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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요약본] "내가 '왕차관'? 감옥 안 가려 엄청 노력... 이상득 진작 떠나왔다"

<오마이뉴스>는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을 지난 10일과 11일 각각 대구와 서울에서 두 차례 만나 인터뷰했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 첫 번째 부분이다.

"친박의원 중에 날 공격한 사람은 없어"

대구 중-남구 총선 출마를 준비하고 있는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이 지난 10일 오후 대구시 남구에 위치한 자신의 선거운동 사무실에서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를 갖고 "한나라당 공천 못받는 것을 상상하지 않고 있다"며 "대구 남구에 33평 아파트를 아예 샀다"고 자신감을 보였다.
 대구 중-남구 총선 출마를 준비하고 있는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이 지난 10일 오후 대구시 남구에 위치한 자신의 선거운동 사무실에서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를 갖고 "한나라당 공천 못받는 것을 상상하지 않고 있다"며 "대구 남구에 33평 아파트를 아예 샀다"고 자신감을 보였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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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 남구로 언제 내려왔나?

"지난해 10월 중순 국회 증인출석이 끝난 이후에 내려왔다."

- 고향(경북 칠곡)이 아닌 대구를 출마지로 택한 이유는?
"한 번도 경북 칠곡 출마를 생각해본 적 없다. 내가 초중고를 여기서 나왔고, 대학을 졸업한 후 들어간 첫 직장인 한국델파이(옛 대우기전)도 대구에 있었다. 대구에서 가장 큰 제조업체인 한국델파이의 옛날 이름이 대우기전인데, 대우그룹이 해체되면서 이름이 바뀌었다. 내가 창설멤버였는데 탱크박사로 불렸던 배순훈 박사가 사장으로 있었다. 나는 법학을 전공했는데 MIT에서 기계공학를 전공한 그 분에게서 공학적 마인드를 배웠다."

- 현재 한나라당은 MB색깔을 지우려는 분위기가 강한데 MB 최측근인 박 차관이 공천을 받을 수 있겠나?
"보수진영이나 한나라당의 지상과제는 정권 재창출이다. 현재 야권이 크게 통합하고 있기 때문에 여권도 작은 차이를 극복하고 통합해 나가야 총선을 잘 치를 수 있다. 그래야 대선에서도 정권 재창출의 여지가 생긴다. 그런 측면에서 친이-친박은 작은 차이다. 친이-친박이 단합해야 한다. 한쪽 세력이 다른 한쪽 세력을 배제해서는 정권 재창출이 어렵다. 그런 큰 차원에서 (친이-친박) 양대세력이 통합하고 협력하는 차원에서 공천과정이 진행될 것으로 생각한다."

- 특히 대구는 박근혜 전 대표의 파워가 센 곳인데.
"내가 4년 내내 (공직에) 있으면서 외부 공격를 많이 받았다. 조사해 보니 민주당이 저를 공격한 것이 95번이다. 제가 친이계 일부에서 공격받았지만 친박 의원이 나를 공격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해외자원개발과 관련해 국회 정무위에 증인으로 나갔을 때도 친박 의원들이 많이 도와줘서 있었던 일들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었다."

- 한나라당에서 공천을 안 줄 경우 무소속으로 출마할 생각인가?
"공천 못받는 것을 상상하지 않고 있다. 대구 남구에 33평짜리 아파트를 아예 샀다."

- 2008년에도 총선에 출마하려고 했던 것으로 안다, 왜 청와대에 남았나?
"공천 신청까지 했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 시절에 제가 당선인 비서실 총괄팀장을 맡았다. 저는 국회에 진출하기를 희망했다. 제가 입법기관에 11년 있었는데 대통령이 일하는 데 국회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느꼈다. MB정부가 많은 일을 하려면 국회에서 뒷받침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렵게 공천 신청 허가까지 받았다. 당시 류우익 현 통일부장관과 임태희 대통령실장이 '박영준은 국회로 보내야 한다'고 6~7차례 건의했다. 그래서 공천을 신청하라고 허락이 떨어진 것이다.

