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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에 검고 동그랗게 보이는 섬이 덕적군도 중에서 소야도이고, 그 외의 나머지 풍경은 모두 군도의 중심섬인 덕적도의 것이다. 가운데에 쏙 들어가 보이는 부분이 소야도와 덕적도 사이의 도우선착장이다. 사진의 왼쪽 끝 소야도 뒤로 멀고 파랗게 보이는 산봉우리가 비조봉이다.
▲ 덕적도가 보이는 풍경 왼쪽에 검고 동그랗게 보이는 섬이 덕적군도 중에서 소야도이고, 그 외의 나머지 풍경은 모두 군도의 중심섬인 덕적도의 것이다. 가운데에 쏙 들어가 보이는 부분이 소야도와 덕적도 사이의 도우선착장이다. 사진의 왼쪽 끝 소야도 뒤로 멀고 파랗게 보이는 산봉우리가 비조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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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태종무열왕 7년 여름(660년 6월), 당나라 장수 소열(蘇烈)이 13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서해를 넘어온다. 백제를 공격하기 위해서였다. 소열은 백제 땅에 닿기 이전에 서해의 한복판인 덕물도에 잠시 머무른다. 큰(德) 물(勿)에 있는 섬(島)이라 해 옛 사람들이 '큰물섬'이라 불렀던 덕물도(德勿島), 지금의 덕적도이다.

무열왕은 태자 법민(훗날의 문무왕)과 김유신 등을 덕적도로 보낸다. <삼국사기> 중 김유신 열전은 이 장면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태자가 장군 소정방(蘇定方)을 만나자 정방이 태자에게 '나는 바닷길로 가고 태자는 뭍길로 가서 7월 10일에 백제의 왕도 사비성에서 만나자'고 했다." 

이 대목은, 소정방을 중심으로 한 당나라군의 수뇌부와 김법민, 김유신 등 신라군의 지휘부가 덕적도에서 만나 백제를 공략할 작전회의를 한 것을 말해준다.

김유신과 소열이 만나 백제 공략 작전을 짠 덕물도

서해에서는 으레 일몰만 보는 줄 알았는데 대부도 방아부리 선착장에서 보는 일출 광경은 특이하고도 아름답다. 시화호가 낳은 둑길이자 도로와, 인천공항이 바로 옆에 있는 탓에 보게 되는 비행기(가 낳아준) 구름 덕분에 다른 곳에서는 감상할 수 없는 일출 풍경을 만끽했다.
▲ 덕적도로 가는 대부도 방아부리 선착장의 새벽 서해에서는 으레 일몰만 보는 줄 알았는데 대부도 방아부리 선착장에서 보는 일출 광경은 특이하고도 아름답다. 시화호가 낳은 둑길이자 도로와, 인천공항이 바로 옆에 있는 탓에 보게 되는 비행기(가 낳아준) 구름 덕분에 다른 곳에서는 감상할 수 없는 일출 풍경을 만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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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앞 부분에 나오는 소열과, <삼국사기>의 기록에 나타나는 소정방은 같은 인물이다. 소정방은 김유신보다 3년 전인 592년에 태어나 662년에 죽었는데, 657년 서돌궐을 쳐서 당나라에 복속시키는 공을 세웠고, 660년 신라와 연합해 백제를 멸망시켰으며, 661년 고구려에 쳐들어가 평양성까지 진격했다가 철수했다.

중국에는 남자들이 성인이 된 이후 자신의 이름을 말할 때 상대가 윗사람이면 본래 이름을 말하지만 동년배나 아랫사람에게는 다른 이름을 쓰는 풍습이 있다. 그 다른 이름을 자(字)라 한다. 마찬가지 뜻에서, 다른 사람을 부를 때에도 그가 윗사람이면 자를 부르고, 아랫사람이면 본명을 부른다. 백제에 쳐들어온 당나라 장수는 본명이 소열이고 정방은 그의 자이다. 따라서 우리가 당나라 장수 '소열'을 <삼국사기>식으로 '소정방'이라 하는 것은 그를 높여 부르는 꼴이 되기에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국사에 관심이 있다면 덕적도 방문은 당연

