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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에게 생일이 두 번 있을 수 없듯이 나라도 마찬가지다. 복수의 생일을 들고 나서는 사람이 정상이 아니듯이, 건국절을 달리 내걸고 행세하려는 세력 역시 뭔가 흑심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나라의 건국일은 기원전 2333년 10월 3일 단군이 왕검성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조선이라 이름하여 즉위한 날이다. 이날을 건국을 기념하는 국경일로 정하고 기원절(개천절)로 기린다. 고구려·백제·신라에 이어 왕건의 고려, 이성계의 조선을 두고 더러 개국(開國)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엄격한 의미에서는 왕조의 창업(創業)이다.

중국처럼 인종·종족·민족·언어가 다르고 영토가 광활한 나라에서는 한·당·수·명·청에 이어 중화인민공화국 등 때에 따라서는 왕조의 수립을 건국이란 용어를 써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한민족과 같은 배달의 겨레로서는 건국은 단군의 건국이 유일하고, 이후에는 왕조의 창업일 뿐이다.

이성계는 고려의 영토와 유민을 상대로 역성혁명을 통해 조선왕조를 열었다. 개국(開國)이라 할지라도 건국이란 용어는 합당하지 않다. 백보를 양보하여 왕건과 이성계의 개국을 '건국'이라 치더라도, 이명박 정권에서 어용관제 사학자들과 뉴라이트 계열 지식인들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일을 건국절로 내세운 것은 역사적으로나 정치사적으로 터무니없는 망동이다. 한마디로 반역사적, 반헌법적, 반상식적인 무지와 몰상식의 극치를 보여준 사례이다.

1년에도 몇 차례씩 오늘이 생일이라고 '뻥치고' 다니는 사람이 사기성이 농후하듯이, 정부수립을 건국절로 바꿔치기 하려는 세력에는 정치적인 흑심이 있다. 이 흑심을 하나하나 따지면서, 93년 전인 1919년 4월 13일, 망명지 상해에서 애국선열들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게 된 배경과 의미, 가치를 살펴보기로 한다.

역사왜곡의 속셈을 해부한다

2006년 7월31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의 글 <우리도 건국절을 만들자>.
 2006년 7월31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의 글 <우리도 건국절을 만들자>.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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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한국의 수구세력이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로 내세우는 정치적 배경부터 알아보자.

첫째, 이들 세력의 핵심은 친일파, 이승만의 백색독재, 박정희·전두환·노태우의 군사독재로 이어지는 기득권세력이다. 이들은 근 100년 동안 일제에 협력한 대가로 기득권을 갖게 되고, 독재정권에 기생하면서 정치·경제적으로 권력과 부를 세습하게 되었다. 기득권층이 되었으나 이들에게는 친일 반민족, 분단냉전, 친독재 반민주라는 낙인이 찍히게 되었다.

한국의 주류세력으로서는 역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정통성의 위기를 갖고 있는 셈이다. 이들이 1948년 8·15를 건국절로 삼으려 하는 것은 친일과 분단이라는 죄상과 부끄러운 상처에서 벗어나려는 몰염치한 꼼수이다. 1948년 8·15를 건국기원으로 삼아서 이승만 정권에 가담한 친일파들을 건국공신으로 추겨세우고, 국가권력과 경제적 부를 독점하면서 이를 자손만대에 세습하겠다는 속셈인 것이다.

둘째, 1948년 8·15가 건국절이 되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독립운동은 대한민국의 역사가 아니게 되고, 친일파들도 남의 나라 일로 치부된다. 일제의 한국 병탄이나 식민통치는 오 늘 우리 국민과는 상관이 없는 일이다. 식민지 배상, 문화재 반환, 위안부 문제 사죄 등을 요구할 권리가 원천적으로 상실된다.

셋째, 대한민국 헌법 제3조의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정한다"는 조항 도 무용지물이 되고, 통일을 주장할 헌법적, 역사적 근거를 잃게 된다.

넷째, 헌법 전문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이란, 오랜 역사와 전 통은 사라지고 60여 년 밖에 안 되는 신생국가의 위치로 전락하게 된다.

이와 같은 역사 죽이기, 역사 속이기의 흑심은 오직 친일 후손들이 선대들의 친일행적을 없애려는, 그리고 독재자 이승만의 망령을 부활시켜 기득권을 지키려는 속셈인 것이다. 친일의 죄과를 사죄하기는커녕 역사를 왜곡하고 독립운동사를 실종시키려는 반민족적인 범죄행위인 것이다.

<관보> 제1호에도 임시정부 기원 표기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임시의정원 요인 신년 축하모임(1921.1.1). 붉은 원내는 이승만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임시의정원 요인 신년 축하모임(1921.1.1). 붉은 원내는 이승만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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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대한민국은 1919년 4월 13일 중국 상해(상하이)에서 수립 선포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신과 법통을 이어받았다. 종으로는 4300년 전 단군의 건국을 계승하고, 횡으로는 세계만방에 자주독립을 선언하면서 '제국'이 아닌 '민국'을 수립하였다.

