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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 밤

베드버그의 공격이 두려워, 저 천막을 거부하고 우리 모두는 모닥불 곁에서 밤을 견디기로 했다.
 베드버그의 공격이 두려워, 저 천막을 거부하고 우리 모두는 모닥불 곁에서 밤을 견디기로 했다.
ⓒ 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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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양에 물들어 오렌지 빛깔로 반짝거리는 모래 능선, 시나브로 어두워지는 사막의 먼 하늘, 물결처럼 부드러운 모래 위에 팔베개를 하고 누우면 손가락 사이로 간지럽게 흘러내리는 모래의 질감, 낮 동안 데워져 온기가 남아있는 모래...... 어느덧 어두워진 밤하늘에는 설탕처럼 반짝거리는 무수한 별들, 손에 침 발라 찍어보고 싶을 정도로 가까이 느끼게 될 줄 알았는데.

운 없게도 보름 즈음이다. 커다랗고 둥두렷한 달이 밤하늘을 염치도 없이 환하게 밝히는 바람에 별 하나 보이지 않는 사막의 밤이다. 밤을 보내기 위해 캠프에 도착할 때부터 김은 피식 샜다. 캠프는 사막의 한가운데가 아닌 마을 가까운 곳에 위치한 듯하다. 사막의 반나절 투어만 신청했던 '고추피클' 커플은 이집션 기사와 함께 차를 타고 떠나 버렸다. 기사는 내일 아침 날이 밝으면 우리를 데리러 다시 온다고 했다.

게르 같은 천막이 있고, 마당 한쪽에는 툭 건드리면 쓰러질 것 같은 의자들이 모닥불을 둥글게 둘러싸고 있었다. 천막 안을 들여다보니 역시나 실망이다. 바닥에 깔린 양탄자는 백년 묵은 도깨비 빤스처럼 더러워 보였다. 천막 안에서 잠을 잔다면 그 악명 높은 베드버그로부터의 무차별 공격을 피하기 힘들 거라는 걸, 이미 다 주워 듣고 온 우리 모두는 모닥불 주변에서 밤을 견디기로 했다.

잘 자고 일어났더니 깔고 덮고 잔 이불이 걸레나 다름없다는 걸 발견하고는 놀랐다는 둥, 온 몸이 베드버그에 물려 가렵다는 둥, 인터넷에 올라온 사진이나 글들은 사막에서 밤을 보내고자 하는 여행자들에게 잔뜩 경계심을 심어 주었다.

'시리아'와 '파리'와 우리 가족은 모닥불 앞에 바짝 모여 앉았다. 모두들 약속이나 한 듯이 준비해 온 침낭 안으로 기어 들어가 지퍼를 끌어 올리고 고치처럼 웅크리고 의자에 앉았다. 잠자기는 다 틀렸다. 제발 겨울 사막의 밤이 견딜 만하기를 기도할 뿐.
      
침낭을 살까말까 고민했었다. 식구 수대로 준비하자니 부피도 너무 크고, 그렇다고 또르르 말면 물통만해지는 오리털 침낭은 너무 비싸, 그냥 사막에서의 하룻밤인데 어떻게든 견뎌볼까 하다가, 혹시 여행맛 잡칠까 싶어(여차하면 사막에서의 밤을 거부하는 사단이 날 수도) 큰맘 먹고 준비해 왔는데 아주 훌륭한 선택이었다는 걸 깨닫는다. 가볍고 제일 싼걸로 샀는데도 제법 따뜻하다.

닭고기를 구워 저녁 식사를 차려 주었던 이집션은 장작이 다 타들어갈 만하면 하나씩 하나씩 들고 나타난다. 장작이라고 해봐야 보기 좋게 패어 놓은 그런 땔감이 아니라, 그냥 나무를 통째로 뭉텅뭉텅 잘라 놓은 것들이다. 타닥타닥 나무가 다 탈 즈음이면 온기도 약해진다. 한꺼번에 좀 쌓아두면 안 되나, 감질나게 왜 하나씩 갖다 주지?, 의아했는데 그 이유는 머지않아 알게 된다.

우리는 여기서 밤을 보낼테니 땔감이 많이 필요하다, 한꺼번에 준비해 달라, 고 말할까 말까 망설이는 사이, 이집션은 발길을 뚝 끊었다. 예고도 없이 제 숙소에 들어가서 잠자리에 들었나 보다. 우띠, 이제 우리가 밤새도록 땔감을 옮겨야 할 판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막을 흐르는 밤공기는 차가워지고 있다.

시리아는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하게 자리를 지키고, 파리는 침낭 속에서 고양이처럼 화장한 얼굴을 지운다. 그냥 호텔로 돌아가자고 투정 부리는 철없는 아빠를 어린 딸이 간신히 달래 주저 앉혔다. 사막에서 밤을 보내기로 하고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갈 수는 없지 않냐고, 견뎌 보자고.

의자 하나에 고치 하나씩 틀고 앉았다. 가끔씩 가벼운 의자가 균형을 잃고 픽픽 넘어지는 바람에 모래 바닥에 고꾸라지는 수모를 당하기도 한다. 이제, 불 앞에서 홧홧해진 볼따구니를 문질러 가며, 즐거웠던 낮의 기억으로 밤새 견뎌야 할까부다.

