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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살 더 먹다

설이 지나면 좋든 싫든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 나는 어렸을 때 빨리 나이가 많아지고 싶었는데, 언제부터인지 나이 먹는 게 싫어졌다. 아마도 중년을 넘긴 뒤부터가 아닌가 싶다.

옛 사람들은 동지 때 팥죽을 먹으면서 한 살 나이를 더 먹는다고 했다. 양력설을 권장할 때는 1월 1일이면 한 살 더 먹는다고 했다. 그래도 한 살 더 보태지 않다가 설날 떡국을 먹고 난 뒤에는 더 이상 미룰 언턱거리가 없기에 한 살을 먹지 않을 수 없다.

지난 날, 수업시간 학생들에게 70세의 별칭을 '고희(古稀)'로 그 유래는 두보의 시 <곡강(曲江)>의 결구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 곧 "사람은 예로부터 칠십을 살기가 드물다"에서 유래됐다고 무수히 가르치면서 나도 칠십까지 살 수 있을까 염려했는데 이제 곧 그 '고희(古稀)'가 얼마 남지 않았다.

요즘은 고령화 사회로 70세도 청년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 중심의 지나친 이기주의로 옛 말처럼 70을 전후로 세상을 뜨는 게 사람을 비롯한 다른 생명에게나 이 지구 환경을 위한 일일 것이다.

"청춘은 희망에 살고 백발을 추억에 산다"고 하더니, 나는 이즈음은 지난 세월에 대한 추억과 잘못한 일에 대한 참회로 보내는 시간이 많다. 지난 인생 역정이 도화지에 그린 그림이라면 성능 좋은 지우개로 지워버리고 싶다는 얘기를 다른 사람한테 여러 번 들었는데, 나 또한 마찬가지다. 하지만 한번 지나가면 되돌릴 수 없는 게 인생사가 아닌가.

동기동창 제자 집 거실에 놓여있는 남녀고교생 인형. 그들의 고교시절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동기동창 제자 집 거실에 놓여있는 남녀고교생 인형. 그들의 고교시절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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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생의 초대

이즈음 지난 인생을 뒤돌아보면 잘했다고 여겨지는 일보다 잘못했던 일이 더 많아 때로는 얼굴이 붉어지곤 한다. 그러다가도 평생을 대부분 학교 울타리 안에서 지낸 점만은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한때는 언저리 사람들이 평생을 평교사로 지냈느냐고 물을 때는 내 못남이 드러난 것 같았지만 이즈음에는 그것마저도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교육자의 참 모습은 초롱초롱한 학생들의 눈망울을 바라보면서 분필가루를 마시는 것이라고 내 못남을 변명해 본다.

애초에는 정년까지 교단에 머물려고 했지만, 아내가 젊은 후배의 일자리를 위해 용퇴하라는 간곡한 충고를 받아들여 5년을 남긴 채 명퇴했다. 그런 뒤 곧장 40여 년 간 삶의 근거지였던 서울을 떠나 강원 산골로 내려왔다. 이곳에 내려온 뒤 텃밭을 가꾸며, 가능한 서울나들이를 자제하면서 산골사람으로 살려고 애썼다.

그동안 인연을 맺어온 사람들이 이런저런 일로 초대했지만 묵살한 채 새로운 일에 골몰하며 살고 있었다. 이태 전 졸업생(이대부고 20기)들이 졸업 30주년 홈커밍데이 행사로 나를 불렀다. 그런데도 이런저런 핑계로 가지 않았다. 그날 참석한 한 졸업생이 유독 나를 찾았다는 얘기를 나중에 전해 듣고는 훈장으로 바른 처신이 아닌 것 같아 지난해 21기 행사 때는 흔쾌히 초대에 응했다.

30년 만에 그들을 만나자마자 나도 30년 전 그 시절로 돌아간 듯, 그렇게 반갑고 정다울 수가 없었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데 졸업생들이 차비까지 챙겨줘서 고마웠다. 미안한 마음과 그들도 내가 살고 있는 마을을 보고 싶다해 그 답례로 내 사는 고장으로 초대했다. 그랬더니 바쁜 주중인 데도 일부로 휴가를 내 지난해 초여름 여섯 명이 강원 산골로 찾아왔다.

지난 여름 내가 사는 마을 찾아준 제자들(왼쪽부터 강화선, 김은경, 박세진, 필자, 이종호, 김영미, 강승모).
 지난 여름 내가 사는 마을 찾아준 제자들(왼쪽부터 강화선, 김은경, 박세진, 필자, 이종호, 김영미, 강승모).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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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산골 메밀부침과 막국수를 함께 나누고는 자작나무숲 미술관에 가서 밀린 수다를 늘어놓는데 얘기가 너무 재미있고 무궁무진했다. 돌아가는 길에도 핸들을 잡은 제자가 이야기에 취해 그만 길을 잃어 산길을 헤매는 촌극도 빚었다. 그야말로 사람에 취한 하루였다.

한 졸업생 동창 부부

지난해 가을에는 그들이 답례로 서울로 초대했는데, 한 국수집에서 열 명의 졸업생이 환대해줬다. 그날도 끊임없는 얘기꽃으로 원주행 막차 출발 직전 아슬아슬하게 승차했다. 그날 온 열 명 중, 한 쌍의 부부가 참석했기에 그들 모습이 아름답다고 덕담을 했더니, 지난 세모 바쁜 시간임에도 초대해 줘서 세 사람이 서울의 한 밥집에서 만났다.

송영득(왼쪽), 오영경 동기동창 부부
 송영득(왼쪽), 오영경 동기동창 부부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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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희 언제부터 전류가 서로 통했니?
"고2 여름방학 때 생물 채집을 갔을 때였어요. 서로 눈빛이 마주 치는 순간 스파크가 일어난 셈이었지요."

- 공부에는 방해되지 않았니?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선생님들께서나 어른들은 공부에 방해된다고 말씀하시는데 저희 경우는 오히려 더 열심히 공부한 것 같아요. 청소년기 건전한 이성교제는 학습과는 별로 상관없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청소년기에 다른 일로 상처받아 시간을 더 빼앗기거나 엇길로 빠지는 친구들이 많다고 생각해요."

남편 송영득(국민건강보험공단 일산병원 내분비내과 과장)씨의 말이었다. 이들 부부의 손 전화번호를 전해 받았는데 가운데 한 숫자만 다를 뿐 나머지는 같았고, 아내 오영경의 손 전화 버튼을 누르자 SG워너비의 <라라라>가 흘러나왔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 내가 그대에게 부족한 걸 알지만 / 세월을 걷다보면 지칠 때도 있지만 / 그대의 쉴 곳이 되리라 / 사랑해요 고마운 내 사랑 / 평생 그대만을 위해 부를 이 노래래…."

그들 부부가 굳이 자기 살림집으로 늙은 훈장을 데려갔다. 차 한 잔을 대접받으면서 아내 오영경씨에게 물었다.

- 언제 행복을 느꼈나?
"남편이 아이(딸 둘)들과 손잡고 함께 걸어가는 뒷모습을 볼 때였어요."

잠시 그들 부부가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고 돌아오면서 나는 또 훈장 같은 말을 남겼다.

"얘, 내 눈에는 너희가 이상적인 부부상으로 매우 행복해 보인다. 원래 행복은 시샘이 많단다. 그 시샘에 빠지지 않으려면 다른 이를 위해 봉사하는 생활을 많이 해라."
"네, 선생님.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그들 부부와 헤어진 뒤 청량리역에서 원주행 마지막 열차를 타고 내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나까지도 마냥 행복했다.


태그:#동창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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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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