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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 재미난 놀이, 나는 행복한 아웃사이더"

 

바닷가와 숲 사이에 선 여인의 손가락 끝에 새가 앉아 있다. 여인은 새에게 길을 묻는 것일까? 속옷 차림의 여인이 창문을 열고 저 건너 산의 불을 바라본다.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 그 뒷모습에서 여인의 절망감이 묻어 나온다. 비가 쏟아지는데, 한 여인이 나룻배 앞에서 춤 삼매경에 빠져 있다. 어두운 숲 속에서 화병을 한 손에 든 여인이 그림자 같은 남자와 춤에 빠져 있다. 비주얼 엑스타시(visual ecstacy)다.

 

숲 속에서 윗도리를 벗은 채 춤을 추며 황홀해하는 여인, 낭떠러지에서 만세를 부르며 떨어지는 여인, 집을 부둥켜 안고 있는 여인…. 화가 김원숙(Wonsook Kim, 59)씨의 캔버스에서 만나게 되는 여인들이다. 산, 불, 바람, 불, 달, 호수, 집, 달, 꽃, 새, 길, 계단, 호수, 신발 등 그가 즐겨 그리는 이미지들은 관람자들을 향해 속삭이는 듯하다.

 

그는 붓으로 이야기를 한다. 캔버스와 종이는 그에게 무대와도 같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들려준다. 어느 누구라도 김씨가 포착한 이미지 속에서 풍겨나오는 정서를 직감할 것이다. 이 풍진 세상에서 느끼는 외로움과 그리움, 기쁨과 슬픔, 절망과 희망,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세상의 심포니를 지휘하고 있는 화가 김원숙씨다.

 

그림 그리는 것만큼이나 글쓰는 일은 김씨에게 일상생활이었다. 그가 그림이 있는 수필집을 낸 것도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지난해 말 김씨는 <그림 선물-화가 김원숙의 이야기하는 붓>(아트북스)을 냈다. 이민자들은 모국어와 영어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기 쉽다. 열아홉 살에 한국을 떠난 화가지만, 모국어를 부둥켜 안고 살아온 셈이다.

 

스토리가 있는 그의 그림은 시(poetry) 같고, 에세이(essay) 같다. 이 책에서 그림은 글의 그림자이기도 하다. 캔버스로는 알 수 없는 화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책, '이야기하는 붓(storytelling brush)'이다. 

 

김원숙씨는 이민 40주년을 맞았다. 미국 인디애나주 블루밍턴에 살며 뉴욕을 오가는 그를 지난달 22일 뉴욕 첼시의 아파트에서 만났다.

 

 

그림과 글 사이에서

 

긴 세월 동안 집 안팎에서 주로 영어만 쓰고 살았기 때문에 모국어인 한국말이 점점 어눌해지는 게 안타까웠다. 쓰지 않는 날개가 쪼그라들어 그냥 어깨에 붙어 있기만 한 것같이, 그래서 해결책이라고 시작한 것이 글쓰기였다. - <그림 선물>(책장을 열며)

 

- 화가이면서 꾸준히 글을 써서 책을 냈다.

"언어를 좋아하는데, 여기서 40년 넘게 살았다. 교포들은 한 100-200단어 정도로, 명사와 동사로 산다. 형용사, 부사를 안 쓰게 된다. 영어는 더욱 그렇다. 무엇을 묘사하는 것, 형용사와 부사로 인생이 풍요해진다."

 

- 글과 그림이 어우러진 책이다. 글과 그림 작업을 어떻게 조율했나.

"이 책의 글은 그림을 설명하는 글들은 아니다. 설명이 되는 일도 아니다. 그저 이런 그림들이 나오게 된 내 삶의 언저리를 이야기한 것이다. 일기 같은 글을 써놓고 그려놓은 그림 중에서 갖다붙인 것도 있고, 그림을 그려놓고 보고 써내려간 것도 있다. 쓰다보니 또 다른 이미지가 보여 다른 그림을 그리게 된 것도 있다. 그러니 어느 것이 먼저랄 것도 없는 다 같은 놀이다."

