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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인권운동가인 케리 케네디(52) '로버트 케네디 인권센터' 대표
 미국 인권운동가인 케리 케네디(52) '로버트 케네디 인권센터' 대표
ⓒ 최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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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인권운동가인 케리 케네디(52) '로버트 케네디 인권센터' 대표는 인재근 한반도재단 이사장(59)의 4·11 총선(서울 도봉갑) 출마와 관련 "인재근은 훌륭한 지도자이고, 그의 선거구와 나라에 좋은 봉사를 할 것"이라며 환영했다.

케네디 대표는 지난 22일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하고, "인재근은 그 스스로도 굉장히 훌륭한 여성운동가이자 인권수호자"라고 평가했다. 케네디 대표는 지난 1987년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과 함께 인재근 이사장에게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을 수여한 바 있다.

"인재근, 홍해바다 가른 모세처럼 특출난 여성"  

"우리 (김근태) 의장님은 성격이 굉장히 신중하고 실수가 없는 반면에 난 다혈질이고 팍팍 내지르는 성격이어서, 어떤 면에서 정치하는 사람으로서는 (내가) 더 나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 2007년 6월 서울 인사동에서 만난 '김근태의 바깥사람' 인재근 이사장이 한 말이다.<관련기사 보기> 김근태 전 의장이 "대통합의 밀알이 되겠다"며 대선 불출마를 선언한 직후였다. 김 전 의장의 부인 인재근 이사장은 그의 불출마 결정을 강하게 반대했다. 그래서 기자가 물었다. "만일 본인이 정치를 했다면 잘 했을까?" 돌아온 답변은 이랬다.

"잘 했을 것 같다. 저에게 (남편보다) 먼저 정치권에 진입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안했다. 제가 먼저 하면 결 좋은 남편이 외조 해주느라 자기 일을 못할 것 같았다. 지금도 제가 (정치를) 하면 외조를 잘 해줄 것 같다. 앞으로도 기회가 온다면 꼭 몸부림치며 안 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기회가 오면 하죠, 뭐. 어렵게 생각 안 한다."

그로부터 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외조를 잘 해줄 것 같다'던 남편은 이제 고인이 됐지만 실제 인재근 이사장에게 정치를 할 기회가 찾아왔고, 그는 그 기회를 숙명처럼 받아들였다. 지난 21일 밤 그는 4·11 총선 출마 공식 선언을 앞두고 '김근태의 책상' 앞에 앉아 도봉구 주민들에게 편지를 썼다.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을 남편 김근태와 공동 수상한 의미를 다시 생각하며 확신에 찬 결단을 내렸습니다. 인권을 지키는 고난한 길, 그러나 반드시 누군가는 해야 할 그 길을 둘이 나누어 가라는 하늘의 뜻이었습니다."

인재근 이사장의 총선 출마 소식은 태평양 건너 미국 뉴욕까지 전해졌다. 그러나 지난 1987년 김근태·인재근 부부에게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을 수여했던 케리 케네디 대표는 별로 놀라는 눈치가 아니었다. 케네디 대표의 기억에 남아있는 인재근 이사장은 '홍해바다를 가르고 지나간 모세처럼 특출난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케네디 대표는 "가정에서, 지역사회에서, 학교에서, 나라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불의에 대항해 일어나서 좋은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이 인권운동"이라며 "학교에서 일진과 맞서든, 지구온난화를 방지하기 위해 나무를 심든, 모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케네디 대표와의 인터뷰는 미국 뉴욕 맨해튼에 위치한 '로버트 케네디 인권센터'에서 1시간에 걸쳐 진행됐다.

