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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음면 면사무소 뒤편에서 바라본 비봉산 풍경
 가음면 면사무소 뒤편에서 바라본 비봉산 풍경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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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모양이 가로로 긴 의성군은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다. 그러므로 이름에 골짜기(谷)와 산(山)이 들어가는 점곡면, 옥산면, 사곡면, 춘산면 등 마을이 모두 동부 지역에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면 동부 지역의 가장 남쪽 부분이자 의성군 전체에서도 가장 남쪽에 있는 면의 이름은 어떨까? 골짜기를 뜻하는 '곡(谷)'이나 '산(山)'이 들어가는 이름일까? 지도를 보면 이 지역의 색깔은 들판을 나타내는 푸른빛은 거의 없고 산악 지대를 표시하는 황토색으로 가득한 데 말이다.

이 지역의 이름은 뜻밖에도 가음(佳音)면이다. '아름다울 가(佳)'에 '소리 음(音)'이다. 읽을 때의 소리까지도 너무나 부드럽고 아름다운 이름이다. 의성 동부 지역의 다른 면들이 하나같이 '산이 많은 땅'이라는 사실을 공공연히 드러내는 이름들을 가졌는데, 이 가음면만은 한없이 평온하고 예술적인 이름을 자랑한다. 참 기이한 일이다.

금성면 소재지에서 가음면으로 가는 길에 바라보는 금성산과 비봉산 자락
 금성면 소재지에서 가음면으로 가는 길에 바라보는 금성산과 비봉산 자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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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음면 면 소재지의 뒷산은 이름이 비봉산(飛鳳山)이다. 비봉산은 금성면의 금성산과 '좌우로 나란히'를 한 듯이 줄을 선 모양으로 우뚝 솟아 있어 두 산은 붓으로 그은 듯 간결하게 능선이 이어지고, 실제로 올라보아도 등산로는 끊이지 않고 줄곧 연결된다. 그런데 비봉산은 (특히 가음면 면 소재지 쪽에서 보면) 수정사 뒤편의 낮은 골짜기에서 양쪽으로 치고 올라가는 기세가 날카로운데다 능선이 여러 차례 힘차게 솟구쳤다 내려가기를 반복한 끝에 문득 좌우로 툭 떨어지기 때문에 말 그대로 봉황이 훨훨 날고 있는 면모를 연상시킨다. 그래서 예로부터 '날 비(飛)' '봉황 봉(鳳)'을 써서 비봉(飛鳳)산이라 불러왔다.

아득한 옛적 어느 화창한 봄날, 이 산 남쪽 2㎞쯤 되는 지점의 구릉에 봉황(鳳凰)이 날아와 아름다운(佳) 소리(音)로 세 번 울었다. 이곳 사람 중에서 봉황의 그 아름다운 울음소리를 듣지 못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 이후 사람들은 자기들이 사는 이곳을 가음(佳音)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비봉산의 전설은, 새와 음악이 등장하는 아름다운 이름 '가음'도 결국은 산에서 왔다는 사실을 확인해준다. 소리와 뜻으로는 전혀 산악(山岳)의 느낌을 주지 않지만, 이름이 지어진 유래를 알고 보면 가음 역시 의성의 동쪽에 있는 지역답게 산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명곡서원
 명곡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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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음면 소재지에서 빙계계곡으로 작은 고개를 넘는다. 고개의 내리막이 끝나는 지점 바로 오른쪽 길가에 서원 한 곳이 숨은 듯 앉아 있다. 이곳은 고려 말 조선 초의 선비인 금은(琴隱) 박성양(朴成陽)을 섬기는 명곡(明谷)서원이다. 

박성양은 <단심가>를 노래한 정몽주(鄭夢周)의 제자로, 고려가 망하자 의성에 은거하여 살면서 거문고와 책을 벗 삼아 살았다. 사람들은 그를 '금은(琴隱)'이라 불렀다. 숨어서(隱) 거문고(琴)를 켜며 사는 선비라는 뜻이다. 따라서 박성양은 태조 이성계가 여러 차례 불러 벼슬을 하라고 권했지만, 결코 응하지 않았다.

정몽주 제자 박성양, 숨어서 거문고를 켜며 살아

그렇게 살던 중, 왜적이 남해 일대를 침범해 왔다. 조정에서는 선생에게 왜적을 물리쳐 주라고 부탁하였다. 고려를 무너뜨린 이성계를 돕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백성의 죄 없는 죽음까지 외면할 수는 없는 일, 하는 수 없이 선생은 정예 군사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가 적들을 무찔렀다.

1419년, 이번에는 왜적들이 의성 비안까지 쳐들어왔다. 임금은 장천군(長川君) 이종무(李從茂)를 삼군도 절제사로 삼고, 선생을 우군 절제사로 삼아 왜적을 없앨 것을 주문하였다. 6월, 선생은 이종무와 함께 거제도에 정박했다. 배 270여 척에 군사 1만 7285명이었다. 적이 두려워하여 바람을 탄 듯 달아나기 시작했다. 선생은 우군을 감독하면서 적을 추격하여 크게 쳐부수었다.