내일이 공천 심사일인데 오늘 당선자가 나를 불렀다. 2시간 정도 얘기했다. 당선자가 '꼭 청와대에 들어가자, 정부 일도 배우고 같이 일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국회에 진출하는 것이 제 입신양명을 위한 게 아니라 MB정부에 도움이 되고하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대통령의 뜻을 거스릴 수 없어서 공천을 포기했다."

- 대통령이 어떻게 설득했나?
"당선자하고 나눈 구체적인 대화 내용을 여기서 언급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내가 민간기업에서 9년, 입법부에서 11년, 서울시에서 1년 반 정도 경험했기 때문에 그런 경력을 평가한 것 같다."

"청와대에 6개월밖에 못 있을 운명이라 생각했다"

- 당시 대통령의 요청을 물리치고 총선에 출마했더라면 각종 비리 의혹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았겠나?
"훨씬 덜 했겠지. 그런데 운명인데 어떡하나? 최고통치자의 뜻을 거슬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나도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 청와대에서 100일 정도 일했다. 그러다가 조금 야인 생활을 했고, 국무차장으로 복귀해 지식경제부 차관까지 지냈다. 그러면서 다양한 행정경험을 쌓았다. 그것이 앞으로 살아가는 데 큰 자산이 될 거라 생각한다."

- 청와대 근무 100일이라면 경험으로는 짧은 편인데 아쉽지 않나?
"인수위 시절까지 합치면 6개월 정도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정권 기반을 만드는 시기에 있었다. 10년 만에 정권을 되찾아왔고, 새로운 권력기반을 만드는 과정에서 다양한 역할을 했다. 개인적으로는 엄청난 경험을 했다고 생각한다. 100일 만에 청와대를 나와 조금 아쉽긴 하지만. 처음 대통령의 권유로 국회의원 출마를 포기했을 때 '아, 내가 아마도 6개월 이상 못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역대 모든 정부에서 처음 정권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역할을 했던 사람들은 수많은 공격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오래 못 있는 것을 수없이 많이 봐왔다. 그래서 내 운명이 6개월을 넘지 못하겠구나 생각했다."

- 당시에 그런 운명을 직감했나?
"역대 정부에서 대통령 가까이서 일하던 사람들에게서 그런 모습을 봐왔으니까. 6개월은 4월 총선이 끝나면 국회가 새롭게 구성되고 여당도 권력기반이 생기는 걸 염두에 둔 것이다. 그러면 정권 초기에 빠져 주는 게 당연할 수도 있다."

- 당시 친이계 일부로부터 공격을 안 받았더라면 청와대에 더 있었을 것 아닌가?
"공격을 안 받았더라면 더 있었을 수는 있었다. 그런데 짧은 기간이지만 하고 싶었던 일을 80% 이상 했다."

- 100일 만에 청와대에서 물러나 2009년 초 국무총리실 차장으로 발탁되기 전까지는 무엇하며 지냈나? 
"두 가지를 했다. 내가 대선 과정에서 전국적인 조직을 만드는 역할을 했다. 그 분들이 대선에서 엄청 기여했는데 총선 과정에서 소외된 분들이 많았다. 막상 공천이 시작되니까 대선에서 엄청 기여하고도 공천도 못 받고 역할도 안 주어져 서운해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전국을 다니면서 그 분들에게 현 정부의 역할이 무엇이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등을 얘기하며 그 분들 마음을 달랬다. 이런 것을 하면서 전국을 2달 정도 다녔다. 또 하나는 식견을 넓히기 위해 중동, 베트남, 중국, 중앙아시아, 동유럽 등 해외를 다녔다."

- 외유는 식견을 넓히기 위한 것 말고 다른 이유가 있지 않았나? 
"내가 대우에 9년 있었다. 처음 6년간 배순훈 사장을 모셨고, 마지막 3년은 김우중 회장을 모셨다. 기조실 전략팀장 역할을 했는데 전략팀장의 역할이 뭐냐? 당시 김 회장이 세계경영한다며 전 세계를 다녔다. 그동안 세계경영은 상품수출이었지만, 김 회장의 세계경영은 현지에 회사를 세우거나 현지 회사를 확보하거나 현지 자원을 확보하는 일이었다. 당시 외환이 부족한 국가여서 해외투자를 하려고 1만 달러를 가지고 나가려고 해도 엄청나게 엄격했다. 기업투자라고 해도 거의 외환도피범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있었다.

