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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시 서탄면에서 농사를 짓는 시부모님은 필리핀 며느리 레리베스 씨를 친딸보다 더 아낀다. 대학에 보내주고 통학을 위해 승용차까지 며느리에게 사줬다.
▲ 인자한 시부모님과 함께 평택시 서탄면에서 농사를 짓는 시부모님은 필리핀 며느리 레리베스 씨를 친딸보다 더 아낀다. 대학에 보내주고 통학을 위해 승용차까지 며느리에게 사줬다.
ⓒ 허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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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리베스 바낙(Lelibeth Banaag). 그녀가 필리핀에서 한국 농촌으로 시집온 것은 5년 전. 지금 그녀의 나이가 24세이니 불과 19세밖에 안 된 어린 나이에 한국 남성과 결혼한 것이다.

경기도 평택시 서탄면 내천리에서 만난 그녀는 아직도 소녀티가 엿보일 만큼 어리고 순박해 보였다. 지난 31일 오전, 그녀의 가족들이 모두 한 자리에 있었다. 그녀는 남편 김용관(44)씨와 함께 팔순의 시부모님 두 분을 모시고 살아가고 있었다.

넓은 들판 가운데 자리잡은 동네에 살면서 시부모님과 남편은 벼농사를 짓는 대농이었다. 그러나 레리베스씨에게는 농번기에도 손에 흙을 묻히지 못하게 한다. 레리베스 씨가 할 수 있도록 허락받은 일은 단지 시어머니를 거들어 식사를 준비하는 일과 공부하는 것뿐이다.

그녀는 지난해부터 시집의 배려로 대학생이 됐다. 경희대 수원캠퍼스에 매일 통학을 하는 여대생으로서 새로운 학문을 익히고 배우며 캠퍼스의 낭만을 마음껏 누리고 있는 것이다. 올봄 그녀는 2학년에 올라갔다. 전공은 영미문학. 앞으로 한국어도 복수전공할 계획이다.

"아내의 고교시절 성적표를 보고 머리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필리핀에서 공부를 너무 잘 했는데 집안이 가난해 진학하지 못한 거죠. 그래서 아버지께 공부를 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드렸죠."

남편 김용관씨의 말이다. 물론 시아버지는 흔쾌히 허락을 했다. 레리베스는 지난해 봄 경희대 외국인 특례입학 전형에 합격했다. 지난 1년간 성적을 잘 받았다고 남편이 자랑한다. 그러나 아내는 한국어 강의가 어려웠다고 했다.

"교수님들의 말이 빨라서 못 알아들어요. 그래서 올해는 영어강의를 많이 신청했습니다."

다행히 경희대 수원캠퍼스는 국제캠퍼스로 명명할 정도로 영어강좌를 많이 개설해놓고 있을 뿐만 아니라 외국인 학생들을 위한 장학제도와 다양한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승용차로 30분 이내에 갈 수 있을 만큼 그리 멀지도 않다. 처음에는 시아버지가 가까운 오산시내까지 태워다줬고, 거기서 다시 버스로 갈아타고 통학을 했다. 그러다가 차를 직접 몰고 통학하도록 시아버지가 승용차를 사줬다고 한다.

시아버지 김철수(80) 옹에게 며느리를 끔찍이 아끼는 이유에 대해 물어보았다.

"필리핀에 가서 얘를 처음 봤을 때도 괜찮다고 느꼈지만 같이 지내면서 보니 착실해요. 모르는 것 배우려고 애쓰고 말이 불편해도 못 느껴요. 아들과 잘 통하고요."

시어머니 신정숙(81) 옹도 역시 자상했다.

"며느리가 참 착해요. 한국음식도 배워서 잘 하죠. 한국 여자보다 차라리 더 괜찮다는 생각도 해요."

노 부부가 필리핀 며느리를 칭찬하는데 조금도 인색하지 않았다. 가장 처음 며느리를 선택한 사람도 사실은 시아버지였다. 김철수씨가 필리핀을 방문했다가 우연히 레리베스씨를 보고 아들의 배우자로 삼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이웃에 사는 조카를 통해 그녀를 소개받았다.  

아내에게 큰 꿈 가지라고 다그치는 남편

20년의 나이 차이가 있어도 상관없다. 김용관 씨는 첫번째 결혼에 실패한 후 오랫동안 혼자 지내다가 레리베스 씨를 만나 행복을 되찾았다.
▲ 남편 김용관 씨와 함께 20년의 나이 차이가 있어도 상관없다. 김용관 씨는 첫번째 결혼에 실패한 후 오랫동안 혼자 지내다가 레리베스 씨를 만나 행복을 되찾았다.
ⓒ 허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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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결혼에 한 번 실패를 하고 10년 넘게 혼자 지내면서 재혼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필리핀에 다녀오신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필리핀에 갔지요. 처음에 너무 착하고 때가 전혀 묻지 않은 아내의 심성에 반했죠. 우리는 3개월 동안 교제한 후 결혼했습니다."

김용관씨는 레리베스씨와 교제하기 위해 현지에 지내면서 조카의 도움을 받아 타갈로그어를 열심히 배웠다. 자신에게는 영어보다 오히려 현지 원주민들이 쓰는 말을 배우기가 더 쉬웠다고 한다. 그러나 처음에는 처가가 될 집안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도 집요하게 문을 두드린 끝에 세 번째에 겨우 허락을 받아냈다. 부부 사이의 나이 차이가 20년이나 되지만 필리핀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이상하게 여기지만 두 사람은 주변의 시선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아내를 대학에 보내며 흐뭇해 하는 남편 김용관씨는 정작 공부를 많이 하지 못했다. 전문대학에 다니다가 중퇴하고 오로지 농사밖에 모르는 농군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그는 아내가 장차 원하면 대학원까지 보낼 생각이다. 그녀에게 꿈을 물어보았더니 영어학원을 차리겠단다. 그러나 남편은 은근히 불만을 표시하며 더 큰 꿈을 가지라고 아내에게 다그친다.

"다문화 가정과 관련된 일을 생각하고 있어요. 결혼이민자들과 노동자들을 위해 일하고 싶은데 이자스민 같은 사람요."

이자스민은 필리핀 출신의 귀화여성으로 이번 제19대 총선에 새누리당 비례대표 17번을 받은 국회의원 후보다. 비로소 남편은 만족해 하며 사랑스런 눈길로 아내를 바라봤다. 어쩌면 그녀는 남편과 시부모님뿐만 아니라 다문화 가족들 모두에게 또 하나의 희망이 될지도 모른다.

덧붙이는 글 | 평택시사신문에 보도



태그:#레리베스, #다문화가족, #평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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