이것은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오롯이 담기고 정부의 각종 기록으로도 그대로 명시되었다. 1948년 7월 24일 중앙청 광장에서 거행된 정·부통령 취임식의 취임사에 이승만은 "대한민국 30년 7월 24일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이라고 명기하였다. 그리고 당시 정부에서 발행한 대한민국 <관보> 제1호는 헌법을 게재하면서 "대한민국 30년"이라 명시하였다.

상해임시정부에서 탄핵되어 쫓겨난 이승만도 역사적 사실은 숨길 수 없어서 취임사와 <관보>에 임정의 기원을 명기했던 것이다. 역사에 무식하게나 왜곡하려는 사람들을 위해 제헌헌법의 전문을 다시 읽어보자.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기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라고 돼 있다.

상해임시정부는 '건립'이라 표기하고, 대한민국 정부수립은 '재건'이라 하여, 임시정부의 창업과 대한민국의 법통계승을 분명히 하였다. '건국'이라는 용어를 함부로 쓰지 않았다.

대한민국이 정부를 수립하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기원을 계승한다고 헌법 전문에 명시한 것은 그럴 만한 필연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일제에 나라를 강탈당한 지 9년 만에 겨레의 총의로 항쟁한 3·1운동의 결실이고, 둘째는 세계사적인 시대사조인 민주공화제를 채택했기 때문이다.

상해에 모인 우리 독립운동가들은 조선8도의 대표와 해외 동포들의 대표자 29명을 선출하여 먼저 임시의정원을 구성했다. 독립지사들은 독립협회 당시 구성했던 의회원(議會院)에서 기원하는 의회나 국회 대신 "독립 달성 이전에는 임시의정원이란 명칭을 사용하고, 광복이 이루어지면 '국회'로 발전시킨다"는 전제로 임시의정원을 구성한 것이다. 용어 하나라도 함부로 사용하지 않은 지사들이 높은 식견과 역사의식을 찾게 한다.

1919년 4월 10일 저녁 10시부터 다음날 오전 10시까지 11시간 동안 계속된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는 국호와 연호의 제정에 관해 토론을 거듭하였다. 토론 과정에서 대한민국·조선공화국·고려공화국·대한제국 등 이념과 출신성향에 따라 여러 가지 국호안이 제시되었다. 단군 이래 전통적인 국호라는 '조선', 대한제국으로 망했으니 다시 그 이름으로 국권을 회복하자는 '대한제국', 역사상 가장 강성했던 고구려의 약칭인 '고려' 등이 논의되었다.

하지만 다수는 마한·진한·변한의 한(韓)은 곧 한민족의 오랜 국호이기도 함으로, 대한을 채택하고, 시대역행적인 '제국'이 아닌 '민국'으로 정하였다. 민국이라는 국호를 정하는 데는 1911년 청조를 무너뜨리고 중화민국을 수립한 중국의 신해혁명도 일정한 영향을 끼쳤다.

임시의정원에서는 국호뿐만 아니라 정치체제에 대해서도 밤을 세워가면서 토론을 거듭하였다. 이씨 황실을 계승하여 독립운동의 구심으로 삼자는 복벽주의(復辟主義), 1917년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에 영향을 받은 사회주의체제론 등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다수의 의견에 따라 근대적 시대사조에 맞고, 국내에서도 1906년부터 신민회의 애국지사들에 의해 전개된 공화주의 정신에 따라 '민주공화제'를 채택하였다.

이로써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민을 기본으로 하는 '민국'의 근대국가가 수립되었다. 돌이켜 보면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수많은 망명정부 수립 과정에서 '의회'가 먼저 구성되고, 그 다음에 체제와 정부가 수립된 경우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처음이었다.

강력한 외적과 싸워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일사불란한 권력구조가 효율적일 수도 있었겠지만, 우리 애국지사들은 임시의정원이 정부를 지휘·감독하고 민의를 투입·산출케 하는 민주적인 이원체제를 채택한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번 독립지사들의 한없이 높은 도덕성과 민주주의 정신을 찾게 된다.

우리 역사상 최초의 '민을 기본으로 하는' 근대국가

15일 오전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에서 열린 '8·15 광복절 63주년 기념 국민대회'에서 참석자들이 광복절을 건국절로 바꾸려는 정부의 의도를 비판하며 만세 삼창을 하고 있다.
 15일 오전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에서 열린 '8·15 광복절 63주년 기념 국민대회'에서 참석자들이 광복절을 건국절로 바꾸려는 정부의 의도를 비판하며 만세 삼창을 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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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의정원은 전문(前文)과 10개조로 구성된 임시헌장을 제정·공포하였다. <임시헌장>을 살펴보자.

신인일치(神人一致)로 중의협응하야 한성에 기의(起義)한 지 30유일에 평화적 독립을 3백여주에 광복하고 국민의 신임으로 완전히 다시 조직한 임시정부는 항구완전한 자주독립의 복리로 아 조선여민에 세전(世傳)키 위하야 임시의정원의 결의로 임시헌장을 선포하노라.

