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최신형 공짜폰 세일'을 내건 서울의 한 휴대폰 매장(해당 매장은 기사 내용과 직접 관련 없음).
 '최신형 공짜폰 세일'을 내건 서울의 한 휴대폰 매장(해당 매장은 기사 내용과 직접 관련 없음).
ⓒ 김시연

관련사진보기


"아직 3GB나 남았는데 언제 다 쓰죠?"

10년 넘게 2G 피처폰(일반폰)에 표준요금제만 고집해오던 이종속(가명)씨는 최근 최신형 LTE 스마트폰으로 바꿨다. 90만 원대 단말기를 거의 공짜에 구입하긴 했지만 3년 약정에다 3개월 동안은 월 6만2000원짜리 요금제를 유지하는 조건까지 붙었다. 지금 이씨는 남아도는 음성과 데이터 기본량을 어떻게 채울까 고민하고 있다.

이처럼 이동통신사 대리점들의 이른바 '공짜폰' 유혹에 넘어가 주체 못할 고가 요금제를 쓰는 사례가 요즘 흔하다. 앞으로 '단말기 자급제'가 뿌리내리면 어떻게 달라질까?

'공짜폰' 노예? 공단말기 사서 '유심' 골라 쓴다

"오늘부터 스마트폰 30% 할인 들어갑니다."
"우린 스마트폰 하나 사면 하나 더!"

A전자와 B전자 사원들의 판촉 열기가 뜨겁다. 김자급(가명)씨는 요즘 휴대폰을 살 때 일부러 가전제품 양판점을 찾는다. 이동통신사 대리점에선 80만~90만 원대 고가 스마트폰에 비싼 요금제만 권하지만 이곳에선 10만 원대 피처폰에서 20만~30만 원대 보급형 스마트폰까지 마음 놓고 고를 수 있어서다.

"한 달 2만 원이면 음성 150분에 데이터 100MB!"
"5만 원 충전하면 1년 동안 373분 통화!"

단말기를 고른 김씨가 향한 곳은 유심(USIM; 범용 사용자 식별 모듈) 판매장. 이곳에선 기존 이통사뿐 아니라 MVNO(이동통신재판매사업자)에서 내놓은 각종 선-후불 유심 상품을 한눈에 비교할 수 있다. 그동안 후불 요금제만 써왔지만 요즘 통화량이 부쩍 줄어든 김씨는 기본료 부담이 없는 선불 유심을 골랐다. 방금 산 단말기에 유심 카드를 꽂은 순간 김씨는 이통사 '노예폰'에서 벗어나 '자급폰' 대열에 들어선 것이다.  

단말기 자급제, '유통 혁명'-'찻잔 속 태풍' 엇갈려

5월부터 '단말기 자급제' 시대가 열린다. 이른바 '블랙리스트 제도(단말기 유통 개방 제도)' 도입에 따라 기존 이통사에 단말기 식별번호(IMEI)가 등록되지 않은 '공단말기'도 시장에서 자유롭게 사고 팔 수 있게 된 것이다. 휴대폰도 TV나 PC처럼 이통사를 끼지 않고 제조사가 직접 팔 수 있고, 중고폰이나 해외 단말기도 자유롭게 쓸 수 있다. 

앞서 김자급씨 사례는 단말기 자급제가 뿌리내린 상황을 그린 가상 시나리오지만 먼 미래에 벌어질 일만은 아니다. 중고 휴대폰을 중심으로 공단말기 거래는 이미 활발하고 유심 전용 요금제도 이미 등장했다.

올해 1월 MVNO 사업을 시작한 CJ헬로비전은 공단말기 가입자를 위한 '유심 전용 요금제'를 선보였다. 표준 요금 기본료는 기존 이통사 절반 수준인 6000원이고, 기존 이통사 월 3만4000원 요금제(음성 150분, 데이터 100MB, 문자 200건)는 월 2만 원, 4만4000원 요금제는 3만 원으로 30~40% 정도 싸다.

기존 이통사들도 마지못해 유심 요금 상품을 선보이고 있다. KT가 단말기 자급제 시행에 맞춰 30일 선보인 유심 선불 상품은 5만 원을 충전하면 망내 통화 200분을 포함해 음성 통화를 최대 373분까지 쓸 수 있다. 유심 후불 요금제 가입자는 요금 20%를 적립해 새 단말기를 살 때 할인해 준다.  

KT는 30일 단말기 자급제 시행에 맞춰 유심 전용 선불 요금제와 후불제 할인 제도를 선보였다.
 KT는 30일 단말기 자급제 시행에 맞춰 유심 전용 선불 요금제와 후불제 할인 제도를 선보였다.
ⓒ KT

관련사진보기


MVNO '틈새시장' 노려... 정부는 단말기값 거품 빼기

그렇다고 기존 이통사들이 호락호락 '유심 장사꾼'으로 전락할 리 없다. 이통사들은 각종 보조금과 리베이트(판매지원금) 전략을 내세워 값비싼 4세대 LTE(롱 텀 에볼루션) 스마트폰 판매에 주력해 왔다. 소비자들 역시 허울뿐인 '공짜폰'에 길들여진 탓에 단말기를 돈 주고 사야 하는 자급제는 당분간 '찻잔 속 태풍'이 될 가능성이 높다.