인천이나 대부도를 떠난 여객선은 소야도와 덕적도 사이로 들어가 승객들을 이 도우 선착장에 내려준다. 하지만 소야도와 덕적도의 사이는 (물이 빠졌을 때, 가장 가까운 곳) 50m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 도우 선착장 인천이나 대부도를 떠난 여객선은 소야도와 덕적도 사이로 들어가 승객들을 이 도우 선착장에 내려준다. 하지만 소야도와 덕적도의 사이는 (물이 빠졌을 때, 가장 가까운 곳) 50m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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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과 소열이 만났던 덕적도를 한 번도 가보지 않고서 스스로를 나라의 역사에 관심이 많다고 자부할 수는 없을 듯하다. 물론 단재 신채호 선생처럼 '외세를 불러들여 동포를 죽인 것은 적을 끌어들여 형제를 죽인 것과 같다'며 김유신을 비난하는 이도 없지 않지만, 당시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서로 동일 민족이라는 의식을 가지지 못했다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공통된 인식이므로, 그렇게까지 김유신을 힐난할 이유는 없겠다.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김유신과 소열이 회동을 한 장소는 국수봉이다. 물론 높이 314m의 국수봉은 덕적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그러나 북리에서 대략 1km만 오르면 닿을 수 있는 국수봉 정상은 일반 답사자에게 밟아볼 틈을 주지 않는다. 지금도 군사통제구역이기 때문이다. 아득한 옛날, 삼국시대 때부터 지금까지 국수봉은 변함없이 군사요충지였던 것이다. 하지만 국수봉 끝자락 서해 바닷가는 덕적도 최고의 절경을 답사자에게 선사한다. 흔히 '능동 자갈마당'이라 부르는 해변 풍경이 바로 그것이다.

국수봉 정상 314m, 덕적도에서 가장 높은 곳

선미도를 등진 채 능동자갈마당에 서서 돌아본 국수봉 방면의 풍경
▲ 국수봉과 능동자갈마당 선미도를 등진 채 능동자갈마당에 서서 돌아본 국수봉 방면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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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적도 가는 배는 인천 부두나 대부도 방아부리 선착장에서 출발한다. 배가 출발점과 종착점 사이에 있는 자월도, 이작도 등을 거쳐서 가는지, 아니면 덕적도로 곧장 내달리는 지에 따라 차이는 나지만 대략 1시간 30분 안팎이면 덕적도 '도우 선착장'에 하선하게 된다. 단, 대부도 방아부리에서 처음 배가 물에 뜨는 시각은 아침 9시 30분쯤이지만, 선착장 일대가 군사지역이기 때문에 일출 이전에는 대합실에 접근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해야 한다.

덕적도의 동쪽 끝인 도우선착장에서 서쪽 끝인 능동 자갈마당까지 걸으면 섬의 한가운데를 동서로 꿰뚫어 관통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개인택시를 찾으면 1만 원에 능동 자갈마당까지 데려다 주고, 다시 1만5천 원의 차비로 도우까지 되돌아올 수 있지만, 능동 자갈마당까지 8km. 2시간 남짓한 이 길을 오늘 걸어보지 않으면 언제 또 다시 두 발로 직접 답사해볼 것인가 싶어, 신발끈을 조여매고 첫 걸음을 힘차게 내딛는다.

도우의 자그마한 커피 전문점, 횟집, 슈퍼마켓을 지나 왼쪽으로 작은 고개를 넘으면 면소재지가 있는 진리가 나타난다. 마을 이름에 '진(鎭)'이 붙은 것은 이곳이 과거에 군대나 관청이 자리잡고 있던 중심지였다는 뜻이니, 울창한 솔숲이 눈길을 끄는 진리에 면사무소, 파출소, 우체국, 보건지소 같은 관공서들이 모두 모여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특히, 솔숲과 고운 모래밭 해변을 등지고 아담하게 서 있는 학교를 보면 이곳에서 학창 시절을 보낼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은 마음이 저절로 샘솟는다. 초·중·고등학교가 한 울타리 안에 있을 뿐만 아니라, 학교 이름도 '덕적 초중고등학교'이다.

