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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로 망명도생하다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표지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표지
ⓒ 민족문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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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도의 겨울 추위는 참으로 엄청나다. 추운 날은 아예 공기의 느낌 자체가 다르다. 공기도 쨍하게 얼어붙은 것 같을 때도 있다. 어떤 날은 해도 안 보이고 온 천지에 눈서리가 자욱하여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하늘과 땅 사이에 오직 바람 소리만 요란하다.(66쪽)

<아직도 내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의 내용을 구술한 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초대 국무령 이상룡 선생의 손부 허은(許銀) 여사이시다. 허은 여사는 큰집 할아버지 왕산(旺山) 허위(許蔿) 선생이 13도 창의군 군사장으로 서대문 감옥에서 순국하시던 1908년 그해 경북 구미 임은동에서 태어났다.

왕산 형제들의 항일운동으로 일본순사들에게 시달리던 왕산 일족들은 1915년 한밤중에 봇짐을 싼 뒤 만주로 망명을 떠났다. 그때 허은 여사의 나이 여덟 살이었다.

그때가 구기자 잎이 파릇파릇 날 때였다. 하루는 내가 마당에서 놀고 있으니까 숙부님(許珪, 이육사 시인의 외삼촌)께서 대소쿠리를 들고 대밭으로 들어가시면서 "순사가 와서 아무개 아무개를 찾거든 모른다고 해라"고 하셨다.(24쪽)

그때 우리는 밤길을 걸어 구미 아래에 있는 부상역(필자 주, 그때 이후 선로 변경으로 지금은 사라진 역)에서 기차를 탔다. … 나도 물론이지만 거기 모인 사람 대부분이 기차를 보는 것은 생전 처음인 모양이었다. 겉모양은 요새와 비슷하나 일본인들이 칸마다 다니면서 감시했고, 한 의자에 두 사람이 앉게 했다. 독립운동가를 잡아내려는 열차 수색원들이 수시로 왔다 갔다 했다.(47쪽)

신흥무관학교

망명도생하는 왕산 일족들은 이렇게 열차를 타고 남대문역(현재 서울역)을 거쳐 국경 신의주에 이르렀다. 한만 국경을 넘어 만주로 가려다가 일본 순사에게 붙잡힐까 싶어 거기서부터는 중국인들의 돛단배를 빌어 압록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허은 여사
 허은 여사
ⓒ 이항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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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 동안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물이 얕은 곳에서는 배를 묶어놓고 쉬기도 하고 밥도 해 먹었다. 배 안의 방에 굴뚝 두 개가 있었던 것이 인상에 깊게 남아 있다. 아이들은 멀미 때문에 배 안의 방에 누워 있거나 그 굴뚝에 기대어 앉아 있곤 했다.
… 배로 보름을 가서 닿은 곳은 회인현(지금의 환인현)이었다. 거기서부터는 육로여행이었다. 말 스무 필을 임대했다. 겨우내 얼었던 땅이 녹아서 마차가 다니지 못했다. 흙이 찰지기 때문에 발을 디디면 푹 빠졌다가 발을 올리면 찰떡같이 달라붙어 걸음을 떼기가 쉽지 않았다.(54쪽)

드디어 통화현 다취원이란 곳에 다다랐다. … 식수로는 도랑물을 먹었다. 그런데 그해 오뉴월이 되자 모두가 발병했다. '수토병'이라고도 하고 '만주열'이라고도 했다.

물 때문에 생긴 전염병 같았다. 성산 어른 처가 집안의 송병기 씨, 권팔도네도 하나밖에 없는 애기를 잃었다. 그때 애 어른 할 것 없이 많이 죽었다. … 망명 온 댓바람에 겪은 일이라 모두들 당황했다. 만주까지 왔다가 죽어 간 사람들 생각하면 참 허망하다. 특히 어린아이들의 죽음은 그 부모들 가슴에 못질을 한 것이었다.(54쪽)

만주 허허벌판은 이때부터 흰옷 입은 우리 민족들로 허옇게 덮여갔다. 멀리서 서로 쳐다만 봐도 든든했다. 이렇게 되자 애국지사들이 한인자치단체(필자 주, 扶民團)를 만들어 엄중한 규율을 세우고 학교도 세웠다. 한인학교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이 합니하에 세워진 신흥무관학교이다. 우당 이회영(李會榮), 성재 이시영(李始榮) 형제와 나의 시조부 석주 이상룡(李相龍) 선생이 주축이 되어 세우셨다.(77쪽)

합니하의 신흥무관학교 옛 터로 현재는 포도밭과 논으로 변했다.
▲ 신흥무관학교 옛 터 합니하의 신흥무관학교 옛 터로 현재는 포도밭과 논으로 변했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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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

서간도에서는 8월 29일 밤이면 모두 학교 운동장에 모인다. 동네에서 단체로 찰떡도 하고 김치도 담가 나누어 먹고, 간단한 식도 하고 연극도 한다. 경술년(1910년) 국치일을 잊지 말자는 내용의 연극인데, 나는 그 연극을 보니 눈물이 났다. 그날은 국치일 노래도 목이 터져라 불렀다.