나는 그런 세계경영과 관련된 승인업무, 인허가업무를 맡았다. 대우그룹 전체가 하는 모든 해외프로젝트의 국내 승인업무를 한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김 회장의 글로벌 마인드를 배웠다. 우리나라는 해외로 더 뻗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앞으로 뻗어나갈 지역을 다녀본 것이다."

- 그때는 왜 아프리카에는 안 갔나? 
"아프리카에는 갈 엄두를 못냈다. 아프리카는 시스템이 열악하고 연결고리도 없었다. 아는 분들이 있는 지역을 중심으로 다녔다."

"권력실세? 내가 무엇을 누렸다고 권력실세인가?"

- 지식경제부 차관을 마지막으로 공직에서 물러났는데, 소회가 어땠나?
"원래 정치인이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서 특별히 아쉬울 것은 없었다. 내 스케줄대로 갔던 것 같다. 보람이 굉장히 있었다. 지식경제부가 대한민국 실물경제 70~80%를 책임지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생존에 필요한 에너지 자원의 97%를 수입해서 쓰고 있다. 작년엔 1600억 달러인가 1700억 달러인가를 수입했을 것이다. 그렇게 국가생존을 위해 필요하고 지속가능한 발전에서 핵심적인 분야인 에너지 자원분야를 열심히 개척한 것이 보람 있었다.

지난해에 우리가 무역 1조 달러를 달성했다. 에너지 자원은 물론이고 무역도 2차관 소관이다. 제가 지식경제부에 가서 신년계획으로 무역 1조 달러 달성을 잡았다. 그런데 전 간부가 반대했다.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이건 위험하다고 반대했다. 하지만 내가 강력하게 주장하고 최경환 장관이 수용해서 무역 1조 달러 달성을 국가 어젠다로 채택했다. 1조 달러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선진국에 도약하려면 2조 달러로 가야 한다. 무역 2조 달러를 달성하면 1인당 국민소득이 4만 달러가 된다.

그런데 1조 달러를 달성하는 방법으로는 안 된다. 2조 달러를 달성하기 위한 새로운 전략을 세워야 한다. 2020년, 2025년까지 2조 달러를 달성하려면 대기업 중심, 미중일 중심 수출전략으로 가서는 안 된다. 2008년 세계적 금융위기가 분기점이다. 그동안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의 주요 기반이었던 미국, 서유럽, 일본을 포함한 아시아 일부 국가 등의 구매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대외지향적인 수출전략을 쓸 수밖에 없기 대문에 새로운 대안을 찾아야 했다. 그게 아프리카, 중남미, 베트남, 동유럽이라고 생각했다."

- 국무차장으로 복귀하기 전까지 다녔던 해외국가와 겹치는데. 
"일부 겹친다. 그때는 개인으로 다녀서 정부 관계자들을 못 만났다. 그런데 지식경제부 차관이 되어 가니까 훨씬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

- '권력실세'라는 세간의 평가를 어떻게 생각하나?
"나는 권력이 뭔지 모르겠다. 무엇을 권력이라고 하나? 권력이라면 뭔가 누려야 할 것 아닌가? 내가 개인적으로 무엇 누렸나? 남들이 가지 않는 아프리카, 중남미, 중앙아시아 등 오지만 다녔다. 그런 지역을 다니는 게 권력이라면 권력인가? 그 다음에 총리실에 있을 때 금융위기가 와서 일자리 창출과 사회안전망 보강을 위한 일들을 많이 했다. 고용 및 사회안전망T/F를 만들어 거의 매주 회의를 열었다. 그렇게 해서 25만개 일자리를 만들었다. 특히 사회복지통합전산망은 내 역작이다."

- 그런 업적들도 왕차관, 실세차관이어서 가능했던 것 아닌가? 
"글쎄… 나는 힘보다는 설득을 통해서 일을 많이 했다. 내가 공무원을 잘 안다. 대우그룹에서 정부를 상대로 인허가 업무를 맡았다. 국회에 가서는 갑을이 바뀐 공무원들을 접해봤다. 서울시에서는 지방공무원들을 접해봤다. 그래서 공무원들의 생리를 잘 안다. 그런데 힘으로 하면 한계가 있다. 그 순간밖에 안 된다. 내가 그 직을 떠나면 다 원위치된다. 그래서 시스템을 만들어야 하고, 하부단위부터 협력체제를 만들어야 한다. 나는 실무자에게 먼저 취지를 설명하고 설득하는 코디네이터로서 일을 했다. 코디네이션이 중심이라고 생각했다.