'덕적 초중고등학교'라는 재미있는 이름의 해변 학교

맑고 고운 모래밭, 물이 빠져나가면서 만든 갯벌, 수정 같은 바닷물, 그리고 그 너머로 보이는 소야도의 풍경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진리 해변이다. 게다가 진리 해변에는 600여 그루의 울창한 해송 숲이 있고, '덕적초중고등학교'라는 특이한 이름을 가진 공립학교도 있다.
▲ 밧지름해변에서 보는 소야도 맑고 고운 모래밭, 물이 빠져나가면서 만든 갯벌, 수정 같은 바닷물, 그리고 그 너머로 보이는 소야도의 풍경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진리 해변이다. 게다가 진리 해변에는 600여 그루의 울창한 해송 숲이 있고, '덕적초중고등학교'라는 특이한 이름을 가진 공립학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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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한 고목들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 솔숲 속으로 들어간다. 초중고등학교 건물 뒤에서부터 진리 끝까지 바닷가 모래밭을 따라 600여 그루의 해송(海松)이 붉은 둥치를 자랑하며 울창하게 모여 있다. 나무 사이로 '진리 해변'이 나타난다. 곱고 깨끗한 모래밭의 왼쪽 끝 '도끝뿌리'와 오른쪽 끝 '밧지름' 사이로 숨은 듯 둥글게 앉아 있는 청록빛 바다를 향해 길게 눕듯이 천천히 내려앉은 섬자락이 수평선에 평화롭게 걸려 있다. 가장 멀리 보이는 섬이 소야도이다.

소야도라는 이름도 소열에서 왔다고 한다. 소열이 백제땅으로 쳐들어가기 위해 덕적도에 있는 동안 이곳 소야도에 40일 동안 머물렀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고, 소야도 앞에 외따로 떨어져 있는 작은 바위섬도 '장군섬'이 됐다. 기골이 장대한 사내가 우뚝 혼자 서 있는 듯한 바위(장군바위)를 물가에 거느렸다고 해서 그런 이름을 얻은 이 돌섬은 도우선착장으로 들어가는 뱃길의 왼쪽, 소야도의 맨 앞 머리에 있다.

덕적도로 가는 배에서 (덕적군도의 많은 섬 중에서)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섬이 소야도이다. 이 사진에 표시해둔 것처럼 소야도, 장군섬, 장군바위의 위치를 미리 알고 구경을 하면 관광의 의의가 좀 더 제고될 법하다.
▲ 소야도 전경 덕적도로 가는 배에서 (덕적군도의 많은 섬 중에서)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섬이 소야도이다. 이 사진에 표시해둔 것처럼 소야도, 장군섬, 장군바위의 위치를 미리 알고 구경을 하면 관광의 의의가 좀 더 제고될 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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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소야도의 '야(爺)'는 나이 든 사람의 뒤에 붙이는 중국식 호칭이다. 소열을 가리키는 '소야' 역시 '소정방'과 마찬가지로 높임말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소야도도 소정방도 우리의 정서에는 그리 반갑게 느껴지지 않는 호칭이다. 나라 안에서 가장 장쾌한 강에 '중국 강'을 뜻하는 '漢江(한강)'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우리네 사대주의가 이 말들에도 어김없이 깃들어 있기 때문.

덕적도와 소야도는 50m 남짓 떨어진 채 서로 마주보고 있다. 둘의 사이가 배들이 닿고 떠나는 도우선착장이다. 뭍에서 온 배는 먼저 소야도에 사람을 내려준 다음 그대로 몸을 뒤척여 덕적도에 하선을 한다. 덕적도 도우선착장에서 목청을 높여 이야기하면 소야도 사람과 육성으로도 대화를 나눌 수 있다. 그렇게 보면, 당나라 군대는 배를 두 섬 사이에 대놓고, 병사들은 덕적도에서, 소열은 소야도에서 생활했을 법하다. 그들은 배의 갑판 위를 걸어서 두 섬 사이를 왕래했을 것이다. 