사막의 낮

사막의 낮은 즐거웠다. 마을을 벗어나자마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한눈에 사막이 펼쳐졌다. 솜씨 좋은 이집션 기사는 우리를 사막의 놀이동산으로 안내했다. 앞이 내려다보이지 않는 모래 능선을 기어 올라가더니 순식간에 떨어졌다. 끼야악, 꺄악! 비명 같은 함성은 모래알처럼 산산이 사막으로 퍼져 나갔다. 두번째, 세번째부터는 차가 모래산을 기어 올라갈 때부터 스릴이 느껴져 미리 소리를 질러대곤 했다.

막막한 사막 한가운데서도, 기사는 어디의 모래능선이 오를만한지, 경사도가 심해 폭포처럼 떨어지는 재미를 더해주는 곳이 어디인지를 잘 알아 강약을 조절하고 클라이맥스를 연출할 만큼 능숙했다. 모래사막과는 다른 바하리야 사막을 이미 다녀온 고추피클 커플은, 모래를 타고 떨어질 때마다 안 왔으면 큰일날 뻔 했다며, 소리를 질러댔다.

하지만 나는 솔직히 고백하건대, 스릴이 네 번, 다섯 번 반복되고 젊은 애들의 함성이 점점 높아질 무렵, 사막을 조용히 느끼게 해 주겠다던 알 파치노의 조언이 잠깐 떠오르기도 했다.

차에서 내린 우리들에게 두 발로, 두 손으로, 온 몸으로 사막을 체험할 기회가 왔다. 나는 신발을 벗고 양말까지 훌렁 벗었다. 신발 신은 채 사막을 밟는다는 건 사막의 모래에 대한 모독. 기분 좋을 만큼 까슬까슬한 고운 모래를 밟으며 우리는 사막을 달리고 가르며 소리를 질러댔다.

모래를 스프링 삼아 펄쩍 뛰어오르는 모습들을, 음영을 명확하게 가르는 칼날 같은 모래 능선을, 사진기에 담느라 다들 바빴다. 시리아는 사진도 별로 찍지 않고 사람들과 쉽게 말을 섞지도 않고 늘 거리를 두고 있었다. 이제 사진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내게 말했다. 옳거니. 사진 찍다 보면 정작 마음에 담는 일은 소홀해진다는 뜻이렷다. 전적으로 동감하면서도 나는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짐작컨대 시리아는 여행 고수다.

모두들 모래언덕을 빡빡 기어 올라가 능선에 걸터앉았는데 파리만 아래에서 부러운 듯 올려다보고 있다. 아니, 조금만 힘들이면 될 텐데 왜 저 아래에서 침 흘리고 있나 싶어, 올라오라고 경치가 죽인다고 손짓을 하니 그제야 올라왔다. '나홀로' 여행자길래 담대하고 발랄한 아가씨인줄 알았는데 의외로 소극적이다.

사막의 황혼

딸아, 세상에 공짜는 없는 거란다.
 딸아, 세상에 공짜는 없는 거란다.
ⓒ 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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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는, 사막에 숨어 있는 핫 스프링이나 콜드 스프링을 거쳐 샌드보드를 타기 딱 좋게 경사가 진 모래 언덕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간혹 입 속으로 모래알이 튀긴 했지만, 사르륵 모래를 타고 내려가는 기분은 제법 근사했다. 황금빛 모래가 산이 되고 계곡이 되어 유려한 선으로 흐르는 풍경 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 보드를 타고 내려갔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이 공짜는 없다. 신나게 내려갔지만 다시 기어 올라오는 일이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여긴 리프트가 있기는 커녕 발이 푹푹 꺼지는 모래밭 아닌가. 늪처럼 모래는 발목을 집어 삼키고 짊어진 보드는 또 얼마나 무거운지. 나름 생각해 낸 꾀가, 보드를 세워 발 앞의 모래에 푹푹 꽂으며 그걸 의지 삼아 한 발 한 발 오르는 것이다. 신나게 모래 미끄럼을 탔다가 끙끙거리며 다시 기어 올라오는 사이 어느덧 저 끝에서부터 황혼이 깃든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저절로 명상의 시간. 사위는 조용하고 사막의 하늘은, 우리가 까먹고 옆에 쌓아둔 오렌지 껍질처럼 예쁜 색깔로 물들었다. 나는 화살 곡선처럼 휘어 돌아간 능선으로 혼자 달려갔다.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모래밭에 발자국을 남긴 채 홀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수많은 모래알 하나하나가 지상의 모든 소리를 빨아들인 것처럼 조용해지는 순간. 내 어머니의 젖무덤처럼 포근한 사막의 능선에 앉은 순간. 사막의 모래알이어도 좋겠다. 사막에 살짝 그림자를 얹어 놓는 구름이어도 좋겠다. 사막을 통과하는 바람이어도 좋겠다. 사막에 버려진 과일 껍질이어도 좋았다. 샌드보드여도 좋았다. 아니, 잠시 잠깐 모래에 새겨졌다 사라져버리는 보드의 흔적이어도 좋았다. 그 순간만큼은 그 무엇이라도 좋았다. 무엇이 아니라도 좋았다….

해질 무렵이 되면, 사막의 빛과 그림자는 더욱 선명해진다.
▲ 사막의 황혼 해질 무렵이 되면, 사막의 빛과 그림자는 더욱 선명해진다.
ⓒ 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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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경

덧붙이는 글 | 2011년 1월 2주 동안 이집트를 여행했습니다.



태그:#리비아 사막, #사하라 사막, #샌드보드, #시와, #이집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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