1988년 케리 케네디 대표로부터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을 수여받은 인재근씨와 자녀들. (출처 - 김근태 블로그)
 1988년 케리 케네디 대표로부터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을 수여받은 인재근씨와 자녀들. (출처 - 김근태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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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단 한 마디, 'Victory'(승리)... 정말 감격스러웠다"

- 1987년 김근태·인재근 부부에게 인권상을 수여한 이유는 무엇인가?
"인재근(한반도재단 이사장. 이하 호칭 생략)은 그 스스로도 굉장히 훌륭한 여성운동가이자 인권수호자이다. 당시 시대상으로 보면 매우 특출난 여성이다. 김근태(전 열린우리당 의장. 이하 호칭 생략)는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정권 모두에 저항한 사람이다. 매우 위험한 상황을 감수하면서 맞선 용감한 사람이다. 군사독재 당시 많은 사람들이 붙잡혀 가고, 고문당했고, 불법 처형도 있었다. 일반적으로 고문을 한 후, '어디가서 고문당했다는 얘기를 하면 다시 잡아다가 고문을 하고, 조용히 살면 풀어 주겠다'고 협박을 한다.

그런 일을 겪고 나면 대부분은 조용히 살았다. 그러나 김근태는 달랐다. 그는 그런 식의 제재에 맞섰다. 그런 고문이 불법이고 비도덕적이고 자신의 조국을 파괴한다고 말했다. 그런 식의 제재에 맞서는 것이 자신의 안전보다 중요하다고 믿었던 사람이다. (한국에서) 명망있는 사람들에 대한 고문이 자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최초로 공개 증언한 사람이다. 그렇게 군사독재 정권의 부당성을 (전 세계에) 알린 것이다."

- 1988년 두 사람에게 인권상을 수여하기 위해 직접 한국에 갔는데.
"우리는 미국 의회 상원 건물에서 행해질 시상식에 그들을 초대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그들의 출국을 허가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서울에 갔다. 거기에서 매우 특별한 수상식을 할 수 있었다. 300여 명이 참석했다. 처음으로 민주화 운동가들과 노동 운동가들이 한 자리에 모였음에도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었던 자리였다. (그 수상식으로 인해) 상당한 여파가 있었다고 생각되는데, 그들이 고립감을 벗어나 연대를 느낄 수 있는 자리였다." 

- 그 뒤로도 몇 차례 한국을 방문한 것으로 안다. 당시 상황을 설명해 달라.
"1년 반이 지나서 다시 한국에 돌아갔다. 당시 김근태는 경찰수배 중이어서 지하 도피 생활을 하고 있었다. 거기서 인재근과 자주 만났는데, 어느 날 인재근이 갑자기 내 호텔방으로 와서 '기회가 되니, 김근태를 만나러 가자'고 했다. 그녀의 손에 이끌려 (미행을 따돌리기 위해) 어느 건물로 들어갔다가 다시 다른 입구로 나오고, 택시도 계속 갈아탔다.

결국 한 건물의 지하에 있는 방으로 들어가서 김근태를 만났다. 당시 인재근도 몇 달 만에 김근태를 처음 만나는 것이라고 하더라. 인재근과 김근태 사이의 깊은 사랑을 보면서 짜릿한 감동을 받았다. 또한 그들의 나라 사랑도, 공동체와 한국이라는 대의를 위해 기꺼이 희생하는 것도 감명적이었다. 내가 귀국한 후, 김근태는 체포되어 수감됐다."

미국 인권운동가인 케리 케네디(52) '로버트 케네디 인권센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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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재근 이사장과 함께 교도소에 면회도 가지 않았나?
"1년 쯤 지난 1990년경, 다시 한국을 갔다. 인재근에게 '내가 무엇을 했으면 좋겠냐'고 묻자, '함께 남편을 만나러 가자'고 하더라. 당시 주한미국 대사인 도날드 그레그를 만났지만 그는 '김근태가 가장 유명한 수감자이니, 만날 수 없다'고 말했다. 한국의 법무부장관, 군 장성 등을 만나고 노태우 대통령의 청와대와도 접촉했지만, 정식 면회를 허가 받지 못했다. 인재근에게 '모두 안 된다고 하니, 어찌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인재근은 '그냥 김근태를 보러가자'고 하더라. 그래서 우리는 조그만 승합차에 올라타 서울에서 2시간 반 떨어진 교도소로 향했다. 