존칭의 뜻을 내포한 '소정방'과 '소야도' 

능동자갈마당 입구의 갈대밭 위로 국수봉이 보이는 풍경. 정상 지점의 철탑이 희미하다.
▲ 국수봉 능동자갈마당 입구의 갈대밭 위로 국수봉이 보이는 풍경. 정상 지점의 철탑이 희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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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 솔밭을 나와 도로에서 서쪽을 쳐다보면 양옆으로 숲을 거느린 성황당 고개가 갓 이발을 한 사람의 가르마 같은 빛깔로 말끔한 선을 드러내고 있다. 고개 왼쪽 능선이 바로 292m 비조봉과 국수봉을 이어주는 덕적도의 대간(大幹)이다. 앞에서 이미 도우선착장에서 능동자갈마당까지 걸으면 덕적도의 중심을 동서로 관통하는 발걸음이 된다고 했지만, 덕적도는 얼추 국수봉과 비조봉을 잇는 산줄기와 그 양옆의 해변으로 이뤄져 있는 섬으로 보면 된다. 산줄기 남쪽에서 가장 이름난 곳이 서포리 해변이고, 북쪽은 소재 해변이다.

성황당 고개는 덕적도의 중심인 진리 사람들과, 지금은 북리라 부르는 '쑥개' 주민들이 서로 오가는 길이었다. 자연스레 이 고개는 양쪽을 구분 짓는 경계선이 됐고, 외적이 쳐들어왔을 때에는 도망가는 샛길이 되기도 했다. 당연히 아득한 옛날부터 사람들은 이 고갯마루에서 제사를 올렸을 터, 지금까지 성황당 고개라는 이름을 남기고 있다.

성황당 고개를 넘으면 움푹 파인 항아리처럼 생긴 갯벌을 자랑하는 쑥개가 나온다. '큰쑥개'는 북 1리, '작은쑥개'는 북 2리가 됐고, 항만 들머리의 양옆에는 '큰쑥개 선착장'과 '작은쑥개 선착장'이 있다. 그 가운데인 방파제 끝에 '덕적도 등대'가 서 있다.

지형을 보니, 아마도 소정방의 당나라 군대가 처음에는 이곳으로 들어왔을 법하다는 생각이 든다. 중국에서 배를 띄웠으니 물길도 이리로 닿았을 것이고, 좌우로 산세가 바람을 막아주는 아늑한 만(灣)이 있으니 그들로서는 크게 흡족했을 것이다. 물이 찼을 때 배를 집어넣고, 물이 빠졌을 때 출항을 하면 되니 기가 막힌 입지조건이다. 게다가 작은쑥개에서 30분만 오르면 서해 바다 사방 천리를 한눈에 관찰할 수 있는 국수봉 정상에 도달한다. 이보다 더 군사적으로 기가 막힌 곳이 또 어디 있을까.  

성황당 고개를 넘어 능동 자갈마당으로

오른쪽의 동그란 사진은 경주 남산 통일전에 게시되어 있는 김유신 초상이다. 초상 뒤로 소야도가 보이고, 그 왼쪽으로 사진 중앙 지점에 아이스크림처럼 볼록 서 있는 작은 돌섬이 장군섬이다. 장군섬 맨 왼쪽에 사람처럼 보이는 바위가 서 있다. 그것이 장군바위이다. (하지만 장군섬, 장군바위의 '장군'은 김유신도 아니고 당나라의 소열이다.)
▲ 장군섬 오른쪽의 동그란 사진은 경주 남산 통일전에 게시되어 있는 김유신 초상이다. 초상 뒤로 소야도가 보이고, 그 왼쪽으로 사진 중앙 지점에 아이스크림처럼 볼록 서 있는 작은 돌섬이 장군섬이다. 장군섬 맨 왼쪽에 사람처럼 보이는 바위가 서 있다. 그것이 장군바위이다. (하지만 장군섬, 장군바위의 '장군'은 김유신도 아니고 당나라의 소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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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개항 갯벌 한가운데에 사람이 보인다. 무엇인가를 채취하고 있다. "가 보자!" 일행이 있다면, 응당 누군가는 그렇게 외쳤을 곳이다. 하지만 그렇게 성급할 것은 없다. 항만과 갯벌을 둥글게 도는 길을 따라 북리 마을회관까지 간 다음, 적갈색으로 포장이 된 오른쪽 도로를 따라 고개를 다시 넘으라. 고개를 넘으면, 신선한 바닷물 내음을 사람의 뱃속까지 상큼하게 퍼뜨려주는 싱싱한 석굴로 가득 찬 능동 자갈마당이 기다리고 있다.