국무차장은 국정을 조율하고 조정하는 자리다. 지금은 피라미드 사회가 아니다. 지금은 수평적 코디네이션이 중요한 시대다. (내가 코디네이션을 중심으로 일을 했기 때문에) 그런 성과들이 가능했다. 법무부가 얼마나 세나? 그런데 (사회복지통합전산망 구축하는 과정에서) 출입국 자료 등 다 협조해줬다. 국세청도 협조해주었다. (협조해준) 대법원하고 실세하고 무슨 관계가 있나?"

"이상득 의원은 진작 떠나왔고 내 정치를 시작한다"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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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두언 의원은 박 전 차관을 두고 "노태우 정권의 박철언, 김영삼 정부의 김현철, 김대중 정부의 박지원, 노무현 정부의 안희정 이광재를 다 합쳐 놓은 것 같은 힘을 가졌다"고 평가했는데.
"하하하. 정 의원이 예능적 소질이 많아서 좀 재밌게 표현한 것이다. 대통령은 직원이 30명인 회사를 10만 명의 회사로 키우면서 사람을 부려봤다. 그런 분이 특정 개인에게 그런 힘을 준다는 것은 난센스다. 내가 대학을 졸업한 뒤 기업에서, 조직 속에서 훈련받았다.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조직인으로서 지켜야 할 선과 한게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 부분은 정 의원이 오버해서 말한 것이다."

- 박 전 차관에게 있다는 '권력'은 이상득 의원으로부터 나오는 것 아닌가?
"글쎄… 제가 기업에서 9년간 있다가 이 의원을 11년 모셨다. 이 의원을 떠나온 지 7년이 넘었다. 7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이상득 의원 보좌관 얘기를 하나? 나는 (이미) 대통령 사람이다. 이상득 의원도 대기업에서 평생을 살았다. 항상 겸손하고 절제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몸소 실천했는데 그런 분 밑에서 훈련을 받았다. 조직인은 자기가 모시는 사람이 바뀌면 그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지 기존에 모시던 사람을 되돌아보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제가 2004년엔가 2005년엔가 서울시로 가면서 이 의원을 떠나왔다. 그 이후에 한달에 전화 한 통 하기 힘들다. 그 분이 해외에 나갈 때나 생신 때 안부전화 드리는 정도다. 이 의원도 나에게 전화 거의 안한다."

- 그래도 여전히 '이상득 의원의 양아들'로도 불리던데.
"하하하. 그런 표현은 안 썼으면 한다. 그럼 노무현 대통령의 데릴사위는 누군가? 이제 시대가 바뀌었으니까 그런 표현은 좀 자제해야 한다. 언론의 중심이 인터넷으로 넘어가면서 형용사와 수식어가 많아졌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언론 기사는 팩트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 형용사와 수식어가 많아지면 팩트에서 점점 멀어진다. 수필이나 소설을 쓰는 게 아니라면 사실과 거리가 먼 재밌는 표현은 자제되었으면 좋겠다."

- 이상득 의원의 총선 불출마에는 대통령의 의중이 실린 것 아닌가? 
"이상득 의원과 이명박 대통령 형제를 지근거리에서 모신 유일한 사람이 나다. 물론 장다사로(현 대통령실 총무기획관)가 있긴 하지만. 두 분은 일와 관련해서는 거의 얘기를 안한다. 두 분이 제사나 가족행사 때문에 모여도 그렇다. 옛날부터 그랬다. 회사도 달랐는데 집에서 만나도 회사 얘기를 절대 안한다고 사모님한테 들었다. 서로가 금기시했다. 나도 일하면서 이 의원이 대통령한테 얘기해 달라고 하거나 대통령이 이 의원한테 얘기해 달라고 한 것을 본 적이 없다. 정치적으로 보면 이 의원이 경험도 많고 더 연배가 높다. 이 의원 정도의 위치라면 자신의 거취나 방향은 스스로 결정한다."