차 안에서 인재근과 한국 재야운동 상황에 대해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녀는 누구는 실종됐고, 누구는 불법 구금됐고, 누구는 고문당했다고 말했다. 나는 그 모든 것을 (세계에 공개하기 위해) 통역을 통해 기록했다. 그렇게 얘기를 듣다가 갑자기 '김근태를 면회하러 갔다가 우리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지'하는 걱정도 들었다. 한갓진 곳에 위치한 교도소 진입로에 들어서자, 전투경찰이 삼중으로 서서 도로를 막고 있었다. 어깨를 마주한 채 헬멧에 방패를 거머쥔 경찰은 마치 장벽 같았다.

나는 평상복에 바지를 입었지만, 인재근은 일반 주부들처럼 치마를 입고 있었다. 곧 인재근이 앞에 서 있던 경찰 두 명을 밀치고 들어갔다. 이어 2열, 3열의 경찰도 밀치고 가면서 조그만 통로를 만들어냈다. 마치 모세가 홍해를 가르는 것처럼 들어갔다. (내내 사무적인 자세로 앉아있던 케네디 대표가 갑자기 일어섰다. 그는 흥분에 겨운 표정으로 두 팔을 허공에 휘휘 저으며 실제 인재근 이사장이 전투경찰을 밀쳐냈던 모습을 기자에게 재현해 보이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는 교도소 정문으로 나아가 한 관리와 언쟁을 벌였다. 그녀는 다시 그를 밀치고 나서 교도소 문을 열었다. 문은 잠겨있지 않았고, 우리들은 그냥 그녀를 쫓아 들어갔다. 교도소의 마당을 지나서 본관 건물까지 50~60미터를 걷는 동안, 인재근이 처음으로 내게 영어로 말을 건넸다. 단 한 마디였다. 'Victory'(승리). 나는 정말로 감격스러웠다." 

미국 인권운동가인 케리 케네디(52) '로버트 케네디 인권센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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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이 기억하는 '김근태'는 어떤 사람인가?
"(1983년 로버트 케네디 인권위원회 고문을 역임한) 김대중 전 대통령을 통해 그를 알게 됐다. 김근태는 용기 있고 비전이 가득한 지도자였다. 동시에 매우 겸손한 지도자였다. 자신이 언제나 관심의 중심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점잖고, 조용하고, 민중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갖고 있었다." 

- 김근태 전 의장 사망과 관련 인권센터 홈페이지에 추모의 글을 올렸는데.
"가슴이 많이 아팠다. 마지막으로 김근태를 만난 것이 아마도 4~5년 전이다. 김근태는 당시 국회의원으로서 대통령 선거 출마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시기에 맞지 않는 죽음은 전 세계 인권커뮤니티의 커다란 손실이다. 또한 그는 내가 매우 깊게 사랑했던 친구이다. 나는 또한 인재근의 김근태를 향한 깊은 사랑도 알고 있다. 인재근과 그의 자녀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 김 전 의장의 부인 인재근 이사장이 오는 4월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 전 의장의 지역구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했는데.
"우선 나는 선출직에 출마하는 모든 개개인에게 깊은 존중을 갖고 있다. 가족과 자기희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인재근은 훌륭한 지도자이고, 그의 선거구와 나라에 좋은 봉사를 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아직도 국가보안법 존치? 참으로 불행한 일"

- 최근 한국의 인권 실태와 관련해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는 주제는?
"이민노동자, 국가보안법, 사형집행의 재등장, 국가인권위원회 독립성과 가혹행위 등이 우리가 관심 있게 보고 있는 문제들이다." 

- 국제앰네스티가 지난해 한국 국가인권위원회의 독립성에 대해서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는데.
"그렇다. 최근에 국가인권위원회 위원들 중 많은 이가 물러나고 새로운 위원이 선임된 것으로 알고 있다. 이들 중 몇몇은 독립성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 한국 국가인권위원회의 훼손된 독립성과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방안은?
"우선 인권환경을 개선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그것 때문이라도 김근태의 죽음이 참으로 안타깝다. 더 이상 필요 없는 국가보안법도 폐지되어야 한다. 정부를 비판하는 것을 불법화하는 그런 법은 폐지되어야 한다. 남한 정부는 강한 정부이고, 국민의 비판을 견딜 수 있는 민주 정부 아닌가? 국민이 비판하더라도 정부는 건재할 것이다." 