능동 자갈마당, 옹진군 발행 관광안내책자 <옹진여행>은 이곳을 '갈대와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낭만적인 해안 절경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소개하고 있다. 덕적도 안 도로변의 <등산로 안내> 입간판은 '크고 작은 고운 자갈로 이루어진 해변으로, 서해안의 해금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며 자화자찬하고 있다. 능동 자갈마당! 과연 그렇게 볼 만한 곳인가. 고개를 넘어 갈대밭을 바라보며 능동 자갈마당으로 가는 길 4km를 줄곧 걷는다.

맨 왼쪽에 '덕적초중고등학교', 그리고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600여 그루나 되는 소나무 고송들의 숲, 해송 사이로 보이는 진리 해변, 깨끗한 바닷물 위로 길게 누운 듯 평화로운 소야도의 풍경
▲ 풍경 맨 왼쪽에 '덕적초중고등학교', 그리고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600여 그루나 되는 소나무 고송들의 숲, 해송 사이로 보이는 진리 해변, 깨끗한 바닷물 위로 길게 누운 듯 평화로운 소야도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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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밭 왼쪽으로 국수봉이 시퍼런 위용을 자랑하며 솟아 있다. 정상에는 철탑이 서 있어서, 멀리서 바라보기만 해도 산꼭대기가 자연 그대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저절로 짐작된다. 진리에서 바라본 비조봉 정상에는 정자가 조그맣게 눈에 들어왔는데, 국수봉 꼭대기에는 웅대한 철탑이 위용을 뽐내고 있는 것을 보면, 두 산은 그렇게 서로 다르다.

<옹진기행>도 다시 살펴보니 비조봉은 능동 자갈마당, 서포리 해변, 소재 해변, 밧지름 해변, 도우선착장 등과 함께 붉은 글자로 인쇄돼 있는데 반해 국수봉은 검게 쓰여 눈에 잘 띄지도 않는다. 도우선착장에서 길을 묻는 나그네에게 이곳 섬사람이 해준 말 중에서 "국수봉은 군사시설이기 때문에 올라가면 꼭대기 옆으로 등산로가 나 있습니다"라는 대목이 언뜻 떠오른다.

덕적도 최고의 절경, 능동 자갈마당

덕적도 최고의 절경이자 석화캐기 체험장도 되는 능동자갈마당의 풍경. 왼쪽에 선미도의 일부가 보인다. 능동자갈마당의 면적은 사진 가운데 바닷가에 점처럼 보이는 답사자들을 가늠해보면 짐작할 수 있다.
▲ 능동자갈마당 덕적도 최고의 절경이자 석화캐기 체험장도 되는 능동자갈마당의 풍경. 왼쪽에 선미도의 일부가 보인다. 능동자갈마당의 면적은 사진 가운데 바닷가에 점처럼 보이는 답사자들을 가늠해보면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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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및 해변에서 자연석을 무단으로 채취하면 1천만 원 이하의 벌금 또는 1년 이하의 징역에 처합니다."

능동 자갈마당에 닿으니 입구의 '경고판'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기기묘묘한 돌들이 지천으로 깔려 있는 것이 그런 경고판을 세워둘 만도 하다 싶다. 방위병이 지키고 있던 백령도의 콩돌해변 광경이 기억에 새롭다.

자갈마당은 덕적도의 서쪽 끝 해변에서부터 시작해 국수봉 산줄기가 바다 속으로 툭 떨어지는 절벽 아래까지 이어진다. 주로 검은빛 돌들인데, 더러는 몸통에 첫눈처럼 하얀 띠가 둘러져 있어 마치 흰목물떼새나 검은등할미새가 조용히 쉬는 중인 듯 여겨지는 예쁜 돌들도 섞여 있다. 흡사 건열(Mud crack)인 양 표면 전체에 하얀 줄무늬를 가로세로로 새긴 돌들도 드물지 않게 눈에 띈다. 하지만 그런 것들보다도 압도적으로 많은 것이 바로 조개껍질들이 마른 채 붙어 있는 돌들이다.