- 이제 이상득 의원으로부터 독립할 시기가 온 것인가? 
"이제 왔다가 아니라 진작 이 의원을 떠나왔다."

- 본격적인 정치적 독립이 시작된 것인가? 
"그동안 이 의원이나 대통령 모시고 선거를 많이 치렀다. 오세훈 서울시장 선거에도 참여했다. 골프에 비유하자면 나는 그동안 캐디 역할만 했다. 플레이어를 돕는 참모의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런데 이제 내가 플레이어로 처음 등장하는 것이다. 내 정치가 시작되는 것이다. 내가 선출직에 도전한다는 것은 그런 의미다. 그동안 두 분 등한테 배워온 것을 바탕으로 제 목소리와 색깔로 지역사회와 국가를 위해 일할 때가 됐지 않나?"

"중국전문가들 네트워킹하기 위해 중국연구 로드맵 만들었다"

- 그렇다면 이명박 대통령한테서도 독립하는 것인가? 
"그렇게 표현할 수는 없겠다. 왜냐하면 이 대통령이 추구하는 이상과 가치, 정책방향이 맞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분에게 올인했다. 나도 정부의 일원으로서 열심히 일했는데 5년 단임에다 중간에 금융위기가 있는 등 국제정세가 안 좋아 달성하지 못한 과제들이 많다. 신이 아니기 때문에 미흡했고, 잘못한 부분도 있다. 이런 부분까지 이어받아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크게 얘기하면 이 대통령은 완전한 선진국가로 도약하기 위한 틀거리를 만드는 것을 역사적 임무라고 생각한다. 수치로 치면 1인당 국민소득이 2만 달러에서 4만 달러로 도약하는 기반을 만드는 것을 MB정부의 역사적 임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대통령은 그 부분에서 굉장히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다. '더 큰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서 많은 성과를 냈다.

그렇다면 그 다음 단계가 뭐냐? '더 좋은 대한민국'을 만드는 것이다. 더 좋은 나라란 무어냐? 소외계층, 영세상인, 장애인, 청년, 여성, 다문화 가정 등 이런 부분을 한단계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그게 좋은 나라다. 내가 자랑스럽게 긍지를 가지고 조국으로 생각하면서 살고 싶은 나라를 만드는 게 과제다. 그런데 금융위기라는 예기치 않는 위기가 오면서 더 큰 대한민국과 더 좋은 대한민국을 병행하지 못한 측면이 있다.

위기 극복을 위해 3년을 보내다 보니 국제적 위상은 높아졌지만 서민들에게 그 위기극복의 성과가 잘 전달이 안되고 많이 소외됐던 것 같다. 이것을 극복하자는 것이 공생이고 상생이고 대중소기업 동반성장이다. 작년부터 이것을 시작했다. 이것은 어떤 정권이 들어서도 이어받을 수밖에 없다. 더 좋은 대한민국 만들기를 제가 하겠다는 것이다. (대통령으로부터) 독자적으로 가겠다는 것이 아니다."

- 이상득 의원을 더 오래 모셨는데 이 대통령의 그늘이 깊게 드리운 것 같다. 
"기간과 관계 없다. 내가 이상득 의원을 모시면서 공적 마인드가 어때야 하는가를 배웠다. 회사의 프로젝트와 공적 영역의 정책들은 성격이나 추구하는 정신이 다르다. 그때 정책 마인드가 생겼다. 대통령은 서울시장 때 결합했다. 그때부터는 일을 어떤 식으로 만들어가고 추진하는가, (이 의원에게 배운) 정책 마인드를 갖고 어떻게 구체적인 성과를 내는지를 배웠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할 수 있는 위치에 갔다. 기간은 상대적으로 짧을지 몰라도 제가 역량을 키워내고 그것을 현실에 적용하는 부분에서 (대통령이) 훨씬 더 많은 영향력을 미쳤다. 일을 하기 위한 기반을 이 의원에게  배웠다면, 그걸 현실에서 적용하고 실행, 실천하는 것은 대통령에게서 배웠다."