- 한국처럼 경제적으로 융성하고, 강력한 시민사회가 존재함에도 인권상황이 나빠진 국가가 있는가?
"인권문제가 없는 나라는 없다. 남한만 하더라도 사형제가 합법이고, 미국도 매년 많은 사람들을 처형한다. 한국은 현재 이민자들의 인권을 유린하고 있다. 몇 년 전 우리는 이주노동자를 대표하는 인권단체에게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을 수여했다. 이 단체는 미국에서 천명 이상의 이주노동자들을 노예상태에서 해방시켰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같은 사명을 갖고 있는 것이다. 남한 인권운동가들이 미국에 와서 미국 문제도 지적하면 좋을 것이다. 압력을 가 할 수 있다면, 좋은 나라를 만들 수 있다." 

- 한국의 이명박 대통령과 보수 세력은 여전히 국가보안법의 존치를 주장하고 있는데.
"국가보안법은 김근태와 인재근이 폐지하려고 애썼던 법이다. 또한 김근태가 불법 구금되어 23일 간 고문 받게 한 법이기도 하다. 아직도 그런 법이 존치되고 있다니,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이 법은 권력 남용의 근원이다. 법령 자체가 추상적으로 되어있지 않나. 또한 재야를 탄압하고, 표현-집회의 자유를 억압하는 데 사용되어왔다. 이법에 의해 체포된 사람들은 어김없이 고문을 당했었다. 이 법은 남한에서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인권유린들 중 하나이다." 

케리 케네디는 누구?
존 F.케네디 전 미국대통령의 조카이자 로버트 케네디 전 상원의원의 딸인 케리 케네디는 1981년부터 인권 운동을 시작했다.

그는 1987년 아버지의 유지를 기리고, 유엔인권선언이 규정한 권리를 보호하려는 목적으로 '로버트 F. 케네디 인권센터'를 설립, 아동노동, 실종, 토착민의 권리, 독립적인 사법제도, 표현의 자유, 인종폭력, 환경, 여성의 권리 등 다양한 인권 문제의 해결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전 세계의 인권 운동가들을 소개한 <진실을 외쳐라>(2006) 등이 있다.

- 1970~1980년대 한국 군사독재정권의 폭압적이고 비인권적인 행태에 대해 미국도 일정한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나?
"미국은 경제 강국, 군사강국이다. 그러나 미국의 힘은 돈으로부터도, 군사력으로부터도 나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힘은 미국이라는 사상, 도덕적 지도력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그것 때문에 사람들이 미국을 좋아하는 것이다. 적어도 우리 케네디 가문 사람들이 지향한 외교정책은 미국의 가치, 자유의 가치, 민주의 가치, 노동권의 가치에 걸맞은 것이었다.

1970~80년대 미국지도자들은 이런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우리와는 달리, 그들의 비전은 결국 외국의 반공 군사독재와 동맹하는 것이었다. 반공주의를 주창하는 그 누구와도 연맹을 맺는 거다. 따라서 미국은 남한의 군사독재와 연맹하고 지원했다. 또한 칠레의 피노체트와 연맹했다. 게다가 남아프리카의 인종분리 정권과도 연맹했다."

- 전 세계를 다니면서 많은 인권운동가들을 만났다. 한국의 인권운동가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모든 인간은 내면에 용기를 갖고 있다. 문제는 자기 이해가 아닌 공동체의 이해를 위해 이 용기를 불러낼 수 있는 것인가이다. 이것이 우리 교육프로그램의 목표이다. (인권운동은) 가정에서, 지역사회에서, 학교에서, 나라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불의에 대항해서 일어나 좋은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학교에서 일진과 맞서든, 지구온난화를 방지하기 위해 나무를 심든, 모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태그:#인재근, #케리 케네디,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 #김근태, #4.11 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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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너머의 진실을 보겠습니다. <오마이뉴스> 선임기자(지방자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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