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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촌은 의성읍 북쪽에 있다. 단촌(丹村)은 '붉은[丹] 마을[村]'이란 뜻이다. 단촌은 고추가 유명하다. "고추" 하면 붉은색이 떠오른다.

 

의성군 홈페이지는 이 지역에 단촌이라는 이름이 붙은 까닭을 '붉은 흙이 많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이상한 일이다. 붉은 흙은 농사를 짓기에 별로 좋지 않은 땅으로 알려져 있는데, 어찌 이곳이 대단한 고추 재배지가 되었을까.

 

궁금증은 단촌면 소재지로 들어서면서 곧장 풀린다. 의성군과 안동시의 경계가 눈앞에 보일 만한 지점에서 단촌면 소재지로 들어가는 이정표를 보고 오른쪽으로 내리면, 바로 눈앞에 '단촌 고추'라는 제목을 단 입간판이 불쑥 나타난다. '단촌은 지명과 같이 붉은 흙과 붉은 돌이 많은 지역으로서 일교차가 심해 고추 재배의 최적지로 꼽힙니다. 단촌 고추는 빛깔이 곱고 선명하여 전국에서 인정받고 있습니다.' 

 

고추농사를 짓는 데에는 아침 저녁으로 온도 차이가 많이 나는 기후가 좋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람은 일교차가 심하면 감기에 걸리는데 고추는 오히려 그 덕을 본다는 것이다. 이렇듯 여행에는 뜻밖의 지식을 얻게 되는 즐거움도 있다.

 

그러나 아쉬움이 더 큰 것도 사실이다. 고추가 잔뜩 달려있는 고추밭, 붉은 고추를 따서 말리고 있는 정경 등을 볼 수 있어야 하고, 더욱 좋기로는 고추농사를 직접 지어보는 체험을 해야 하는데, 지금이 겨울철이라 도저히 그런 기회를 만들 수가 없다. 어쩌리, 사람이 자연을 이길 수는 없으니 고추밭이 나를 부를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고추 최다 생산과 품질을 자랑하는 단촌면

 

면소재지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오른쪽 도랑을 따라 나란히 이어지는, 화산(禾山)서원으로 가는 길을 선택한다. 화산서원은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도와 큰 공을 세웠고, 병조판서(지금의 국방부장관)로 있으면서 두만강 하류 일대에 6진을 설치하여 여진족의 침입에 대비해야 한다는 주장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펼쳤던 마천목(馬天牧, 1358∼1431)공을 기리는 서원이다.

 

서원은 마을 뒤끝의 높은 산비탈 중턱, 저 아래로 집들의 지붕 위와 벼가 익어가는 들판을 내려다보는 자리에 앉아 있다. 마을이름이 화곡이라 서원에도 화산서원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본래 1855년부터 마천목을 모시는 사당이 세워져 있었지만 지금 건물은 그 당시의 것은 아니다. 1986년에 새로 지었다. 하지만 자리잡은 터가 좋고, 비탈을 잘 활용하여 여러 건물들의 높낮이에 자연스러운 변화와 적당한 조화를 준 덕분에 제법 예스러운 분위기가 느껴진다.

 

화산서원에서 되돌아 나와 단촌면 소재지로 들어섰을 때쯤이면 잠시 멈추어 여유를 즐기는 것이 좋겠다. 마침 고추철이라면 '고추시장'을 둘러보는 것도 썩 괜찮은 추억이 될 것이다. 의성읍에서 '마늘시장'을 보았다면, 단촌에서는 '고추시장'이 대도시에서 결코 맛볼 수 없는 구경거리인 까닭이다. 하지만 지금은 고추시장도 서지 않는다. 아쉽다.

 

잠시 쉬면서, 국가 지정 보물인 관덕동 3층석탑을 찾아갈 준비를 한다. 미리 가지고 온 읽을거리들을 훑어본다. 답사여행은 출발 이전에 어느 정도의 배경지식을 쌓아야 현장 방문의 보람을 두 배 세 배 얻을 수 있는 '교육과정'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관덕동의 옛날 이름은 '사자골'이었다. 그렇다고 사자가 아침 저녁으로 나타나는 마을이었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나라에는 처음부터 사자가 없었다. 다만 이 마을에만 사자가 있었다. 뒷산의 생김새도 마치 사자처럼 보였지만, 관덕동의 뒷산에는 뛰어다니지 않고 제자리에 곱게 앉아만 있는 네 마리의 사자가 있었다.

 

'사자'들은 아름다운 조각을 자랑하는 멋진 탑을 지켰다. 그리고 사자들이 지키는 탑 뒤에는 누군가가 암자를 세웠다. 당연히 그 암자에는 사자암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하지만 암자가 없어지면서 터만 남게 되었고, 1940년에는 도둑이 사자 두 마리를 훔쳐가는 일까지 생겨났다. 그러자 남은 두 마리가 쓸쓸하지 않을까 생각한 사람들이 그들마저도 대구박물관이라는 낯선 울타리 안에 가두어버렸다.

 

탑을 지키던 돌사자도 국가 지정 보물

 

관덕동 3층석탑은 국가가 지정한 보물 188호이다. 하지만 신라 말부터 1천년 이상의 세월 동안 그 석탑을 지켜온 네 마리 돌사자들도 역시 보물이었다. 보물 202호. 그만큼 돌사자들은 너무나 예뻤다. 그래서 마을은 '사자골'로 널리 알려졌다. 마치 금성면의 어느 마을이 대단한 탑을 거느린 바람에 이름까지도 '탑리'로 바뀐 것처럼.

 

그러고 보니, 없어진 돌사자도 보물이고, 남아 있는 탑도 보물이다. 문득 궁금하다. 돌사자가 본래의 자리에 남아 있었으면 어떻게 되나. 탑과 돌사자를 뭉쳐서 하나의 보물로 보나, 아니면 지금처럼 둘 다 따로따로 보물로 인정하나.

 

물론 후자이다. 그만큼 관덕동 3층석탑은 문화재적 가치가 대단하다. 주위에 다른 문화재도 없고, 그렇다고 유락시설이 있는 것도 아니며, 도로변에 있어 눈에 잘 띄지도 않는 탓에 관덕동 석탑은 찾는 이도 별로 없다. 그래서 도둑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꽤 이름이 난 고운사 로 가는 길목에 있으니, 그리로 향하는 답사자라면 중간에 이곳 관덕동 3층석탑을 꼭 찾아보실 것을 권유드린다. 탑의 몸체에 새겨진 그림들이 특히 아름다우니, 애써 찾아간 보람만은 충분히 맛볼 수 있다!


태그:#의성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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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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