 

- 그림과 글의 차이는.

"그림은 음악처럼 사람이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세계를 그려내는 예술이다. 그런데, 문학은, 특히 시의 세계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언어로 나타내는 예술이라서 더욱 신기하다. 글에는 그림처럼 적당히 숨어버릴 곳이 없다. 내겐 신선한 도전이다."

 

- 언제 글을 쓰고, 언제 그림을 그리나.

"글은 마감 앞두고, 일기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날씨부터 공책에 꼭 쓴다. 옆에 그림도 그리고. 어느 날은 두 단어로 끝나고, 어느 날을 길게 쓴다. 지난해 페트라(Petra)를 다녀온 후, 인간관계가 어려웠을 때는 길게 쓰기도 하고. 글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그리는 것이 그림이고, 글이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또 다른 세계다. 사과도 오렌지도 다 맛있는 것이다."

이즘(ism)보다 내 마음을 따른다

 

나의 그림들은 자화상의 요소가 많다… 내 눈에 보이는 세상, 내 마음에 와닿는 정경들, 나를 들뜨게 하는 것들, 내가무서워하는 그림자들, 내가 간직하고 싶은 순간들이 모두 그림이 된다. '나'라는 작은 우주 속에 떠다니는 수많은 소리, 기억, 이야기, 그리움, 꿈 등의 이미지들이 화폭에 내려앉아 자기 자리들을 잡고 이어져서 그림이 만들어진다. 내가 살아내는 삶의 일기책이다. - <그림 선물>('나의 자화상', p218)

 

- 일리노이주립대 유학시절 미국 화단의 경향은.

"컬러필드(color field), 추상이 대세였다. 로츠코(Mark Rothko), 마더웰(Robert Motherwell), 프랑켄텔러(Helen Frankenthaller) 등. 나도 그렇게 했다. 커다란 캔버스에 남보다 더 크게 해서 점수도 잘 받았지만, 내 삶과 관련이 없었다. 그날 바람이 어떻게 불었는지, 엄마에게서 어떤 편지가 왔는지…. 난 그런 이즘(ism)보다 즉각적이고, 시각적인 사람인 것 같았다. 해롤드 보이드 교수에게 그림을 보여주었더니 '이게 너야, 왜 이런 작업을 하지 않니? 그게 더 정직하다'고 말해주었다. 그게 나에게 중요한 중요한 포인트가 됐다." 

 

- 그리고, 뉴욕으로 왔다. 무명화가 시절 어떻게 살았나.

"메이시, 블루밍데일, 헨디 벤델에서 스타일리스트로 일하면서 밤에 그림을 그렸다. 몰론 처음엔 조수로 시작했다. 지금도 메이시가 고마워서 그냥 들어가서 쓸데 없는 걸 사기도 한다. 메이시 덕분에 아이들 자전거도 샀고, 우리가 먹고살았으니까." 

 

- 그림이 팔리기 시작한 때는.

"1980년대 초 브룩알렉산더 갤러리(Brooke Alexander Gallery) 사람이 우연히 우리 집에 와서 내 그림을 봤다. 드로잉센터에서 그룹전을 했다. <뉴욕타임스>에 리뷰도 잘 나왔다. 그리고 브룩알렉산더에서 전속하게 됐다. 그때는 큰일이라서 '나도 미술사에 들어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2년 반 하고 나니 못하겠더라. 당시 내 그림이 어두웠다. 몇 년 후 나는 괜찮아졌는데 여전히 화랑에서는 어둡고 극렬한 이미지를 원했다. 나는 그게 아니었다. 꽃도 그리고 싶었다. 고민을 많이 했다. 신문에도 나고, 엄마 아버지도 좋아하고, <뉴욕타임스>에 '오리지널하다', '재능 있다'라고 나면서 뜨기 시작했다. 나도 물론 그런 관심이 너무 좋았다. 난 젊었고, 다들 고생하는데, 내가 천사가 된 느낌이었다. 갤러리에선 뉴욕센트럴 화구점에서 맘대로 갖다 쓰라고 했다.