그렇지 않아도 벌써 누군가는 바닷물 가까이까지 다가가 돌에 붙은 석화(석화)를 밝아먹고 있다. 껍질은 단단하지만 완전한 무공해 청정바다에서 갓 건져낸 석화이므로 그 상큼한 향내는 어떤 것과도 견줄 수 없다. 몸을 웅크리고 앉아 석화 캐기에 몰두한 사람들은 이미 말을 잃었고, 입만 챙기고 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한 속담의 가르침을 실천하겠다는 심산인지, 좌우로 펼쳐지는 절경으로 눈을 즐겁게 해야 마땅한 덕목조차 잊었다.

덕적도가 끝나니 금세 선미도가 이어지네

소야도(왼쪽)와 등대 사이로 도우 선착장이 보이고, 관광객을 실어나르는 배도 보이고, 그 위로 펼쳐진 산능선 중 가장 높은 지점의 비조봉이 보이는 풍경. 이 능선은 서쪽으로 (사진에서는 오른쪽으로) 계속 이어져 덕적도 최고봉인 국수봉까지 갔다가 갑자기 뚝 떨어지면서 능동자갈마당의 바다와 만나게 된다.
▲ 비조봉이 보이는 풍경 소야도(왼쪽)와 등대 사이로 도우 선착장이 보이고, 관광객을 실어나르는 배도 보이고, 그 위로 펼쳐진 산능선 중 가장 높은 지점의 비조봉이 보이는 풍경. 이 능선은 서쪽으로 (사진에서는 오른쪽으로) 계속 이어져 덕적도 최고봉인 국수봉까지 갔다가 갑자기 뚝 떨어지면서 능동자갈마당의 바다와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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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이 이어지는 돌들의 축제는 섬 끝까지 이어지더니 물과 만나면서 아스라이 사라진다. 그러나 절경은 거기서 끝이 나지 않는다. 절경의 한자 '絶'이 '끊어질 절'인데 어찌 이곳의 대단한 경치는 끝이 없는지, 가을 들녘의 벼이삭처럼 쌓인 돌들이 끝나면 바다가 이어지고, 푸른 물길과 그 너머의 푸르른 하늘이 잠깐 눈을 황홀하게 만든다. 그러더니 이내 섬이 다시 이어진다. 그 섬이 바로 덕적도의 서북쪽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무인도인 선미도이다. 이 선미도와 덕적도 사이의 가느다란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서해와 창공은 이곳 경치를 더욱 빛나게 만든다.

가까이 보나 멀리 보나, 아래를 보나 위를 쳐다보니 정말 끝이 없는 경치다. 크고 작은 돌들이 아득한 섬끝까지 깔려 발 아래의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가 하면 하늘을 찌를 듯 솟구쳐 오른 거대한 기암괴석들이 환성을 자아낸다. 바다를 향해 짙푸른 산자락을 휘영청 늘어뜨려 주는 국수봉 줄기가 머리 위의 서늘한 풍경을 선사해주는 것으로도 모자라, 바다와 하늘이 섬 사이로 들어와 수려한 몸매를 푸르게 드러내면서 덕적도 구경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고 부르짖는다.

게다가 말끔하게 다듬은 듯 고우면서도 깔끔하게 이어지는 능선을 뽐내는 선미도가 맑은 물 위에 떠서 평평한 수평선과 자매처럼 어깨를 감싸안고 있다. 크고 작고, 높고 낮으며, 곧고 굽은 온갖 선과 면들이 총출연한 눈부신 절경을 창조해낸 곳, 바로 덕적도 능동의 자갈마당이다.

여기에 금상첨화, 지금은 노을이 바다를 물들이기를 기다려야 할 때다. 돌들이 바다와 만나고 있는 자갈마당 끝을 바라보니, 하얀 물보라가 백합처럼 피어오르는 사이로 손을 마주잡고 거니는 젊은 연인들이 곱게 눈에 들어온다. 저들도 지금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리라. 그렇다. 기다림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바닷물이 빠져나간 도우 선착장 앞 갯벌에서 '채집'을 하고 있는 사람들. 물 건너 보이는 섬이 당나라 장수 소열이 40일 동안 머물렀다는 소야도.
▲ 갯벌의 사람들 바닷물이 빠져나간 도우 선착장 앞 갯벌에서 '채집'을 하고 있는 사람들. 물 건너 보이는 섬이 당나라 장수 소열이 40일 동안 머물렀다는 소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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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덕적도, #김유신, #소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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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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