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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자의 날(1일), 어린이날(5일), 어버이날(8일), 스승의 날(15일), 가정의 날(15일) 등이 들어 있어 '경로효친의 달'로 불리는 5월이 시작됐다. 음력(陰曆)으로는 '윤삼월'로 본격적인 농사철을 앞두고 있어 농촌에서는 '고양이 손이라도 빌린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바쁜 시기.

필자가 사는 군산시 나포면은 망해산 줄기와 십자뜰, 만호뜰이 포근하게 감싸고 있는 농촌이어서 논두렁과 밭두렁 모습이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으며 야산에서 풍기는 은근한 쑥향은 할머니들 손길을 더욱 바쁘게 한다.

여름의 문턱 입하(立夏)를 나흘 앞둔 어제(1일)였다. 아침부터 '뽕짝 메들리'가 엉덩이를 들썩이게 했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조금 후 마을 스피커에서 걸걸한 목소리의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오전 10시부터 면사무소 앞 주차장에서 경로잔치가 열리니 주차를 다른 곳에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제1회 나포면 경로 한마당 잔치’가 열리는 면사무소 앞 주차장 풍경
 ‘제1회 나포면 경로 한마당 잔치’가 열리는 면사무소 앞 주차장 풍경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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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경로잔치인지 호기심이 동했다. 해서 아침은 건너뛰기로 하고, 카메라와 수첩을 챙겼다. 집에서 면사무소까지 거리는 약 150m. 주차장에 설치해놓은 먹을거리 부스들과 하늘에 둥실 떠 있는 애드벌룬이 제1회 나포면 경로 한마당 잔칫날임을 알리고 있었다. 

행사장에 도착한 시각은 오전 10시 10분. '나포 십자뜰 풍물패' 단원들의 신 나는 풍물 한마당이 분위기를 돋우고 있었다. 첫째 마당 우질굿이 끝나고 오방진으로 시작하는 둘째 마당에서는 구경만 하던 할머니들이 손 박자를 맞추었고, "얼씨구 잘 헌다!" 소리도 터져 나왔다.

"팔십 넘으믄 대학에 가야 혀. 황천대학··"

어른들 머리를 정성껏 다듬는 이·미용 봉사자들.
 어른들 머리를 정성껏 다듬는 이·미용 봉사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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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부스에서는 남·여 미용사 4~5명이 할머니 할아버지 머리를 잘라주고 있었다. 자세를 바꿔가며 가위질하는 미용사들과 차례를 기다리는 어른들, 흐뭇한 표정으로 눈을 지그시 감고 앉아 있는 어르신들 모습이 구경하는 사람 마음마저 넉넉하게 해주었다.

서포(이웃마을)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그곳에서 살고 있다는 문종기(80) 할아버지는 "손녀딸 같은 사람들이 예쁜 손으로 머리를 꼼꼼하게 잘라주고 면도까지 해주니까 기분이 참 좋다"면서도 "지난달에 갔던 이발소 간판이 보이니까 쪼끔 껄쩍지근허요"라며 빙긋이 웃었다.

차례를 기다리던 어른은 "젊은이들이 노인들 위해 벌인 잔치라고 허는디, 이발까지 혀주니께 미안하구만, 남자는 팔십 넘으믄 대학에 가야 혀. 황천대학"이라며 "나도 한 5년 더 살믄 팔십이지만, 때가 되믄 남들 성가시게 말고 대학에 가야 헌당게"라고 했다. 다른 어른들도 웃으며 동조했으나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다.  

미용사들은 대한미용사회 군산지부(지부장 이옥란) 회원들로 "한 달에 1~2회씩 연금공단과 결혼식을 못 올린 국제 이주 여성(베트남, 중국, 필리핀 등)들을 위해 봉사활동을 나간다"며 "오늘은 영업 중에 짬을 내서 나왔기 때문에 점심시간까지만 봉사할 것"이라고 말했다.

농사에 필요한 농기구들이 경품 및 상품으로 등장, 눈길을 끌었다.
 농사에 필요한 농기구들이 경품 및 상품으로 등장, 눈길을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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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부석 앞에는 노래자랑 상품과 경품을 수북하게 쌓아놓았는데, 건강에 좋다는 흰찰쌀보리와 식용 김, 곡괭이, 쇠스랑, 호미, 삽, 밀바(손수래) 등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농사에 꼭 필요한 농기구들은 농촌에서 열리는 행사임을 말해주는 듯했다.

먹을거리 부스에서는 여성 봉사자들이 점심을 준비하고 있었다. 청국장찌개 맛이 일품인 식당 아주머니 모습도 보였다. 보기만 해도 침이 꼴깍 넘어가는 홍어회와 들깨냄새 가득한 표고버섯탕, 구수한 돼지고기 제육과 익은 김장김치 냄새가 아침을 건너뛴 침샘을 자극했다.

나포면 의용소방대원들은 노천에서 공연을 관람하는 어른들 모자(캡)를 만들어 나르느라 분주히 움직였고, 건강검진·상담 부스에서는 의료봉사원들이 어른들 건강에 이상이 있는지 혈액검사와 '활력 증후'(맥박수, 호흡수, 혈압, 체온)를 측정하고 있었다.

