심을 느낀다(이들을 나무랄 의도는 아니다). 하지만, 이런 구호보다 '한 번 문학청년은 영원한 문학청년'이라는 구호가 국민들의 생활 속에 자리를 잡을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상상력과 정서적 충만을 가슴 깊이 간직한 채 사람답게 살아가는 국민들이 많다면 '함께 살아가는 아름다운 세상'을 세워가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것은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런 뜻에서, 지방에서 발행되는 문학잡지에 창작을 발표하며 새로운 문인들으로 등단하는 신인들에게 축복이 있기를 기대한다.


영남문학 2011.여름 - Vol.5

영남문학 편집부 엮음, 영문출판사(2011)


태그:#영남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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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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