임시정부의 헌법인 약법(約法)은 국체를 민주제로, 정체는 대의제를 채용하고, 국시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존중하고, 세계평화의 행복을 증진하게 하는 등 근대 민주국가의 헌법정신을 모두 담았다. 임시정부의 약법은 대한민국의 헌법정신과 조항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약법의 주요 부문을 살펴보자.

제1조, 수천 년 이어져온 군주제를 과감히 청산하고 민주공화제로 대전환 한다는 국체를 규 정했다. 제2조, 정체를 대의제로 하여 권력분립, 대의제 등을 밝혔다. 제3조,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구체적인 규정을 두었다. 제4조, 정부의 권한을 내정과 외정으로 크게 구분하여 정부가 양대정책으로 광복을 쟁취하 고 민주독립국가를 세울 조항을 마련했다. 제5조, 국민의 의무를 납세와 병역으로 명기하였으며, 제6조, 정식 국회가 소집되어 완벽한 헌법을 제정할 때까지 이 약법을 모법(母法)으로 삼아 통치수단으로 삼겠다는 약속을 담았다.

임시의정원은 치열한 토론과 격렬한 논쟁을 통해 임시정부의 각원을 선출하였다. 집정관 총재에는 이승만, 국무총리에는 이동휘를 선출하는 등 정부의 조직체계를 완성하는 한편 1919년 4월 23일 <임시정부선포문>을 발표하였다.

4400년간 계승된 조선민족의 역사적 권리에 기하야 신세계의 대세에 순응하며 자손만대의 생존과 발전의 자유를 위하야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민중의 자유민임을 세계만방에 선언한지라. 비록 조선의 국토가 아직 일본군대의 점거한 바 되었다 하더라도 차(此)는 일즉 벨기에가 독일의 점거한 바 되었음과 동(同)하니 조선의 주권은 엄존한지라. 아 민족은 일즉 일본의 아 민족에 대한 통치권을 승인하는 민족적 의사표시가 없었을뿐더러 임의 정식으로 차를 부인하는 의사를 전민족 의사에 기하야 임시정부가 성립되었음을 자에 포고하노라. 과거에 통호하던 제 우방과 인도의 기초상에 신건(新建)된 각국은 아국에 대하야 심후한 동정과 우의를 표할 줄 확신하노라.

임시정부 노력으로 카이로선언 가능

2008년 8월 15일 건국절 행사에 참석한 이명박 대통령
 2008년 8월 15일 건국절 행사에 참석한 이명박 대통령
ⓒ 청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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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는 때로 노선투쟁과 내부분열이 있었고 침체와 쇠락도 따랐지만, 그때마다 진용을 가다듬으면서 27년 동안 중국 관내를 종횡하면서 대일항전의 보루역할을 하였다. 이봉창·윤봉길 의거를 계기로 광복군을 주력으로 중국 정부의 인식을 바꾸고, 중국 민중과 협력하면서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도발한 것을 계기로 대일 선전포고를 하기에 이르렀다.

1943년 11월 27일 미·중·영 수반이 카이로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는 선언에 합의한 것은 김구 주석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의 외교적 노력의 결과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국치 9년 만에 국가정통성을 이으면서 27년 동안 대일항전을 계속하고 연합국 수뇌들로부터 독립을 받아내기까지 한민족의 대표기관이었다.

일부 친일 배족세력이 임시정부를 폄훼하고, 독립운동을 테러행위라고 모독하면서 1948년 8·15를 건국절로 삼겠다고 하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 이들이야말로 국맥을 단절하고 국혼을 훼손하며 국헌을 짓밟는 반민족·반역사·반헌정의 테러행위에 진배없다.

1948년 8·15가 건국절이 되면 1910년 국치로부터 국맥 단절의 기간을 1948년 8·15까지 38년으로 늘림으로로써 우리는 그만큼 독립심이 빈약한 민족이 되고, 미군정 3년을 미국사에 편입시키는, 역사 잃은 국민이 된다.

백암 박은식, 단재 신채호 선생은 나라가 망하더라도 역사만 잃지 않으면 언젠가는 반드시 국권을 회복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망명지에서 <조선통사>를 쓰고 <조선상고사>를 지었다. 또한 <독립운동지혈사>를 쓰고,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하였다.

애국지사들의 선혈로 독립된 국가에서 역사를 왜곡하고 민족사를 단절시키고, 진실을 거짓으로 둔갑시키려는 반민족 세력에게 준엄한 심판을 해야 한다. 일본 정부의 역사왜곡을 비판하면서 내부의 역사왜곡을 방관한다면 국제적으로 조롱거리가 될 것이다.

오늘 우리는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93주년을 맞아 경건한 마음으로 이역만리 타국땅에서 풍찬노숙을 하면서 국권회복과 정부수립에 헌신하신 애국선열들의 위업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아울러 8·15 정부수립일을 건국절 운운하면서 국맥단절, 국혼훼손, 국헌문란의 역사왜곡이 자행되지 않도록, 다시 독립운동을 하는 자세로 저들의 망동을 막아야 하겠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작성한 김삼웅씨는 독립기념관장으로 일한 바 있습니다.



태그:#임시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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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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