 

그런데 족쇄처럼 되어갔다. 갤러리에서 원하는 대로 하다간 자살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내가 아닌 것을 그려야 했다. 난 변했다. 나한테는 절실했다. 그래서 갤러리를 떠났다. 하지만 계속 연결이 되서 전시도 많이 했다. 내가 정치적이지 못해서, 더 알려질 수 있었을 텐데 그게 나의 한계였을지도 모른다." 

 

- 그게 여성 화가의 한계일까.

"결혼했고, 아이들이 들어왔고 해서 난 내 커리어에 집중할 수 없었다. 가족에 집중해야 했다. 하지만 여성 작가라서 특별히 열등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난 이런 작업을 하는 여성이고 싶었다. 세계적인 작가가 되려면, 전략도 있어야 하며, 모든 것을 투자하고 희생해야 할 것이다. 커넥션도 있어야 하고.

 

남성 작가와 차이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난 애 보는 것이 좋았고, 재미있었고, 내 그림을 끼적거리는 것이 좋았다. 난 가족이 더 중요한 사람이다. 미술계에 게임의 규칙이 있다. 내가 그걸 했으면, 더 성공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난 아웃사이더로서 행복했다."

 

- 서양 미술사도 가부장적이고, 아직도 뮤지엄 전시 역시 남성 작가 중심이다. 아직도 여성작가 전시는 드물다.

"어느 날 조나단 보로프스키(Jonathan Brofsky) 그림을 본 후 나오는데, 절망감이 들더라. 그는 남자이기 때문에…. 센티멘트와 아이디어는 비슷한데, 남성 호르몬이 갖는 힘이 느껴졌다. 조수들을 상당히 많이 두고 작업하는 작가들도 있다. 나도 스튜디오가 크고, 작업도 노동집약적이라 조수를 한번 써봤다. 그런데 밥을 먹었을까 등 작업 외의 잔신경 때문에 쩨쩨해져서 그만두었다. 측은지심이 앞선다." 

 

- 주류 화가가 될 기회가 있었는데.

"조수 쓰는 것 못하고, 파티에 안 가고, 남자 친구가 누구냐 등 내가 그 게임을 못하고, 안하는 것이다. 나는 아웃사이더로서 더 편안하다. 아웃사이더가 볼 수 있는 것 아닐까. 브로프스키 전시 보면서, '노골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난 그런 데는 불편해서 못 간다. 난 자신이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정직해야 한다. 하나님이 널 어떻게 하느냐가 더 중요하지, 세상이 널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 후회는 없나.

"내겐 항상 전시보다 가족이 우선이었다. 나도 내 그림을 현대적으로 만드는 법도 여러가지 안다. 그림을 절반 태우거나, 잘라서 불태운다든가 하는 등 현대적으로 할 수 있지만, 그건 내가 아니다. 그래서 답답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내게 부자연스러워서 못하겠다."

 

  

이름보다 아름다움을 남기고파

 

- 중년의 위기를 거쳤나.

"그런 거 없었다. 내가 좀 둔한 것 같다. 나이 든다는 것이 누구에게든지 오니까 새로운 게임이며, 상당히 재미있을 수 있다. 그런데 난 잘 못 느끼고 산다. 엄마 살아 계실 때 전화해서 물었다. '엄만 어땠어, 폐경 끝나고?' 그러자 엄마는 '니가 안 바쁘나, 그런 것 생각할 시간이 어딨노! 아이들이 여덟이다' 하고 대답했다. 그래서 느꼈다. '모두 어떻게 보느냐에 따른 것'이다. 옆에서 친구들이 '우울하다', '죽을 것 같다'고 할 때 왕따 당할까봐 나도 동의는 한다. 사실 살다가 괜히 기분 나쁜 날도 있지 않나."