다만 기존 이통사와 단말기 경쟁에서 수세일 수밖에 없는 MVNO 사업자들과 단말기 제조업체, 유통업체들은 은근히 '유통 혁명'을 기대하고 있다. 당장 한국케이블텔레콤, 온세텔레콤, CJ헬로비전 등 MVNO 사업자들은 지난 27일 중국 휴대폰 제조업체인 ZTE코리아, 화웨이코리아, 온라인 유통업체인 이베이코리아 등과 손잡고 단말기 수급에 나섰다.

이날 MOU 체결 행사에 참석한 한 MVNO 관계자는 "TV나 PC, 노트북도 프리미엄 시장과 보급형 시장으로 나뉘는데 이통사 때문에 왜곡된 휴대폰 시장에선 보급형 유통이 안 됐다"면서 "중국업체가 브랜드 파워에서 밀리긴 하지만 국내 소비자가 받아들일 만한 기능을 갖춘 제품을 적정 가격에 내놓으면 경쟁력이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자급제 시행 주체인 방송통신위원회를 비롯해 지식경제부, 공정거래위원회 등도 '단말기 가격 표시'를 의무화하는 등 휴대폰 값 거품 빼기에 나서고 있다. 

홍진배 방통위 통신이용제도과장은 "지금껏 제조사들이 이통사 관계 때문에 고가 단말기만 국내에 출시해 가계통신비 부담이 많았다"면서 "단말기 유통 시장을 다변화해 소비자 선택권을 확대하면 가계 지출 부담도 줄어들 것"이라고 밝혔다.

다만 홍 과장은 "눈앞의 성과보다는 수개월에서 1년 이상 긴 호흡으로 추진하고 있다"면서 "소비자들의 프리미엄 선호 성향을 단번에 뒤집진 못하겠지만 수요가 있는 만큼 시간이 갈수록 중저가 유통 채널을 형성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아이폰-LTE폰 빠진 자급제... "고가-저가 시장 양분될 것"

현재 휴대폰 유통구조(왼쪽)와 단말기 자급제 비교
 현재 휴대폰 유통구조(왼쪽)와 단말기 자급제 비교
ⓒ 한국정보통신연구원

관련사진보기


반면 이통사와 기존 휴대폰 유통 상인들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당장 방통위에선 이통사들이 3G 정액요금제에 33%, LTE 요금제는 25% 요금 할인을 적용해온 것처럼 자급 단말기 가입자에게도 동일한 요금 할인을 적용해야 한다고 압박해 왔다. 하지만 이통사는 기존 요금 할인이 자사 단말기 구매에 따른 '보조금'이라며 팽팽하게 맞섰다.

테크노마트 강변점의 한 휴대폰 판매 상인은 "90만 원 대 스마트폰도 이통사 보조금과 리베이트를 끼면 50만~60만 원대고 요금할인까지 받아 훨씬 이익인데 비싼 단말기를 제 돈 주고 일시불로 사겠다는 고객이 있겠나"라면서 "중국산 단말기가 저가 시장에 많이 풀리겠지만 고가 시장은 그대로 유지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단말기 제조업체들 사이에도 자급제 전망은 엇갈린다. 자체 가전유통체인과 수출용 보급형 단말기를 갖고 있는 삼성전자, LG전자 등과 달리 프리미엄 모델에만 주력해온 팬택이나 애플코리아 등은 자급 단말기 출시 계획이 아예 없거나 관망 상태다.

'베가 레이서2' 출시를 앞둔 팬택 관계자는 "제조사 유통 경로가 추가됐지만 자체 유통망을 갖춰야 해 배보다 배꼽이 될 수 있다"면서 "20년 이상 고착화된 이통사 중심 유통 체계가 하루아침에 바뀌긴 힘들 것"이라고 전망했다.

애플코리아 관계자 역시 "이미 KT와 SK텔레콤을 통해 유통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면서 "아이폰을 자급용으로 별도 판매할 계획은 없다"고 밝혔다.

"자급폰 비중 10%만 돼도 통신시장에 큰 충격"

250여 개 휴대폰 매장들이 몰려있는 강변 테크노마트 6층 매장.
 250여 개 휴대폰 매장들이 몰려있는 강변 테크노마트 6층 매장.
ⓒ 김시연

관련사진보기


자급제 대상이 SK텔레콤과 KT의 3G(WCDMA) 단말기로 한정되는 것도 문제다. 유심 이동이 불가능한 2G 단말기와 LG유플러스 3G 단말기는 자급제 적용이 불가능하다. 요즘 출시되는 LTE 단말기도 이통사마다 주파수가 달라 당분간 자급제 영향에서 벗어나 있다. 

이처럼 불리한 환경이지만 앞으로 단말기 자급제가 통신 시장에 미칠 영향력을 무시할 순 없다. '공짜폰' 유혹에서 벗어나고 싶은 소비자들에겐 좋은 대안이기 때문이다.

실제 지난 2007년 유심 전용 요금제를 처음 도입한 영국의 경우 2011년 현재 후불제 신규 가입자 20% 이상이 유심 요금제를 선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앞서 CJ헬로모바일 가입자 4만여 명 가운데 유심 요금 가입자 비중도 30% 후반대에 이를 정도로 차별화에 성공했다.
 
MVNO업계 관계자는 "단말기 자급제를 산업 정책 측면이 아닌 소비자 후생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면서 "단말기 유통과 통신 서비스가 붙어 있는 왜곡된 유통구조를 깨는 물꼬를 트고 자급 단말기 비중이 10%만 넘어도 통신 시장은 큰 충격을 받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태그:#단말기 자급제, #블랙리스트, #유심요금제, #휴대폰, #이동통신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 사회부에서 팩트체크를 맡고 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