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27세의 젊은 감독 김경묵의 작품을 봤습니다. 실험영화일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영화는 사실 매우 간결하고 명확합니다. 프로인 마당에 나이가 뭐 중요하겠냐만, 그래도 연출력과는 달리 생각보다 젊은 나이라서 놀랐습니다.

그의 전기(傳記)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영화는 소외된 자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 대상은 탈북자와 게이입니다. 그리고 이 의외의 조합이 3부에서 맞아떨어집니다. 이것이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입니다. 저는 이 둘의 공통점을 '여성과 돈'에서 찾았습니다.

'탈북자' '조선족'이라는 약점

 탈북자 준

탈북자 준 ⓒ 얼라이브 픽쳐스


준(이바울 분)은 임금체불에 직면합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알바생인 순이(김새벽 분)는 성추행을 당합니다. 준은 탈북자(새터민이라고 포장은 해주지만), 순이는 조선족입니다. 같은 민족이라는 거대한 집합이 존재하기에 준과 순이는 한국사회에 적응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한국인으로 대변되는 사장은 그들을 배척하고, 그들의 신분을 약점 삼아 착취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준은 도망칩니다. 하지만 결국 생사의 단계까지 몰리면서 돈을 벌기 위해 게이에게 몸을 팝니다.

마치 이 땅의 여성 고용인을 보는 것 같습니다. 영화를 보며 고용주 - 고용인의 관계가 단순히 자본으로만 종속관계가 형성되는 것은 아님을 느꼈습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라면 탈북자와 불법체류자라는 소외계층이지만, 이들은 지식과 정보습득에서 일반사람들에 비해 상당히 뒤처집니다. 마치 1970년대 이전, 교육으로부터 소외당한 여성들이 현재 노동현장에서도 소외당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배우지 못해서 물리적인 것 외에는 저항하는 법을 모르고 순응하는 것을 미덕이라 여기는 모습. 

그런데 이제는 인습됐을 것만 같은 이런 일은 여전히 기초 서비스업에서는 반복되고 있습니다. 학력 따지지 않고 채용한다고는 하지만, 역설적으로 학력 높은 사람을 떨어뜨리는 상황이 연출됩니다. 노조를 결성해야 할 이유를 느끼지 못하는, 자본 이데올로기에 쉽게 동화될 수 있는 교육계층을 골라서 채용하는 겁니다.

게다가 여성은 아직까지 남성에 비해 사회 활동 기회가 제한적이기에 쉽게 직장을 그만둘 수도 없습니다. 학력을 따지지 않고 뽑는다는 것이 과연 단순히 학력주의에 반하는 진보적 움직임인지 의심됩니다.

사회생활을 거세당한 '아내'

 게이 현

게이 현 ⓒ 얼라이브 픽쳐스

현(염현준 분)은 준과 달리 '안에 구속된 존재'입니다. 그래서 준의 이야기처럼 거칠고 역동적인 카메라움직임에 비해 현의 이야기는 굉장히 정적입니다. 현은 남자친구인 성훈(임형국 분)의 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현은 어느날 성훈의 부인의 전화를 받게 되고 성훈이 결혼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둘은 싸우게 됩니다. 이 싸우는 장면은 일반적인 남녀 싸움과 같은 형식입니다. 남성이 자존심 상해서 나가라고 소리 지르고, 여성은 진짜 나가려고 합니다. 그때 남성이 여성을 붙잡고, 둘은 섹스를 통해 화해합니다.

두 사람의 경우 남성으로 대변되는 인물이 성훈이고, 여성으로 대변되는 인물이 현입니다. 그렇다면 이 관계는 어떻게 갈리는 걸까요? 이 영화에서 생물학적으로 동성인 둘을 가르는 것은 돈입니다. 고정적 수입이 존재하는 성훈과 수입이 없는 현. 경제 활동을 하는 남편과 집에서 살림하는 가정 주부의 모습입니다. 남편의 돈 없이는 살 수 없는 아내는 남편에게 종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경제 활동은 남편에겐 사회생활을 권장하지만, 아내에겐 사회생활을 거세시킵니다.

하지만 이혼할 수도 없습니다. 이미 오래 전에 사회활동은 거세당했기에 막상 이혼을 하면 마땅한 직업을 구할 수도 없습니다. 때문에 이혼을 생각해도 이내 포기합니다. 그래서 현은 성훈의 섹스 요구를 받아줍니다.

<줄탁동시>의 끝... 새드 앤딩은 아니다

 3부 시작 준의 걸음

3부 시작 준의 걸음 ⓒ 얼라이브 픽쳐스


영화는 준의 걸음을 바쁘게 롱테이크로 좇습니다. 그리고 영화 제목인 '줄탁동시'라는 글씨가 올라옵니다. 병아리가 태어날 때 알 속에서 병아리고 쪼는 것을 '줄(啐)'이라고 말하고, 알 밖에서 닭이 쪼는 것을 '탁(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줄탁동시(啐啄同時)는 줄(啐)과 탁(啄)이 동시에 일어날 때 비로소 탄생이 완성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말은 일반적으로 사제 간에 사용되는 말입니다. 하지만 영화 <줄탁동시>에서는 이야기 형식상 안에서 밖으로 나가려는 현이 줄(啐),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려는 준이 탁(啄)이 됩니다. 둘은 만나서 자살하려고 합니다. 둘은 자살의 방식으로 가스 중독을 택하는데, 이때 뿌려지는 연기를 볼 수 없는 상황을 만들면서 초현실적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죽으려고 했지만 둘은 탈출을 감행합니다. 이때 두 가지 궁금증이 생깁니다. 첫 번째는 분명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것은 현인데 밖에 나온 사람은 준인가. 두 번째는 왜 하필 탈출한 곳이 건설 현장인가.

 <줄탁동시> 포스터

<줄탁동시> 포스터 ⓒ 인디스토리

첫 번째 궁금증에 제 대답은 죽는 과정에서 다른 상황에 놓였던 두 사람이 서로의 공통점을 찾아내면서 하나가 됐다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혹은 '줄탁동시'는 나오려는 병아리에 새 삶을 부여하지만 동시에 닭에게도 어미라는 삶을 부여시키는 과정이기에 어미 역시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두 번째 궁금증에 제 대답은 윤회를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삶 - 죽음 - 부활 - 유토피아로 이어지는 기독교(천주교, 개신교 포함)적 교리와 달리 끊임없이 삶을 반복하는 불교적 교리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건설현장은 노동 현장으로 대변되는 곳으로 결국 돈의 종속을 피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새드 앤딩(sad ending)로 마무리됐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니체의 말처럼 결국 '니힐을 극복하는 것은 끝없는 인간의 건설' 아니겠습니까.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개인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줄탁동시 김경목 이바울 임현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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