경술년 추팔월 이십구일은
조국의 운명이 다한 날이니
가슴을 치고 통곡하여라
자유의 새 운(運)이 온다(85쪽)

경신년(1920년)에는 가뭄으로 파종도 못하여 공사간 곤란이 심했다. 설상가상으로 10월에는 일본토벌대들이 전 만주를 휩쓸어 애국지사는 물론이고 농민들도 무조건 잡아다 학살하였다. 청산리전투에서 이범석·김좌진 장군을 위시한 독립군의 성과가 컸기 때문에 그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군이 대학살을 감행한 것이었다.(98쪽)

청산리에 있었던 항일전적나무비로 현재는 이 비를 찾아볼 수 없다. 대신 돌로 세운 비가 서 있다.
▲ 청산리 항일전적비 청산리에 있었던 항일전적나무비로 현재는 이 비를 찾아볼 수 없다. 대신 돌로 세운 비가 서 있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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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은 여사 열여섯 살이던 1922년, 또 다른 항일명문인 고성 이씨 석주 이상룡 선생의 손부로 출가했다. 영안현 철령허에서 화전현 완령허까지 아버지와 시아버지를 모시고 남편과 함께 이천팔백 리를 꼬박 열이틀 동안 기차를 타기도 하고 걸어 시댁에 도착했다.

요새 와서 생각을 하면 이천팔백 리 눈길을 시집가던 생각을 하면 우습다. 눈송이가 꽃송이처럼 눈앞을 훨훨 날아다니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기차를 타고 하얼빈에 와서 자고, 또 장춘으로, 장춘에서 길림까지. 운명이라는 것이 아마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항일투사 집안에서 태어나 항일투사 집으로 시집간 것도 다 운명이었던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나라의 운명 때문에 한 개인의 운명도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105쪽)

시할아버지는 석주 선생으로 바깥손님이 집안에 끊어지지 않았다. 어느 날 손님 다섯 분이 오셨다. 이청천(李靑天 1888-1957, 독립운동가), 신숙(申肅 1885-1967, 독립운동가), 황학수(黃學秀 1879-1953, 독립운동가), 이범석(李範奭 1900-1972, 독립운동가) 선생 등이었는데 이월 추위에 집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석주 어른이 이웃 중국인 지주에게 돈을 빌려와 쌀과 돼지고기를 사서 사흘 동안 손님을 대접했다. 그분들이 머무는 동안에 지은 글이 <개벽>이라는 잡지에 실리기도 했다.

거듭되는 비운

1932년 허은 여사는 시할아버지가 만주 땅에서 돌아가신 뒤 귀국하여 안동 임청각으로 돌아오지만 해방을 3년 앞둔 1942년 9월에 시아버지 이준형(李濬衡) 선생이 69세로 일본 세력이 득세함을 보고 비분강개하여 "일제치하에서 하루를 더 사는 것은 하루의 수치만 늘어날 뿐이다"라는 유서를 남긴 채 동맥을 자르고 자결하시는 비운을 겪었다.

허은 여사는 안동 임청각의 종부였다.
▲ 임청각의 군자정 허은 여사는 안동 임청각의 종부였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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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기간 중 피난지 아산에서 남편 이병화(李炳華) 선생이 동족 젊은이들끼리 죽창으로 잔인하게 학살하는 것을 보고 화병을 얻어 운명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등, 광복 후에도 친정과 시가 일족들이 계속 수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아직도 세계 도처 유랑민으로 떠도는 아픔을 이 책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에 구구절절이 기록하고 있다.

허은 여사는 친가 시가 모두 10여 분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하였고, 민족시인 이육사도 당신의 고종사촌으로 항일 명문의 집안 종부로 당신 일생이 항일의 발자취요, 수난 받은 우리의 현대사다.

집안의 남자들은 이제 독립유공자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지만 안살림을 책임졌던 여자들은 독립훈장도 없고 역사에 이름조차 없다. 필자가 호남의병전적지 답사로 영광의 김용구(金容球) 김기봉(金起鳳) 의병장 후손 김근순 전 대마면장을 만나자 그분은 증조할아버지 김용구 의병장의 충절보다 증조할머니 심씨의 효열부를 더 칭송했다.

"남자들은 나라를 위해 한목숨 바치는 게 당연한 일일 테지만, 꽃다운 20세에 청상(靑孀, 젊은 과부)이 되어 온갖 고난을 다 이기고, 송죽(松竹) 같은 절개를 지키며, 시아버님이 남기신 의소일기(義所日記)인 <신담록(薪膽錄)>를 평생 동안 가슴에 품고 모진 일제 강점기를 넘겨 세상에 빛을 보게 한 그 정성은 부덕(婦德)의 한 본보기입니다."

어두운 시절의 역사를 더듬는 필자에게 이 책은 독립운동가들의 집안 뒷이야기와 그 시절 처절했던 독립운가들의 생활사를 살필 수 있는 위편삼절처럼 귀한 책이다. 

2012년 삼일절을 앞두고 허은 여사의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책장을 넘기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출판기념회 날 모인 허은 여사의 유족들
 출판기념회 날 모인 허은 여사의 유족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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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아직도 내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허은 구술, 변창애 씀, 민족문제연구소 펴냄, 2010년 3월, 277쪽, 1만2000원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 독립투사 이상용 선생의 손부 허은 여사 회고록

허은.변창애 지음, 민족문제연구소(2010)


태그:#허은, #이상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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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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