처음 만난 학생에게 카네이션 선물 받아

손녀 같은 여학생에게 카네이션 선물 받고 흐뭇해하는 마을 할머니.
 손녀 같은 여학생에게 카네이션 선물 받고 흐뭇해하는 마을 할머니.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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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물 공연이 끝나자 나포초등학교 학생과 예쁜 병아리 같은 병설유치원생 80여 명이 선생님을 따라 무대 앞으로 나오더니 "오늘도 건강하고 즐겁게 보내세요!"라며 인사를 올렸고, 어른들은 힘찬 박수와 환호로 화답했다.

인사를 마친 학생과 유치원생들은 고사리 같은 손으로 교실에서 접은 카네이션 한 송이를 할아버지 할머니 가슴에 달아 드렸으며 자식들이 모두 도시로 나가고 외롭게 지내는 노인들은 손자·손녀 같은 귀염둥이들의 따뜻한 정성에 함박웃음을 지어 보였다. 

사진촬영에 정신이 팔려 있는데 누가 허리를 살포시 찔렀다. 고개를 돌리니 귀엽게 생긴 여학생이 카네이션을 보여주며 "꽃 달아 드리려고요."라며 수줍게 웃었다. 어버이날을 일주일 남겨놓고 처음 만난 유가영(12세) 학생에게 카네이션 선물을 받다니 흐뭇한 마음에 미소가 지어졌다. 

"우리 동네 어르신들 오늘 임금 됐네요!"

카네이션 달아주기 행사에 이어 개회식이 열렸다. 나포 면장(홍영기), 군산소방서장(김원술) 축사와 우수 대원(이억수, 이동열) 표창이 끝나고 이른 점심을 맛있게 먹은 뒤 낮 12시 20분부터는 각설이 사회로 전통 민속무용과 노래자랑, 장기자랑 등이 펼쳐졌다.

안선희 무용단이 화려한 부채춤을 선보이고 있다.
 안선희 무용단이 화려한 부채춤을 선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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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설이가 안선희 단장과 문하생들 무용을 소개하며 "이번에 보여 드릴 부채춤은 옛날 궁궐의 임금이나 중전마마 생일에나 볼 수 있던 궁중무용이어서 백성들은 구경도 못했는데, 오늘 우리 동네 어르신들 모두 임금 되얐네요"라고 해서 폭소가 터지기도.

민속공연은 부채춤에 이어 '아리랑 예술단'의 기방무, 창부타령, 성주풀이 등으로 이어졌다. 화려한 차림의 무용단이 흥겨운 가락에 맞춰 율동을 할 때마다 박수가 터졌고 무대 앞은 춤판이 벌어졌다. 어른들과 함께 춤판을 벌인 5~6세로 보이는 꼬마가 끼어 있어 눈길을 끌었다.

백순이(84) 할머니가 설운도의 <잃어버린 30년>을 열창하고 있다.
 백순이(84) 할머니가 설운도의 <잃어버린 30년>을 열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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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자랑 출전 가수는 10명 남짓. 무대로 올라와 함께 춤을 추는 등 응원열기가 대단했으며 상품도 출연자 모두 받았다. 1년 전 전주에서 이사 왔다는 이양순 주부는 노래와 멋진 트위스트를 선보여 장려상을, 최고령 장수(長壽)상은 설운도의 <잃어버린 30년>을 열창한 대동마을 백순이(84세) 할머니에게 돌아갔다.      

해학과 풍자가 넘치는 각설이는 노래 한 곡이 끝날 때마다 경로 한마당 행사장에 나올 때 며느리에게 혼나고 왔다는 어른과 처녀 때 임신했던 경험이 있는 할머니 계시면 나오라고 해서 웃음보따리와 함께 마른 김과 '흰찰쌀보리' 등을 선물했다.

"신고만 하시면 5분 내로 달려갑니다!"

인사하러 무대에 올랐다가 객석의 요구를 받고 노래하는 김 광 대장
 인사하러 무대에 올랐다가 객석의 요구를 받고 노래하는 김 광 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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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포면 의용소방대 김 광 대장은 "지금의 70~80대 어른들은 우리가 굶주림에 허덕이던 시절에 땀 흘려 고생했던 분들로 존경스럽고 자랑스러운 분들이다."며 "의용소방대원 30여 명이 지역을 위해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 십시일반 모금해서 조촐한 자리를 마련했다"라고 말했다. 

김 대장은 "경로행사를 처음 기획하다 보니 부족하고 모자란 점도 많은 것 같다"며 겸손해했다. 시내에서 산업광고사를 운영한다는 김 대장은 부친에 이어 2대째 나포면 의용 소방대장을 맡은 베테랑 민간소방대원으로 알려졌다.

김 대장은 "회원 30여 명이 마을마다 고르게 거주하고 있어 신고를 받으면 5분 내로 달려가 응급조치를 취한다."며 "의용소방대는 전국 마을마다 조직되어 있으니 화재는 물론 가정에서 급한 환자나 위험이 발생했을 때는 곧바로 119로 신고해주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이날 행사장에는 군산소방서 직원들이 마을 주민을 상대로 소화기 사용법 및 단독 경보형 감지기 시연회 등 소방안전교육을 시행했으며, 옥곤리 문화마을이 '화재 없는 안전마을'로 지정되어 제막식과 소화기 및 감지기 기증식도 병행해서 치러졌다.

경로한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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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경로잔치, #군산시 나포면, #의용소방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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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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