- 2007년 대선에서 승리하고 청와대에 들어갈 때는 어떤 마음이었나?
"지난 10년간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이 역사적 역할을 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이루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가장 큰 공은 대한민국 5000년 역사에서 권위주의를 타파한 것이다. 그게 지나치게 간 측면도 있지만 권위주의를 타파한 공로가 있다. 박정희 시대에 산업화를 어느 정도 완성했고, 김영삼-김대중-노무현 시대까지 민주화를 어느 정도 완성했다. 30년 산업화에 15년 민주화를 바탕으로 대한민국은 한 단계 더 도약해야 한다. 그게 선진화라고 본다.

선진화는 기존 선진국의 꽁무니를 따라가는 게 아니다. 앞선 나라들이 한국을 배우는 모델이나 전형을 만드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 시절에 그 주춧돌을 놓는 데 기여하자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런 것과 관련된 일들을 많이 했다. 지금 전혀 안 알려져 있는데 국내외 중국전문가를 네트워킹하는 작업을 했다. 중국은 우리의 운명을 좌우하는 데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런데 중국을 잘 모른다. 청와대에 있을 때 중국 전문가들을 거의 다 만났는데 전부 부분적이다.

중국에서 성이라는 것은 하나의 국가다. 산동성의 인구는 9000만 명이다. 전국 32개 성을 분석한 것은 하나도 없다. 우리의 운명을 좌우할 거대한 국가인데. 그래서 중국연구를 시스템화하려고 했다. 박재완 장관은 국책연구소를 만들자고 했는데 나는 반대했다. 그것은 시간이 많이 걸리고 비효율적이다. 또 중국이 얼마나 비판적으로 생각하겠나? 그래서 대한민국 중국 전문가들을 네트워킹하자고 해서 중국 연구의 로드맵을 만들었다. 전문가들에게 연구과제를 주고, 북경대 박사과정에 있는 유학생들까지 중국연구 네트워크로 활용하고,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민감한 것은 연세대나 고려대의 연구소에서 하도록 하자. 그렇게 역할 분담을 했고, 그것을 거의 다 구축했다."

- 국무총리실 산하에 중국문제연구소를 설립하려고 하지 않았나?
"실무적으로 여러 가지 안을 검토했다. 연구기관통폐합으로 여러 가지 문제가 많고, 국회의원들의 반대도 많았다. 연구 다양성도 훼손되고 해서 네트워킹하는 방안으로 간 것이다."

- 뒤늦게 중국 문제를 인식한 것 아닌가? 
"정권 초기부터 했다. 그걸 구축해 3년째 예산이 투입되고 있다. 이제 중국연구 수준이 상당히 높아졌다. 끊임없이 분과별로 토론해서 연구실적을 내고 있다. 중국연구 로드맵 다 그려놨다. 이게 밝혀지면 중국이 민감하게 생각할 것 같다."

"MB정부처럼 대통령을 욕할 수 있는 시대가 있었나?"

- 집권한 지 벌써 4년이 흘렀는데 지금 권력무상을 느끼고 있지 않나? 
"아니다. 나는 권력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권력을 누려본 적도 없다. 일을 한다고 생각해왔다. 공직에 있을 때 열심히 하고 물러나면 재충전하는 것 아닌가. 공직에 있을 때나 없을 때나 새로운 것을 만나니 좋다."

박영준 전 차관이 대구시 남구에 위치한 자신의 선거운동 사무실에 지난해 8월 이명박 대통령으로부터 지식경제부 2차관에 임명되며 찍어놓은 사진을 벽에 걸어놓고 있다.
 박영준 전 차관이 대구시 남구에 위치한 자신의 선거운동 사무실에 지난해 8월 이명박 대통령으로부터 지식경제부 2차관에 임명되며 찍어놓은 사진을 벽에 걸어놓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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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박 정부의 지난 4년을 어떻게 평가하나?
"대통령은 '더 큰 대한민국'과 아울러 '더 좋은 대한민국'을 구상했다. 정책공약을 몇 개월만에 만든 게 아니다. 몇 년에 걸쳐 만들어졌다. 저 영포빌딩 지하 2층에서 큰 칠판 갖다 놓고 전문가들과 5~6시간 토의했다. 그런 속에서 나왔다. 지금 실시하는 미소금융은 보수적 시각에서 나올 수 없다. '더 큰 대한민국'과 '더 좋은 대한민국'을 이루겠다는 계획이었는데 예기치 않게 촛불시위와 금융위기가 있었다. 본격적으로 일할 때 금융위기가 왔다. 그래서 병행하겠다는 부분이 흐트러졌다. 일단 위기를 극복해야 하니까.

