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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화차>
 영화 <화차>
ⓒ 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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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아버지, 저를 가엽게 여기신다면 제발 저희 아버지 좀 죽여주세요."

영화 <화차>에 등장하는 여주인공 차경선(김민희)은 사채를 쓰고 행방불명이 된 아버지 탓에 고통받는다. 밤낮 가리지 않고 찾아오는 사채업자들 때문에 결혼 생활은 끝나고, 유흥업소로 보내진다.

빚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에게 사람다운 삶이란 없다. 경선은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고 피해자의 신분을 가장한 채 살아간다. 그러나 약혼자인 장문호(이선균)에 의해 경선이 감추고 싶던 비밀은 하나씩 모습을 드러낸다.

영화 속 경선의 이야기는 현실에서도 이어진다. 대부업체 직원이 집에 찾아와 문을 부수고, 욕을 하는 일은 셀 수 없이 일어난다. 돈을 갚지 못한 여성들을 성매매한다는 끔찍한 소식도 끊이지 않긴 마찬가지다.

2009년, 여대생이 사채업자로부터 300만 원을 빌렸다 갚지 못하자 유흥업소로 보내졌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아버지는 딸을 살해한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극단적인 사례이긴 하지만 우리 주변의 수많은 '경선이'들이 빚을 졌다는 이유로 고통을 안고 살아간다.

가계 빚 1000조 시대, 왜 우리는 이런 사회에 살게 됐을까

가계 빚 1000조 시대. 지금 우리 사회를 뒤덮고 있는 단어는 '빚'이다. 간단한 숫자로 표현된 1000조는 우리를 무감각하게 만들지 모른다. 하지만 현실에서 1000조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그 이상의 돈이다. 1만 원짜리 지폐를 늘어놓으면 달까지 19번 왕복할 수 있는 돈으로, 우리나라 한 해 GDP와 맞먹는 규모다. 왜 우리는 이런 사회에 살게 됐을까. <대출천국의 비밀>의 저자 송태경은 이렇게 말한다.

<대출 천국의 비밀>
 <대출 천국의 비밀>
ⓒ 서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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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다른 골목에 내몰린 이들은, 신뢰감 넘치는 유명 배우가 어려운 형편을 살뜰히 다 챙겨줄 듯 속삭이는 광고의 한마디 말에도 쉽게 흔들린다. 불요불급한 돈인데도 멀쩡한 사람마저 일단 갖다 쓰고 보게 만드는, 그렇게 마구잡이로 갖다 안기고는 그 몇 배의 이자를 악착같이 앗아가는 '약탈적 대출'이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니다."

빚보다 더 심각한 건 빚더미의 내용이다. 일반 은행의 대출금은 줄고 제2금융권을 포함한 대부업의 규모는 갈수록 늘어간다. 등록 대부업체만 보면 지난해 6월 기준으로 이용 고객이 247만 명에 달하고, 대출금은 8조6361억 원이었다. 2007년 89만 명이 4조1016억 원을 대출받았던 것과 비교하면 4년 만에 거래 고객 숫자는 2.7배, 대출규모는 2.1배 늘어난 것이다.

대부업체는 이자제한법에 따라 연 39% 이상의 이자를 받을 수 없게 돼 있지만 이를 지키는 업체는 거의 없다. 민생연대에서 사채, 대부업 관련 무료 법률상담을 오랜 기간 해온 저자는 "연 40%대의 지독한 고리대가 통상적인 수준이고 연 100%에서 수천%를 넘는 무한대의 금리시장에서 사람들이 집을 빼앗기고 목숨까지 협박받는 일은 일상이 됐다"고 했다.

그런데도 사람들의 싸늘한 시선은 대부업체가 아닌 '경선'에게로 향한다. 왜 능력도 안 되는 사람이 그런 데서 돈을 빌리느냐고 몰아칠 뿐이다. 정작 사채의 덫을 치고, 수십 배의 이자를 챙기는 대부업체들은 이 비난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현행 법정 최고이자율을 낮추려고 하면 오히려 큰소리를 친다. 최고이자율을 내리게 되면 대부업체는 불법 영업을 할 수밖에 없고, 예전처럼 모두 음성화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에 지레 겁을 먹은 사람들은 이자율이 더 올라갈까 두려워 대부업체의 주장에 그냥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저자는 이는 명백히 틀린 말이라고 반박한다. 최근 확인된 등록 대부업체의 실제 평균이자율이 168%라는 수치에서 알 수 있듯이, 불법 영업은 '합법'의 영역에서도 공공연히 이루어진다. 처음엔 35만 원의 사채를 썼지만 이를 갚지 못하면서 결국 8000만 원까지 빚이 불어난 '경선의 아버지'의 사례는 등록 대부업체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합법과 불법의 경계가 흐릿한 상황에서 대부업체의 일탈행위를 처벌하는 엄격한 규정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빚 권하는 사회의 결말은 '경선'의 비극적 죽음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미 세계 여러 나라는 이자제한법을 위반하면 강력한 규제를 한다. 독일은 대출 유형별로 평균이자율의 2배를 초과한 금리 계약은 없던 일로 할 수 있고, 형법에 따라 폭리로 처벌받는다. 대출 유형별 평균이자율도 연 6~9%에 그친다. 영국은 허가받지 않은 금융거래업자의 금융거래는 그 자체가 불법이며, 채무자에게 이자는 물론이고 원금도 청구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선 기껏해야 채무자가 초과 지급한 이자를 근거로 소송을 내는 등 민사적으로 대응하는 방법 정도의 수단밖에 없다.

여기에는 분명 근본적인 대안도 뒤따라야 한다. 돈을 빌릴 수 있는 대체 수단이 없어서 서민들이 대부업체에 눈을 돌리는 까닭에 국가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이에 대해 저자는 지금이라도 정부가 의지만 있다면, 대체공급원을 마련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노동부가 근로복지공단을 통해 공급하는 저소득층 근로자 등을 대상으로 하는 생활안정자금 대출제도가 대표적이다. 이 제도는 연 3%, 1년 거치 3년 분할 상환 등의 좋은 조건으로 저소득층 노동자에게 자금을 공급한다. 이 제도를 저소득층 일반의 생계비 대출로까지 확대하고 상환기간을 연장하는 것이다.

한 번 타면 절대 내릴 수 없다는 '화차'에 탄 경선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빚 권하는 사회의 결말은 '경선'의 비극적 죽음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지금 지옥으로 가는 화차위에 타고 있는지도 모른다. 달리는 수레를 멈추는 방법을 고민해야 할 때다. 그러나 그 시간이 늦어질수록, 화차는 지옥행 문에 가까워진다.


태그:#화차, #대출천국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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