함경도 땅으로 가는 길에 부인이 세상을 떠났다. 박성양은 부인의 상여를 고향으로 보내면서 다음과 같은 만시(輓詩)를 지었다.

백마는 슬피 울며 관북으로 향하는데 白馬寒嘶關北去
붉은 만장 아득히 영남으로 돌아가네 丹旌遙向嶺南歸
변방 구름 만 리 길 풍설(風雪)도 많건만 塞雲萬里多風雪
그 누가 나그네를 위해 멀리 옷을 부칠까 誰憶征人寄遠衣

工자 모양으로 지어진 도해와 건물
 工자 모양으로 지어진 도해와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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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음면에서 명곡서원에 버금갈 만한 옛집을 한 곳 들라면 순호리 마을 중간쯤에 있는 도해와(蹈海窩)가 제격이다. 호기심을 끄는 이 집의 독특한 이름부터 알아보고 넘어가는 것이 순서이겠다. 도해는 병자호란 때 척화를 주장했던 구혜(具譓) 선생의 호(號)이다. 와(窩)는 일반적으로 많이 쓰이지는 않지만 '집'을 의미한다. 즉, 도해와는 '도해(蹈海) 선생을 기려 그 후손들이 지은 집[窩]'이다.

이 마을 능성구씨들은 '공(工)부를 열심히 하라'는 뜻을 후손들에게 알리기 위해 집 모양을 '工'자형으로 만들었다. 땅을 돋우고 돌을 쌓아 축대를 부쩍 높인 위에 기와집을 얹었는데, 공(工)자형 구조인 까닭에 양쪽으로 힘차게 뻗어 나간 지붕의 선이 독특하고 아름다워 눈길을 끈다. 
 
1723년에 왕이 내려준 상여가 이제는 낡은 모습을 보여준다.
 1723년에 왕이 내려준 상여가 이제는 낡은 모습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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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호마을에는 가음면에만 있는 특이한 답사지가 있다. 1723년(경종 1) 경남 사천 현감으로 있던 구성옥(具性玉)이 현지에서 숨을 거두었는데, 이 일과 관련되는 곳이다. 구성옥을 특별히 아꼈던 왕은 그의 고향인 의성 순호마을까지 시신을 옮길 수 있도록 상여를 내려보낸다. 왕이 하사한 이 상여는 순호마을의 '보물'이 되었다.

의성의 향토사학자 김종우 옹이 펴낸 <의성향토문화 실타래>에 따르면 이 상여는 지금부터 30여 년 전 구영서(具暎書) 전 면장의 장례 때 마지막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요즘은 좀처럼 볼 수 없는 곳집- 상여집이 마을 입구에 있는 순호리, 우리나라 어디에서도 이제는 희귀한 존재가 된 볼거리를 지닌 특별한 동네이다.

가음면 소재지의 우체국 뒤로 들어가면 얕은 언덕인지 높은 밭인지 가늠이 가지 않는 야산 같은 들판이 나타난다. 이 들판은 비봉산 아래까지 이어진다. 논과 밭이 뒤섞여 있는 들판의 중간쯤에는 이곳이 아득한 옛날에도 사람이 살았던 땅이라는 사실을 증언하는 선돌(立石)도 있고, 곳곳에 고인돌들도 보인다. 이곳에 가면, 힘차게 날갯짓을 하며 창공으로 비상하는 봉황처럼 고인돌 위로 파랗게 얹혀 있는 비봉산의 자태가 아름답다.

그리고 장제지(池), 낚시를 드리운 채 비봉산의 그림자를 낚고 있는 사람의 한가한 정경을 보여주는 예쁜 연못이다. 연못 옆 사과밭에는 물에 비친 비봉산을 정원으로 삼고 살아가는 젊은 부부의 정말 '그림 같은' 집 한 채가 하얀 외벽에 연녹색 커튼을 살짝 드리운 채 앉아 있다. 연못 잔잔한 물결 위에 수련처럼 내려앉은 비봉산 그림자를 찍으러 사과밭 안으로 들어가면 조그마한 개가 나타나 작은 소리로 "멍멍" 짖는다. 이곳에서는 개가 짖는 소리(音)까지도 마냥 아름답기만(佳) 하다. 그러니까 가음(佳音)이다.

비봉산이 보이는 장제지 옆에는 사과밭 속에 예쁜 집 한 채가 있어 지나가는 나그네의 눈길을 끈다.
 비봉산이 보이는 장제지 옆에는 사과밭 속에 예쁜 집 한 채가 있어 지나가는 나그네의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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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의성여행, #가음면, #도해와, #이종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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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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