 

- 전업 화가로 안정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화가로서 전환기는 언제였나.

"삶에는 모멘텀이 있다. 난 작년 이맘 때 페트라(Petra) 여행 후에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뀐 것 같다. 이탈리아 볼로냐에 사는 피아니스트 동생 원미의 50세 생일을 기념해 둘이 간 여행이었다. 우린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기에 이스라엘에 한번 가보기로 했다. 우리가 갔을 때 무언가 영적인 걸 기대했는데, 이스라엘은 종교를 파는 디즈니랜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극심한 상업주의가 우리를 짓누르고 있었다. 이틀을 남기고 뉴욕의 친구와 통화하다가 '이스라엘은 실망이지요, 페트라에 가보세요'라고 했다. 귀가 번쩍 뜨였다. 이스라엘을 더 이상 못 참겠어서 우여곡절 끝에 요르단 국경을 넘었다." 

 

- 페트라에 뭐가 있었나.

"산악지대로 험악했다. 그런데, 페트라에서 눈물이 막 났다. 옛날에 산 도둑놈들이 살던 곳에 강, 대양도 없는 산 속 바위에 신전, 사원, 집 등을 조각한 것이다. 바위에 사람, 사자 형상들이 있었다. 숨이 딱 멎을 정도로 아름다운데, 작자 미상이다. 이런 아름다움이 이 오랜 세월을 서 있는데, 이런 그림에 이름을 '김원숙' 하고 올리는 것이 참 의미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서 무언가 탁 벗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일종의 해방감이었다. 아름다움이라는 것에 '에고(ego)'를 걸기 시작하면 게임이 된다. 나중에 '김원숙, 뉴욕 오가던 사람…' 그런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객관적인 아름다움 하나를 남기는 것이 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삶에서 그런 전환점이 오는 것 같다. 

"여행이 될 수도 있고, 다른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느낌이 통하는 친구들에겐 은행을 털든지 어떻게 해서든지 페트라로 가라고 말한다. 어제 허수경의 소설 <박하>를 끝냈는데, 읽으면서 페트라를 생각했다. 모멘텀이 왔을 때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데, 어느 순간 삶에서 변화할 필요가 있다. 나의 경우는 전시를 준비하면서 헐떡거렸었다. 걸작이나 경매에서 잘 팔리는 그림이 아니라 좀 더 사적으로 되는 것 같다. 전시 자체보다도 내가 만족할 만한 것을 끄적거리는 것이 더 중요해졌다."

 

- 그림은 자신에게 무엇인가.

"그림은 엄청난 축복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루종일, 매일 할 수 있고, 그걸로 자기과시도 하고, 돈도 벌고. 더 이상 바랄 수 없는 행운아다."

 

그때 내 마음 속에 들려오는 소리… "너희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나를 찾느냐?" 인간의 영광을 영원히 남기려고 튼튼한 바위산들을 깎아 천년만년 남기려했던 이들과 달리, 물질적인 흔적을 남기는 것과는 거리가 먼 예수의 흔적은 영혼의 자취에서 찾아야 하는 것을. 그래서 이스라엘이 나에겐 그다지도 답답하고 쓸쓸했나 보다. 페트라의 산을 뒤로 하고 웅장한 노을 속에 해가 지고 있었다. - <그림 선물>('페트라', p143)

 

☞ 김원숙

1953년 부산에서 태어나 1972년 홍익대학교 재학 중 미국으로 이주 일리노이주립대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1976년 일리노이주립대 비주얼아트센터와 명동화랑에서 개인전을 연 후 미국, 한국, 독일, 브라질 등지에서 40여 차례 개인전을 열었다. 1995년 '올해의 UN후원 예술가'로 선정됐다. 2004년 30년간의 작품을 모은 화집 <서정시의 붓 김원숙(Lyric Brush: Wonsook Kim, Paintings and Drawings 1972-2002, 혹스퍼블리싱)> 출간.


태그:#김원숙, #재미 화가, #그림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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