한국 경제구조가 독특하다. 한국의 산업화는 대기업 수출 중심의 역사다. 지난 세월까지는 그것의 효율이 높았고, 부작용보다 성과가 더 많았다. 그래서 대한민국이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 대한민국 경제구조가 수출대기업 중심으로 고착화됐다. 위기를 극복한다고 일하다 보니 위기극복의 1차적 성과가 수출 대기업에게 집중적으로 갔다. 외부에서는 MB가 대기업 위주 정책을 썼다고 하는데 나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60년 산업화 시스템이 그렇게 돼 있었다. 

대기업에 9년간 있어서 대기업의 생리를 잘 안다. 협력업체, 하청업체에 성과를 흘려보내야 중소기업도 새로운 아이템을 만들고 기술력도 높이고 공장도 새로 지을 수 있다. 그런데 성과를 대기업이 독식한다. 게다가 지금은 IT가 발달해서 1차부터 3차까지 협력업체들의 원가구조를 대기업이 싸그리 알고 있다. 대기업이 쥐어짤 대로 짜는 것이다. 잉여를 하나도 안 남겨놓는다. 대기업만 성과를 내는 것은 더 안 된다. 60년 산업화 시스템을 국민이 용인하지 못한다. 게다가 이 시스템은 지속가능하지도 않다. 붕괴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대중소기업 동반성장, 공생, 상생이 나온 것이다. 우리 다 잘했다는 게 아니다. 실수한 것도 있고, 잘못한 것도 있다. 하지만 근본적인 경제구조가 걸림돌로 작용했다. 그걸 개혁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 많은 사람들이 "이명박 정부는 역사를 10년 이상 후퇴시켰다"고 평가한다.
"87년 체제 이래 정권 말기에 와서 나오는 평가를 보라. 거의 유사하다. 지난 10 몇 년간 반복적이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 권위주의마저 없어졌다. 그게 노무현 정부의 성과였다. 그런 분위기에 있다가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 지나치게 나간 부분에서 국가원칙을 세우자고 했다. 쌍용차나 철도파업 등 불법 노사분규, 불법시위 등을 방치했다가는 경제에 영향을 준다고 판단해 불법적인 것에는 원칙을 지켜왔다. 노무현 정부 때 광화문에서 시위할 때 경찰이 뺨맞고, 경찰서장을 직위해제해 버렸다. 그런 것들은 더 이상 안 된다고 해서 사회질서 유지를 강조했다. 실제 현장에서도 그렇게 했다. 그래서 체감하는 것들이 이전 정부보다 강할 수밖에 없다."

- 법과 원칙의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 자체가 후퇴했다는 평가가 많다.
"지금 시절만큼 대통령을 그렇게 맘대로 욕하는 시절이 있었나? 심지어 대통령을 동물에까지 비유하지 않나? 그렇게 비유한 사람을 문제삼으면 오히려 더 비난하고. 물론 옛날부터 풍자와 해학이 있었다. 하회탈춤을 보더라도 양반을 신랄하게 비난해 사회적 카타르시스를 준다. 그런 것이 사회가 건전하게 굴러가는 데 큰 역할을 한다. 하지만 지금은 좀 지나친 게 있다. 국민이 선택한 리더인데 거기에서는 최소한의 선을 지켜줘야 하지 않나? 지금 우리 사회는 지나치게 상대방을 서로 적대시한다."

- 대통령을 풍자했다고 수사까지 받는 경우가 이전 정부에서 있었나? 
"그런 사례를 찾아볼 필요가 있다. 상대적으로 권위가 깨진 분위기에 있다가 새로운 원칙과 기준이 생기는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체감하는 것이 강하지 않았겠나?"


태그:#박영준, #이상득, #이명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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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사진기자. 진심의 무게처럼 묵직한 카메라로 담는 한 컷 한 컷이 외로운 섬처럼 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징검다리가 되길 바라며 오늘도 묵묵히 셔터를 누릅니다.

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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